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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법칙
―속죄양들
박종관
매연에 휩싸인 도시는 누군가가 마구잡이로 빚어 놓은 만두 같다.
유리 진열장 속에서 며칠쯤 묵어 바싹 말라 버린 피에 균열이 가 실체를 알 수 없는 소가 일부 삐죽이 솟아난 왕만두. 아니, 매연이 조금씩 벗겨지는 오전 열 시 무렵이면 식용유를 흠뻑 뒤집어쓰고 누렇게 굳어진 군만두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자는 매일 수백 줄의 김밥을 만들어 팔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자신은 잘 먹지 않는 김밥을 만들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더 많은 김밥을 만들어 팔기 위해 갖가지 재료를 사 들이면서도 만두만을 즐겨 사 먹는 여자. 그녀는 지금 만두소처럼 실체를 알 수 없는 생에 대한 적의를 이겨내기 위하여 또 한 번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꿈꾸고 있다.
거리가 갓 말아낸 김밥 속처럼 따듯하다.
아파트 단지 맞은편의 오층 상가건물 벽은 여덟 개의 점포가 저마다 요란스럽게 내건 간판으로 어지럽다.
맨 아래층 귀퉁이에 소박하게 내걸린 김밥천국이라는 상호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여덟 개의 간이 탁자가 차지한 실내도 북쪽으로 문을 낸 탓에 낮에도 불을 밝혀야 할 만큼 어둡다.
하늘색 블라인드를 배경으로 설치된 텔레비전에서 연속극의 대사가 흘러나온다. 예쁘게 틀어 올린 머리에 흰 수건을 맵시 있게 두른 여인이 김밥을 말고 있다. 얇은 비닐장갑을 낀 손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일 때마다 반짝반짝 윤기를 토해내는 김밥 줄이 쌓여간다.
단지 안의 벚나무들도 꽃을 활짝 피웠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처럼 나뭇가지를 좇아 하늘 높이 솟아오른 꽃송이들은 가벼운 바람에도 우수수 꽃비를 뿌려 댄다. 삼삼오오 손을 잡고 꽃나무 사이를 거니는 소녀들도 잊을 만하면 호들갑 어린 환호성을 질러댄다.
김밥을 마는 여인도 가끔씩 얼굴을 들어 창 밖을 본다. 인도를 따라 늘어선 나무들도 수시로 꽃비를 내린다. 잘게 썬 색종이 조각인 듯 작고 얇은 꽃송이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릴 때마다 여인의 눈이 몽롱하게 풀린다.
차도 건너편 인도에서 겨우내 자리를 지켜온 만두가게의 트럭 지붕도 꽃잎으로 하얗게 변했다. 온 산야에 초록의 물결을 몰고 올 봄비가 밤을 새워가며 내린 선물이라고, 여자는 만두 파는 청년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여자의 볼이 붉어진다. 마음도 달뜨는지 도마 위로 작은 대나무발이 펼쳐질 때마다 옆구리가 터진 김밥이 긴 소시지 조각을 문 채 연이어 나온다.
여인이 일손을 멈춘다. 다시 한번 청년을 바라보더니 김밥 석 줄을 썰어 일회용 도시락에 담아 들고 밖으로 나온다. 교복 차림의 소녀들에게 만두를 건네주고 돈을 받던 청년이 팔을 번쩍 들어 인사를 한다. 여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여인이 길을 건너와 김밥을 건넨다.
“이것으로 이제 다섯 번을 넘겼으니까, 오늘부터는 누나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청년이 정성껏 만두를 담아 건네면서 말한다.
여인의 얼굴이 더 붉어진다.
“그걸 꼭 물어봐야 하나. 부르는 사람 맘이지.”
“우아. 그럼 승낙하시는 거죠, 누나! 오늘은 진짜 기분 짱인데. 어쩔까요. 장사 집어 치우고 벚꽃 구경이나 가볼까요.”
“안돼. 엊그제도 아이가 아파서 쉬었는데, 뭘.”
“그럼 이따 봐요. 장사 끝내고 제가 한턱 쏠게요.”
“알았어. 저번처럼 떼쓰지 않기로 하고.”
“누난 참 그게 어디 떼를 쓴 건가요. 전 아주 심각하게 프러포즈를 한 거란 말이에요.”
“우이, 못 말리는 우리 왕자님.”
여자가 재빨리 청년의 볼에 입술을 대고는 돌아선다.
청년의 입이 벌어지면서 눈동자가 환희의 감정으로 환해진다.
여자가 벚나무 사이를 지나간다.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데 희고 발그레한 꽃잎들이 머리와 옷깃에 악착같이 달라붙는다.
여자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꽃잎을 떼어 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텅 빈 직육면체의 공간이 여자의 몸을 끌어들인다. 매끄러운 벽면에 박힌 거울 속으로 상기된 얼굴이 나타난다. 여인이 벽에 등을 대고 눈을 감는다. 엘리베이터가 멎고 벨이 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여인의 얼굴도 사라진다.
여인이 자기 집 문 앞에서 만두가 든 봉지를 살짝 열고 냄새를 맡는다. 웃음을 참는 뽀얀 볼살이 미세하게 꿈틀거린다.
여인이 초인종을 누른다. 녹음된 새소리가 연이어 솟아난다. 굳게 닫힌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머리만 보이던 계집아이의 몸이 불쑥 나타나 여인의 품에 안긴다. 여인이 계집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작은 거실이 사람을 맞아들인다. 여인이 주방으로 들어간다. 냉장고를 연다. 반쯤 남은 피자가 비닐로 된 봉지 옷을 벗고 언 몸을 드러낸다. 여인이 프라이팬에다 올리브기름을 붓는다. 가스레인지에서 파란 불꽃이 피어오른다. 피자가 기름 위에서 자글자글 녹는다. 피망이 타면서 매캐한 냄새가 거실로 번져난다.
텔레비전 소리가 너무 크다. 여인의 시선이 자주 거실 쪽으로 간다. 계집아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거실 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 액자 속에서 여인이 사내의 품에 안겨 웃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얼굴이다. 여인을 뒤에서 꼭 안고 있는 사내도 퍽 앳된 모습이다. 배경으로 펼쳐진 바다 위를 갈매기들이 날고 있다.
“엄마아, 빨리 와 봐아.”
사진 속의 사내를 빼닮은 계집애가 여인을 부른다.
“조금만 기다려. 다 됐어.”
“피자 땜에가 아녀어.”
“그러엄, 왜애?”
“세상에 이런 일이를 재방송 한단 말여.”
“어마, 그래. 알았어. 금방 갈게. 아유, 기특해. 배고플 건데 엄마 생각을 다 하구.”
세상에 이런 일이란 여인이 즐겨 보는 프로다.
여인의 손길이 빨라진다. 고소한 냄새가 거실로 흘러든다.
여인이 덥힌 피자를 들어낸다.
얼른 간식을 먹여서 피아노 학원에 보내야 한다. 아빠가 없다고 왕따를 당하는지 밖에 나가길 꺼려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학교는 군말 없이 다니는데 피아노 학원에 갈 시간만 되면 늑장을 부린다. 요즘 애들은 아무리 잘 대해줘도 한번 먹은 나쁜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피자 파티도 여러 번 열어 주었지만 단지 아이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유일한 벗이 텔레비전이다. 한번 앉으면 일어설 생각을 안 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란 프로는 제목처럼 황당하고 기이한 내용들로 채워진다. 병아리 때부터 방안에서 자식처럼 키워낸 수탉이 홀로된 여주인을 어디나 따라다니면서 보호해 준다거나 설탕을 너무 좋아하게 된 노인이 국과 찌개는 물론이고 밥에다가도 그걸 넣어 비벼먹는 걸 보여주거나 강아지를 어미처럼 보호해주는 거위 이야기며,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해 나무 막대기를 늘 물고 지내는 투견의 일상 등을 흥미롭게 편집하여 보여준다.
계집애 앞에 피자와 우유가 올려 진 소반이 놓인다. 접시 속의 피자 조각이 화사한 열대 우림지역의 꽃잎 같다. 아이가 작은 입을 오물거린다. 울긋불긋한 고명이 앙증맞게 섞인 피자가 조금씩 사라진다. 여인도 봉지를 열어 만두 하나를 입에 넣는다.
“엄만 또 만두 먹어. 피자도 먹어 봐.”
아이가 손에 든 피자를 내민다.
여인이 고개를 저으며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춘다. 여인의 애틋한 시선이 사진 속의 사내에게로 가 잠시 머문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한 사내가 꽃을 먹는 사람으로 소개된다. 길게 기른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모습이다. 세상과 오랫동안 담을 쌓고 지냈다고 한다. 화면에 시선을 준 여인의 얼굴로 공감의 슬픈 그림자가 짙게 서린다.
아이가 우유를 더 달라고 한다.
여인이 일어선다. 꽃을 따먹던 지난날을 생각하느라 걸음걸이가 위태로워진다. 주방으로 들어온 여인이 우유를 따른다. 우유가 바닥으로 찔끔찔끔 떨어진다. 여인이 주방을 나와 아이 앞에 우유를 놓아주고 거실을 휘둘러본다. 화면 속의 사내가 꽃을 먹는다.
여인이 쫓기듯 방안으로 들어간다. 여자가 화장대의 의자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다가 옷장을 연다. 남자용 옷가지와 물건들이 가지런히 쌓였다. 여인이 잘 개어진 침실용 가운을 내어 가슴에 안는다. 눈을 감고 깊은 숨을 거푸 내쉬다가 제 자리에 놓고 거실로 나온다.
인터뷰에 응하는 사내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하다. 진행자가 왜 꽃을 먹느냐고 묻자, 사내가 보조역으로 나선 여성 탤런트가 내민 마이크에 대고 말한다.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나 무서워한 여인이 그리워서라고. 가늘게 떨리는 음성이다. 여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떨리는 몸으로 아이를 뒤에서 안는다. 진행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분을 향해 하고 싶었던 말씀이 있으면 이 기회에 하시라고 권한다.
사내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한다.
여인이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꼭 쥔다. 전혀 모르는 사내인데도 큰 충격을 받은 듯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사내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나간다.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말해야 하는 슬픈 진실이라고. 사내의 말이 검은 활자로 변해 화면 아래의 좁은 띠 속을 빠르게 흘러간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인이 울음을 터뜨린다. 놀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다본다.
“엄마, 울지 마. 어디 아파?”
“엄말 생각해 주는 네 마음이 너무 예뻐서 그래.”
“정말!”
“응.”
“나두, 엄말 제일 사랑해.”
여인은 가슴을 파고드는 아이를 안은 채 꽃을 입에 물고 조금씩 작아지는 화면 속의 사내를 지켜본다.
아이가 여인의 품을 벗어난다. 방에 들어가 가방을 메고 나온다. 여인이 아이를 현관까지 배웅한다. 돌아서는 여인의 표정이 처연하다.
여인이 만두를 집어 입에 넣는다.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여인의 손이 또 하나의 만두를 집어 든다. 입술 근처가 갖가지 재료가 섞인 만두소로 얼룩진다. 여인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오열한다.
한낮의 바닷가는 세상의 끝처럼 적막하고 쓸쓸하다.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청년이 하나 앉아 있다. 앳된 흔적이 눈매와 두 볼에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바다를 떠난 소라껍질처럼 외로움에 한껏 지쳐가는 모습이다.
그는 아침 아홉 시 반이면 어김없이 해변으로 나왔다.
갈 곳이 없었다.
사람을 향한 불신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저 두렵기만 했다.
그는 자신을 고아원 앞에다 버리고 떠난 어머니라는 여자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한 해 전에 만났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소식 한 자 없더니 고아원을 나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그를 여인은 찾아왔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꼬여 갔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부터 신문과 우유배달을 하여 모은 보증금 오백만 원이 사라지고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는 카드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사채를 써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버리고 떠난 자식의 간을 야금야금 빼앗아 먹기 위해 여인은 처음 한 달 동안 너무나 감동적인 모정으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여인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치유가 되지 않는 노름 벽이 있었다. 그 고질병 앞에서는 모자지간의 정도 한줄기 덧없는 바람일 뿐이었다. 그는 새벽에 들이닥쳐 또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는 여인의 손을 조용히 떼어내고 집을 나왔다. 갈 곳이 없었지만 두렵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는 이가 없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루 종일 두 귀를 활짝 열어 놓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가도 말을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그의 귀만 간간이 등 뒤를 향해 쫑긋거렸다.
그는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무서운 유혹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는 수시로 고개를 저으면서 일어서서 하늘을 살피다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며 주저앉곤 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얼굴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갔다. 닷새 만에 앳된 소년의 모습이 가시더니 열흘도 되지 않아 두 눈만 퀭하게 뚫린 우울한 이십 대 후반의 얼굴로 변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노란 반코트에 청바지 차림의 여자가 다가와 어깨를 흔들었다. 단아한 키에 이목구비가 선명한 얼굴이었으나 가녀린 손에는 핏기 하나 비치지 않았다. 흑진주처럼 야무지게 빛나는 눈동자도 햇살 가득한 허공을 불안스레 헤집고 있었다.
“왜, 여기서 이, 이러고 있지요?”
가늘게 떨리고, 조금은 더듬거리는 소리였지만 너무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낱말을 이루는 자모음이 제풀에 풀어져 뿌연 이내 속을 제멋대로 떠다닐 것만 같았다.
그제야 그는 얼굴을 들었고 여자가 놀란 듯 주춤 물러섰다.
뒷모습과 달리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인데도 혼자 실컷 울었는지, 눈자위가 불그스레했다. 여자의 유난히 커 보이는 눈에도 숙면을 취하지 못한 탓인지 핏발이 가늘게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가 엇갈렸다. 생면부지의 남녀였으나 큰 눈 때문에 닮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남자의 눈 속에서 반가움의 빛이 번득이다가 사라진다. 여자의 볼로도 엷은 미소가 번져났다. 여자는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녀도 관속처럼 밀폐된 좁은 방에서 유혹의 소리에 시달렸다. 그걸 뿌리칠 수 있는 한줄기 빛을 찾아 한밤중에도 밀렵꾼처럼 바닷가를 헤매고 다녔으나 단 한 번도 행운을 잡지 못했다. 여자는 호텔 건물의 반지하 방에서 남자를 지켜보았다. 하루에 한 시간 반 정도만 햇살을 끌어들이는 좁고 작은 창을 통해 지켜본 사내의 모습은 바라볼수록 위태로웠으나 그래서 더욱 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자는 세상 밖으로 떠밀려 난 것 같은 한 남자의 고독을 지켜보면서 여고 시절을 떠올렸다. 틈만 나면 몹쓸 짓을 하는 계부와 그런 인간을 안락한 생활을 위해 묵인해주는 엄마가 사는 집을 뛰쳐나와 떠돌던 도시의 수많은 길들을 생각했다. 그녀는 공단도시의 낯선 동사무소 뒤뜰에서 산철쭉을 따 먹었다. 그녀가 눈물 속에서 따먹은 것은 꽃이 아니었다. 여자의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의 손길이었다.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끝없이 펼쳐진 쪽빛 바다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한밤중에 집을 나왔다. 그리고 막막한 심정으로 떠돌다가 철쭉꽃을 따 먹으면 죽는다는 어릴 적의 말을 기억해냈다.
바다가 물이랑 하나 일구지 않고 거대한 숨을 조용히 내쉰다. 들숨과 날숨으로 술렁이는 물결도, 해안의 모래색도 눈여겨보면 천차만별의 변화를 숨기고 있다. 특히 물에 젖었다가 드러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모래는 멀리서도 확연히 구분이 된다.
여자의 시선이 젖은 모래의 띠를 따라 조금씩 궁형의 만을 벗어난다. 수평선을 향해 거대한 조가비처럼 활짝 열린 호텔지붕을 거쳐 먼 허공으로 나아가던 시선이 멈칫한다. 흰 구름이 수평선 너머로 잠겨 가면서 회색빛 허공도 연두색으로 물들어 간다. 누군가가 쪽빛 바닷물에다 새하얀 옥양목 천을 담가 물을 들이는 모양이다. 구름이 사라진 자리마다 푸른 빛깔의 허공이 쉼 없이 내걸린다.
남자와 여자의 눈에도 쪽빛 그늘이 그득히 고여 있다.
남자가 여자를 훔쳐본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말을 건네온 사람이다.
갈매기들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끼룩거리면서 매끄러운 포물선을 쉼 없이 그려낸다. 아침부터 지겹도록 본 새들이다. 쌍기역자로 무수히 솟구쳐 오른 울음소리가 날카로운 미늘에 걸려 마디마디로 해체되더니 속절없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남자가 무릎을 세워 턱을 올려놓는다.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어서인지 본래의 얼굴로 변해 한껏 수줍음이 배어난다.
때맞춰 햇살도 넉넉해져 부드럽게 흘러내린 턱에서 보송보송한 솜털이 반짝인다. 잠시 당황했던 여자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번진다.
사내가 양손을 허벅지 아래로 내려 깍지를 끼고 눈을 감는다. 아까보다 훨씬 의젓해진 그녀도 똑같은 자세로 옆에 앉는다.
“너, 집 나왔구나. 부모님한테 혼났니?”
그가 고개를 젓는다.
“그럼 무슨 고민이 있어서 그러니? 누나가 도와줄까?”
그는 아무 말이 없다.
“왜 혼자 나와 있니? 좀 있으면 어두워질 건데.”
“살고 싶지 않아요.”
그가 갈매기 울음을 눈으로 좇으며 대답한다.
“그래? 나도 그런데.”
그녀의 응수는 간략했으나 그의 손은 금방 풀렸고 허리도 꼿꼿이 펴졌다.
“정말요?”
그가 반기는 모습에 그녀가 쓴 웃음을 짓는다.
그녀는 겁먹은 그의 눈을 통해서도 흰 철쭉 꽃잎처럼 무수히 솟아나는 야윈 손을 기억해 냈다.
“나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죽도록 미워해야 하는 사람이야.”
“그럼. 저랑 진짜 똑같네요.”
그가 그녀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다시 손을 내려 깍지를 낀다.
어둠이 검은 보자기처럼 흩날리며 마구 밀려들고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도 점점 차가워진다.
남녀의 몸이 한껏 둥글게 웅크려 든다.
호텔의 지붕도 흐릿하게 떠 보인다. 수평선마저 감쪽같이 사라지고 백사장에 인접한 가로등에 주황색 불이 들어온다. 불빛이 미치지 않는 바다는 한 가지 색으로 검푸르다.
가로등을 등지고 어두운 바다를 향하고 앉은 남녀의 모습이 거대한 조갯살 속에 박힌 진주알처럼 작아 보인다.
“해운대엔 왜 왔어? 아는 사람은 있어?”
“없어요.”
“그랬구나.”
“누난 왜 왔어요? 아는 사람 있어서 왔어요?”
그의 볼멘소리에 그녀의 입가로 쓸쓸한 미소가 번진다.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배고프지? 가자. 맛있는 거 사 줄게.”
그가 침을 꿀꺽 삼킨다. 그러나 꼼짝 않고 시선을 내리깐 채 모래만 쥐었다가 놓는다.
“아, 배고파. 난 혼자서는 밥도 못 먹고 잠도 잘 못 잔단다. 그러니 네가 좀 도와줘.”
그녀가 말을 바꾸어 제의해도 침묵만 흐른다.
“혼자 있으면 무섭단다. 너도 그럴 걸.”
그녀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소곤거린다.
그 순간, 어둠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서 바늘 끝처럼 가는 빛이 반짝 솟구친다. 그녀의 가지런한 치아의 끝도 살짝 드러나면서 탄성이 토해진다. 수평선을 삼킨 어둠 속에서 달이 솟는다. 손톱 만하게 비쭉 솟은 것이 커다란 눈썹으로 변하더니 복주머니 같은 빛 덩어리가 불쑥 솟구쳐 오른다. 바다도 잘 닦여진 청동거울로 변해 온갖 불빛들을 일제히 비추어낸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달이 몇 번 모습을 감추더니 훌쩍 자란 모습으로 나타난다. 커다란 먹장구름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알루미늄 쟁반처럼 하얗게 닦여진 달이 수면에다 똑같은 크기의 모습을 찍어내고 있다.
여자와 남자가 서로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 달을 보고 있다. 그가 여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그녀가 그의 머리에 얼굴을 묻는다. 이렇게 한 며칠만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다고 여자는 마음속의 달을 향해 간절히 기원한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해변을 벗어난다.
남자의 키가 여자보다 한 뼘은 더 크다. 여자가 오히려 그의 팔에 매달려 가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여자의 뒷모습은 낮에 바닷가로 나올 때보다 훨씬 당당해져 있다.
제과점 앞에서 파란 형광 줄을 단 풍차가 천천히 돈다. 여자가 그의 손을 잡고 들어간다. 한 접시의 빵과 따듯한 우유와 커피가 테이블 위에 놓인다.
여자는 그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다정한 미소로 지켜보다가 목이 멜 성싶으면 우유가 담긴 컵을 들어 입에 대준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그가 머리를 끄덕인다.
“넌 진짜 내 동생이야. 알았지? 오늘 밤부터 우린 함께 사는 거야.”
그의 눈동자로 의혹의 그림자가 어린다. 표정도 복잡하게 얽힌다. 여자는 말이 없다.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인다.
“고맙다.”
여자가 눈물을 글썽인다.
그의 눈에도 물기가 어린다.
“나를 며칠만 지켜준다고 약속할 수 있지?”
“예.”
그가 빵을 한 입 가득 문 채 제법 씩씩하게 대답한다.
“자, 그럼. 약속해.”
여자의 제의에 그가 손가락을 내민다.
그녀가 그를 데리고 제과점을 나온다. 시장으로 들어가 잠바를 사서 갈아입힌다. 운동화도 사 신기고 프로 야구팀의 로고가 새겨진 모자도 사서 씌워준다.
“이건 집에 가서 목욕하고 갈아입자.”
속옷과 양말을 사면서는 그녀가 말한다.
그는 그런 여인을 통해 얼핏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으나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의 눈에서 다시 의혹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그러나 여자는 갈수록 의젓해진다. 남녀가 손을 잡고 시장을 돌아 나온다. 그는 제법 말쑥한 도시청년으로 변했다.
다시 해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보인다.
엄청나게 높은 건물들도 잇달아 나타난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망설이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를 꼭 지켜줘야 해. 알았지?”
그는 거듭되는 제의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두려움을 느낀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얘기가 생각난다. 그러나 여자의 눈물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 말아요, 난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넌 참말 좋은 아이다. 이제 우린 한가족이야. 누나라고 다시 한번 불러 봐.”
“누나.”
“그래, 그래. 그렇게 부르니 너도 좋지?”
“예.”
여자는 결심한 듯 청년의 손을 잡고 호텔로 들어간다.
제복의 수위가 거수경례를 한다.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바람개비같이 생긴 유리문이 빙글빙글 돈다. 모두 다 말쑥한 차림의 신사숙녀여서 청년은 금방 기가 죽는다. 여자는 긴장된 몸짓으로 그를 인도한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런데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 아래로 내려간다. 지상의 불빛이 멀어지고 달이 조금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깜빡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청년은 바짝 긴장한다. 여자의 눈에서도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긴 비명소리로 반사되어 나온다. 지하 2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니 아주 넓고 복잡한 주차장이다. 거기서 다시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가서야 여자는 작고 단단해 뵈는 철문을 열었다. 좁고 긴 반지하 방이었다. 거기서 남녀는 오누이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가 서로의 따듯한 품 안에서 눈을 떴다.
완벽하게 소외된 공간이었다.
문을 잠그지 않아도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여자는 하루 종일 두문불출하다가도 휴대폰만 울리면 한밤중이거나 새벽에도 지상으로 올라갔다가 지친 얼굴로 돌아왔다.
그때마다 여자는 나이를 먹어갔다. 어느덧 제 나이의 얼굴을 되찾은 그에게 그녀는 더 자주 어머니처럼 다가왔다.
여자가 달력 앞에 서서 어제 날짜에다 붉은 사인펜으로 엑스 표를 친다. 청년이 상단 여백에 적힌 <21-21=0>을 바라본다.
여자가 나이를 물은 뒤 적어 놓은 숫자들이다. 스물 한 개의 동그라미 중에서 이미 열일곱 개에 X표가 덧입혀졌다. 나흘 밤이 남았구나, 여인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제는 온종일 자전거를 타고 해안을 오르내렸다. 그저께는 유원지로 소풍도 갔다. 사내는 여자가 사준 것들을 다 착용하고 나섰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청년은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무심결에 한 번씩 드러내는 냉소를 통해서도 그녀의 속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은 세상을 향한 무서운 적의였다. 어떤 날은 돌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역을 수행하는 놀이를 했다. 아버지도 역도 하고 엄마 노릇도 했다. 경찰관과 사장도 등장하지만 모두 다 악마였다. 사장 역도 무섭다. 제일 싫은 건 포주 역이다. 엄마 역을 행하는 여자의 얼굴을 대할 땐 울음이 절로 터졌다. 경찰관들도 비겁한 자들이었다. 아버지는 무책임한 사내일 뿐이었다. 엄마도 이기적인 여자였다. 계부라는 사내는 비열한 짐승이었다.
술이 취한 여자는 욕쟁이로 돌변한다. 허공을 향해서도 무서운 저주를 퍼붓는다. 그때마다 그는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무수한 얼굴들을 만나야 했다. 괴기스럽고 무서웠다.
그러나 그럴수록 청년의 더 깊은 마음속에서는 여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첫사랑으로 뜨겁게 솟아나는 것이었다. 이제 청년에게 여자는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보석이었다.
여자는 한밤중에도 일어나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마구 때릴 것을 요구했다. 여자의 몸에 새겨진 문신들과 멍 자국이 요귀처럼 튀어나와 척척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청년은 여자의 몸에서 그것들을 없애주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들을 대신 품고 저 먼 어둠의 바다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는 밤마다 여자를 통해 지하방의 아래까지 밀려들어와 뒤척이는 바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수평선 너머로 아득히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길 나가면 곧장 바다로 뛰어들 것만 같았다. 여자의 야윈 몸을 통해 청년은 이 세상이 토해내는 무수한 비명과 절규를 들었다. 그때마다 청년의 입에서도 끔찍한 욕이 쏟아졌다. 여자를 향해서도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 청년을 여자는 슬픈 눈으로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튿날이면 더욱 살갑게 굴면서 뭐든 마음대로 하게 했다. 청년이 난폭해질수록 여인은 순한 양으로 변해 갔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그의 시선이 머무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사들이려 했다. 필요하지 않고 너무 이른 물건들도 쌓여 갔다. 여자는 면도기며 침실용 가운도 사 주었다. 모두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청년의 눈으로도 쓸쓸함은 나날이 깊어지고 있었다. 일요일이면 여자는 청년을 데리고 성당에 나아갔다. 너무나 엄숙한 의식이어서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라며 가슴을 치는 여자를 청년은 두려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달력의 X표가 스무 개가 된 날 밤이었다.
여자는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를 데리고 호텔방으로 올라갔다. 미리 예약을 해둔 방인 듯했다.
그녀는 청년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그는 김이 무럭무럭 솟는 물을 틀어놓고 옷을 벗었다. 욕조 속의 물이 조금씩 차올라 배꼽을 넘어섰다. 마지막 의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여자가 들어왔다. 가슴과 다리가 다 드러나는 예쁜 분홍색 가운을 걸쳤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볍게 묶인 끈이 풀어지기라도 하면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꽉 막혀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지켜달라던 말이 자꾸 생각났다. 여자가 청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몸이 엉거주춤 끌려나왔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때를 밀었다. 가늘게 말린 검은 때가 줄줄이 떨어져 나왔다. 너무나 부끄러웠지만 마음은 아늑한 기쁨으로 터져나갈 듯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여인의 손길은 그의 몸을 구석구석을 찾아갔다. 비누를 칠하자 여인의 손길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청년이 움찔움찔 놀란다. 이상한 표정과 몸짓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때마다 여자는 이를 물면서 웃음을 참아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여자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청년의 몸짓도 더 이상해진다. 여자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청년도 얼굴이 빨개져서 따라 웃었다.
“다 됐어.”
여자가 물을 끼얹어 준다. 비누거품이 일시에 사라지면서 그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백옥을 깎아 빚어 놓은 듯 아름답다. 여자의 눈동자로 자랑스러움이 가득 차오른다. 여자는 다시 따듯한 미소로 청년을 욕조에 들게 한다. 여인을 외면하는 청년의 눈에 물기가 그득 고인다. 그가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속에서 내 탓이라며 가슴을 치는 여자의 손이 흰 꽃잎으로 변해 무수히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다.
남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에 그가 악몽을 꾼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활짝 열려진 창문으로 차가운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다. 청년이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흐느끼며 창가로 다가간다. 검은 옻칠로 번질거리는 수면에도 달이 떠 있다. 한껏 일그러진 모습이다. 여자의 야윈 얼굴이 떠오른다. 여자의 눈물 가득했던 눈이 바다로 변해 그를 부른다. 청년의 입가로 미소가 어린다. 나를 꼭 지켜달라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청년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실내를 휘둘러본다. 검은 구름장이 달을 가리고 느리게 지나간다. 세찬 바람이 일어 커튼이 휘날린다. 달은 다시 나타났지만 청년은 보이지 않는다. 침대 위로 달빛만 슬금슬금 기어오르는데, 유령처럼 나타난 여인이 가운을 펄럭이며 서 있다.
창 밖의 어둠 저 아래에 청년이 쓰러져 있다.
보안등 불빛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꽃잎처럼 떠 있고 청년은 그 한가운데에 무참히 꺾인 꽃대처럼 웅크린 자세로 누워 있다. 그의 몸 주위로 검은 얼룩이 달무리처럼 흥건히 괴어 든다. 어둠 속에서 금방 핀 달맞이꽃 같다.
이튿날 오전 열 시 무렵에 청년이 앉았던 백사장으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나타나 무릎을 모으고 앉는다. 양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 깍지를 끼고 먼 바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린다.
한 번씩 그렇게 얼굴을 들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씩 젊어진다. 그리하여 한 주일이 지나자 완연한 여고생의 모습으로 변한다.
소녀의 귀가 가끔씩 쫑긋거린다.
활강하는 갈매기의 울음이 갈고리 모양으로 날카롭게 끊어져 허공에 박힌다.
그녀가 일어선다.
원래의 얼굴을 되찾은 한 소녀가 천천히 백사장을 벗어난다.
여자가 방을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크게 떠진 눈동자가 벽면의 거울에 멀뚱히 박혀 있다.
엘리베이터마저 낯설다. 내가 왜 이 시간에 이걸 타고 있는 것일까, 여인의 마음속에서 다시 두려운 의문이 솟아난다. 아무리 이를 사려 물어도 마음속으로 숨어든 짐승의 눈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 나 어째. 어떻게 또 살아가나. 여인의 작은 몸에서 긴 탄식이 쏟아진다.
여인이 공룡처럼 우뚝 솟은 아파트 건물을 빠져 나온다.
짙어진 황사 바람을 타고 작고 흰 꽃잎이 끝없이 날아오른다.
단지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달려간다.
만두를 파는 청년이 손을 흔든다.
여인이 다가간다. 능숙한 솜씨로 만두를 빚어내는 사내의 손을 홀린 듯 바라본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마술사 같다. 그 손을 잡으면 이 아름다운 봄날에도 왜 꽃이 져야 하는지, 그 서러운 이유를 알 것 같다.
새하얀 플라스틱 상자 안에 반쯤 담긴 만두소로도 희고 발그레한 꽃잎들이 점점이 날아와 박힌다.
차지게 반죽된 피에 소를 얹어 만두를 빚는 사내의 눈을 통해서도 여자는 철쭉꽃처럼 야윈 손이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수히 솟아나는 것을 본다.
“바다가 보고 싶어.”
여자가 간절한 눈으로 사내를 응시한다.
“누나 마음이 내 마음. 오우케이!”
사내가 얇게 치댄 피 위에 소를 듬뿍 얹으며 활짝 웃는다.
여인이 도로를 건너간다.
여인을 끌어들인 분식집의 문이 소리 없이 닫힌다. 그 옆의 부동산 중개소며 제과점이며 사진관 안에서도 사람들이 흐릿한 상으로 어른거리다가 깜빡 사라진다.
박종관
충북 충주 출생. 199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길은 살아있다』.
―『시에』201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