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 정웅표 개인전에 대한 단상
-좋은 전시 & 풀어야 할 과제-
좋은 작품을 보면 눈이 시원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오랜만에 이런 느낌을 주는 전시를 관람했다.
전시의 주인공은 이십여년전 동문수학한 작가였기에 더욱 큰 감회를 주었다.
긴 세월만큼이나 작가의 글씨는 많이 성숙해 있었다.
전통을 지키되 자기표정이 뚜렷했다.
달필이었다. 그런데도 점획 어디에도 그냥 지나간 흔적이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결구와 장법에서 작가가 얼마나
이 작품전을 위해 고뇌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작품은 오감(五感) 전체를 자극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한 전시였다.
가야금에서 튕겨져 나온 듯한 청아한 운율이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웅'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한 작품도 있었다.
이는 결코 감상에 취해서 하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옛 화론에 보면 좋은 작품을 평가할 때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것은 주로 작품을 상찬(賞讚)할 때 주어지는 용어로 쓰여져 왔다.
기(氣)의 울림. 선인들은 이것이 있음으로서 작품의 참다운 생명이 있다고 보았다.
작품전이 끝나고 작가로부터 이번 작품준비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유자적하며 쉽게 이루어낸 작품이 아니었다.
뼈를 깎는 아픔과 고행이 뒤따른 작품들이었다.
닭이 알을 낳는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 겪는 아픔과 고통으로 이룬 출산이었다.
앞서가는 것에 익숙한 현대 디지털 문명의 영향을 받은 듯
최근들어 이론도 실기도 속도경쟁을 벌이고 있다.
책을 한달만에 쓰고, 논문을 일주일만에 완성하고, 개인전을 한두달만에 끝냈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은 능력있는 자들의 당연지사가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죽림의 개인전은 아주 남달랐다.
이번 작품전은 월전선생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초대전이었다.
그동안 화가에게만 기회가 주어져왔던 월전미술문화재단 선정작가 전시가
2010년부터 서예로 확대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죽림(竹林) 정웅표(鄭雄杓) 초대전은 월전미술관에서는 처음으로
서예로 개최된 선정작가 전시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월전선생은 평소에 "그림은 손끝재주로 그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늘 강조했다.
"좋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고민하고, 사색하고, 정신이 담겨야 합니다."
이 말은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한달 전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이러한 월전의 예술정신은 이번 선정작가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서예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준 보기 드문 전시였고,
서예의 희망을 제시한 쾌거였다.
도록에 실린 약력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1952년생 충청남도 홍성 産
一中 김충현 선생 사사
간단한 약력이 오히려 시선을 멈추게 했다.
죽림에게는 소개되어야 할 더 많은 이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생략하고 글씨를 가르쳐주신 분만을 명기한 것을 보면,
스승에 대한 사모(思慕)와 존경심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죽림은 작품을 하면서 막힐 때마다 일중선생을 생각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분에게도 모르는 것을 여쭈어볼만큼 일중은 그의 영원한 스승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승의 글씨에서 탈피하려고 부단히 몸무림쳤다.
불리(不離 : 떨어지지 않음)와 리(離 : 떨어짐)의 학서적 태도는 스승과의 관계 뿐아니라
법첩을 공부하는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기질(氣質)이 반영된 배움"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했던가!
죽림은 동료와 선후배들로부터 인간애(人間愛)가 남다르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늘 낮은 곳에 있었다.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이러한 따뜻한 마음은 죽림의 작품을 형성하는 에너지원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참으로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도 전시장을 나오면서 걱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렇게 고급의 선질을 한 우수한 서예작품이 한문을 모르는 세대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 ....
서예는 문자의 전달기능을 간과할 수 없다.
누구든 조형의 감상에 머물지 않고 읽으려고 하는 마음이 작용한다.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월전미술관에서 훌륭한 작품을 선보인 죽림 뿐 만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모든 서예인들이 다 함께 고민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첫댓글 저는 전시장을 돌아볼때마다 가슴속희열로 상기되는 나를 봅니다...감사하는마음으로 잘읽었습니다 신묘년새해에도 늘 건안히 좋은글 올려주시며 행복하세요 교수님...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좋은 글씨 구경 잘 했습니다. 올 한해도 교수님 건강하시고 가정에 행복이 깃들길 바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한 마음으로 잘 보았습니다. 멋진(?...! ^^) 서예문화에 언제나 접근할 수 있을 렸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복학후 대학4학년때(81년?) 일중묵연에서 죽림선생을 처음 보았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고 하루종일 묵연에서 글씨를 썼습니다. 그 당시도 아주 달필이었습니다. 마치 농부가 밭을 갈듯이 그분의 글씨는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그후로 30년간의 결실이 이번 월전미술관에서 성황리에 발표된 것을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글씨를 잘쓰는 사람은 많아도 자신의 정기를 담은 自家體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서예사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新意에 바탕하여 죽림 특유의 작품세계를 이룬 데 대해 다시 한번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작품과 좋은 말씀에 감사합을 전합니다 ㄳ
죽림선생의 예서를 보면, 일중선생과는 다른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고 느껴집니다. 청출어람...바로 죽림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갈길이 많이 남았지만 늘 선변하려는 그의 예술역정을 보면서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이곳에서 우리 교수님 작품을 감상하게 될줄 몰랐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