못 생겨서 미안 합니다/정임표
어떤 문우님께서 제 글의 문투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나는 아는 데 너는 모르제~"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문투라는 지적입니다.
"그런 문투로 쓰면 읽는 사람이 엄청 기분 나빠지고 글 쓴 저를 싫어 한다"는 나를 아끼는 마음을 담은 지적이자 충고 입니다.
동의하고 인정하고 감사하게 생각 합니다. 저는 글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씁니다만 상대방이 기분 나쁘라고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글도 그렇습니다. 제가 문투를 바꾼 이유는 이렇습니다.
수필은 실재 사실에 근거한 문학이라 수필을 읽는 독자들은 수필작품을 문학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작가 개인사로 이해 합니다.
"아! 저사람은 농사꾼이네, 저사람은 어릴 때 가난뱅이로 살았네, 저사람은 실연 당한 사람이네, 저 사람은 여자를 밝히는 모양이네," 이런식으로 말입니다. 그걸 피하려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다시 써도 어느 구석에서라도 개인사를 찾아내고 그렇게 이해 해 버립니다.(저는 이걸 인간의 관음증 본능이라 함). 개인사를 간파 당하지 않으려고 꽃가꾸기나 농사 짓기를 소재로 하면 "아 저사람 지금 할일이 없어 텃밭 가꾸기 하는 구나" 이렇게 이해 합니다. 여행 이야기를 쓰면 " 나는 일하는데 지는 놀러 다니는 구나" 이렇게~
소재를 형상화 시키고 비틀고 하면서 수필을 문학적으로 읽어주길 바라며 글을 쓰지만 절대로 문학적으로 이해를 아니 합니다.
수필 작가님들 조차도 남의 수필작품을 읽을 때는 문학적으로 읽지 않습니다. 수필을 문학적으로 읽지 않는 독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공개된 지면(특히 카페)에 자기 작품을 공개적으로 올릴 수 있는 수필작가는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씩 수필 작가님들의 작품에 대해 문학적으로 해설한 독후감을 올리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문학적으로 읽어 주면 고맙겠다는 내 속마음 까지 담아서. 수필을 문학적으로 읽어주길 아무리 소망하지만 문학적으로 읽지 않는 이걸 변화시킬 재간이 내게 없으니 "아예 아는 체 하며 글을 쓰자", 그러면 그 속에서 얻을 것을 찾은 사람은 얻어 갈 것이고, 못 찾은 사람은 얻어 갈게 없을 것이고, 기분이 나쁜 사람은 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굳히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이건 내 표현의 자유이고 내 사상의 자유이고 내 신념의 자유이니 만치 나는 한 동안 마이웨이를 고집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 드려서 "독자들의 입방아에 아부하지 않고 내 쓰고 싶은 데로 쓰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는 데 너는 모르제~"하며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읽히더라도 "수필을 문학적으로 읽어 주는 독자"가 생길 때 까지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게 나의 지론입니다. 문장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 변화되고 새로운 신세계로 그 외연이 넓어져 가는데 내 문장에서 얻어 갈 게 없다면 종이만 내다 버리는것입니다.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써서 산의 나무만 죽인다는 이 말씀은 소목 김규련 선생님께서 살아 생전에 수필가협회 총회에서 후학들에게 "기분나쁠 정도로 대갈 일성"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가 뭐라하더라도 네 길을 가라는 말을 불가에서도 "무소 뿔 처럼 혼자서 그렇게 가라"는 말로 문학적인 표현을 써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집스레 밀고 가다보면 "대오각성"하는 경지가 열릴 것이라는 선각들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을 울릴 작가가 되겠다고 나선 길에서 독자들에게 "내 개인 사생활의 동정이나 받고서야 무슨 작가다운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게 아직 내가 풀지 못한 화두 입니다.
풀리면 문투가 바뀔 것입니다.
"못생겨서 미안합니다."
못생겼지만 그래도 내 얼굴에 자존감을 가지고 살겠다는 이주일선생님의 해학이지만 못생겨서 미안한 거나 잘 난체 해서 미안한 거나 같은 말입니다. 타고난 자기 얼굴 부지런히 가꾸면서 살면 되는 데, 남의 얼굴에 뭔 관심이 그리도 많으냐는 뜻입니다. (2023.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