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는 君壽(군수) 號는 月坡(월파)이며 명종19년(1564년)2월24일 옥과면 합강리에서 忠州判官(충주판관)과 淳昌郡守(순창군수)를 역임하신 景顔(경안)과 어머님 남원윤씨 사이에 태어남. 어려서부터 孝誠(효성)이 극진하여 6세때(1569년) 부모님에 대한 효행시를 지어 올릴 정도로 영특하여 선조12년(1578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22년(1589년) 문과에 급제 成均館 學諭(성균관 학유)로 제수되어 종사하던 중 부모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시묘살이를 하던 중 곧 선조의 부름을 받고 선조25년 임진 (1592년)에 29세로 홍문관 博士(박사)에 제수되었다.
홍문관 박사에 제수되어 남쪽의 왜구가 걱정되니 국방강화를 해야한다는 취지의 상소문을 임금께 친히 올렸으나, 반대 세력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각지에 격문을 보내 임전을 독려한 후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6,000명의 의병을 모집한다.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靑溪 梁大樸 將軍(청계 양대박 장군)과 담양 추성관에서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대장에 제봉 고경명(中壇에 黃旗) 부대장 우부장 청계 양대박(東壇에 靑旗), 좌부장 월파 류팽노(南壇 紅旗)라 써서 혈맹을 맺으시고, 속내의에 함자를 기록하여 전사하면 찾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셨다.
전국최대 규모인 의병 6,000여명을 모집하였으며 적병이 금산과 운암으로 침입하여 양대박 장군은 임실 운암전투에서 왜군 大南飛(대남비)와 싸워 1,200여명을 섬멸하고 돌아가셨다(6월25일)
고경명 장군과 월파 장군은 금산(7월10일 전투)에서 일당백의 용기로 싸웠으나 (왜적10만명)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고경명 대장의 안위를 옆에 있던 김충남에게 물으니 아직 진중에서 못나오셨다 하여 단기에 적진에 뛰어 들어가려 하니, 충남이, 가면 죽습니다(만류)하며 말고삐를 잡고 놓아 주지 않아 단칼에 팔을 치고 구하러 들어가 적진에서 대장을 구하기 위해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류팽노 장군은 적칼에 머리가 땅에 떨어지고 烏驪馬(오려마)는 주인의 머리를 물고 옥과면 합강리 생가에 달려왔다. 장군의 말은 마구간에 들어가 9일간 여물을 먹지 않은채 계속 울다 죽었으니 향리 사람들은 그를 의마라 하였다.
월파 류팽노 장군 부인 원주김씨는 전투에서 꼭 이기고 돌아오시기를 빌며 후원에 단을 쌓아놓고 날마다 눈물로 무사함을 빌었으나, 말의 울음소리에 나와보니 남편의 머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부인이 치마에 받아드니 부릅뜨고 있던 눈이 감기시니라,
전북 남원군 대강면 직동 부모님 묘전에 장례를 모시고 말은 쓰러져 신음하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으니, 지금의 내동 마을앞 말무덤에 묻고 자결하여 돌아가시니 대한민국 어느 곳에 이런 忠臣(충신) 烈婦 (열부) 忠馬(충마)가 있으랴,
장군과 그의 부인 원주김씨의 烈行을 기리기 위해 인조3년(1625년)에 친히 삼강문을 내려 정려각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旌閭閣(정려각)을 三綱閭(삼강려)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호남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고경명, 양대박과 함께 호남의 삼창의(三倡義)로 불리고 있으며 호남 연합의병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장군은 금산전투에서 비록 패하였지만 전주를 공격해오는 적의 예봉을 둔화시켰으며 의병의 잔여부대가 권율장군의 관군에 편입되어 왜적을 물리치고 몰아내는데 참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곡성군에서는 강따라 호국역사 조성사업으로 이곳 월파 유팽로 장군 정려각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지역이 충신.열부.충마의 고장, 의절의 고장임을 되새겨 보고 충효의 교육의 도장으로 널리 알리고자 함.
소송 정재건 순국열사
小松 鄭在建 殉國烈士
소송 정재건 선생은 1843년(헌종 9년) 5월 20일생으로 곡성군 입면 약천리에서 출생 송강 선생의 8세손이며 1888년(고종 25년) 문과에 급제하였음
1892년 선략장군 용양위부사과가 되고 동년 9월에 통훈대부 성균관을 거쳐 1893년 사헌부 지평을 지냄
1894년(고종31) 시국이 혼란해지자 비리가 횡행함을 통탄하고 수차에 걸쳐 상소와 직언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두문불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1905년 보호조약이 성약되자 북향사배하며 대성통곡 비분함을 금치못하며
1907년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의거를 듣고 유생과 조카들을 보내 돕게하였다
1910년 7월 한일합방이 되니 장부가 늙다하여 어찌 할 일이 없겠느냐 라는 말을 남기고 9월 4일 중시에 순국의 자결을 하였다.
유품으로는 교지, 관복, 입절단도, 유서, 유고 등이 있음
묘소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 설옥리에 있음
오봉사와 충열문
梧峰祠와 忠烈門
* 오봉사 : 난계 박연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
* 충열문 : 충신 박언배 부인 완산이씨의 충과 열을 기린 정려
박언배 선생은 박연의 5세손으로 입면 삼오리 출신
** 오봉사
- 단종복위가 실패하자 세조의 눈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함
- 1454년(백의낙향) 박래춘, 박윤하, 박준호가 박연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 1959년 중건하였음
- 박연 선생은 1378년(고려우왕4년) ∼ 1458년(세조4년) 조선초의 음악가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악성의 한사람
현재 춘.추제를 유림들이 지내고 여기에는 박연의 존형이 봉안됨
** 충열문
- 조선 인조5년(1627년) 정묘호란때 의병을 일으켜 황주,안주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박언배와 그의 부인 완산이씨의 충과 열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려
- 박언배는 1626년 무과에 급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부사이던 사계 김장생이 의병을 모집하자 수백명의
의병과 함께 김장생의 의병군에 합세하여 황주의 싸움에서 전공을 크게 세웠다
인조 10년(1632년) 안주 싸움에서 명나라 장수 모승록의 막하에 들어가 유흥치를
토벌하다 순절, 그의 나이 29세였음
그의 시신을 초혼반장하는 날에 부인 완산이씨 또한 2세의 아이를 시숙에게 부탁
하고 자결하였음
(지아비가 이미 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어찌 지아비를 위해 죽지 않을 것인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장부가 마땅히 해야 한다. 살았을 때는
한집에서 살고 죽어서는 같은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내가 바라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김
- 이같은 충절이 바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순조 5년(1805년)에 조정이 인정하고
동몽교관 겸 선무원 종삼등공신을 내려 정려를 세우고 충열문이란 글자를
임금이 친히 내렸다.
함허정(涵虛亭)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소재지 :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군촌
이 건물은 조선중기에 광양 장성등 여러 고을의 훈도를 지낸바 있는 당대의 문사 제호정(霽湖亭) 심광형(沈光亨)선생이 만년에 학문을 닦고 이 지역 유림과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중종(中宗) 38년(1543)에 건립한 정자인데 제호정의 증손인 귀암공(龜巖公) 심민각 선생이 산(山) 정상에 있었던 정자를 현 위치에 옮겼고 그후 여러 차례의 중수(重修)로 보존되어 왔음.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홋처마 팔작 지붕의 간결한 구조로 삼면이 트인 마루 1칸 방 2칸반 그리고 바닥을 한 단 높힌 쪽마루 반칸으로 구성됨.
건물 아래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주위에 450여년이나 되는 수목이 울창하고 멀리 무등산(서석산)이 백리광야에 우뚝 솟은 명승지로 자리잡고 있다.
30m 절벽 아래 황소만한 암석은 거북이 형상으로 강물 위에 노출되어 낚시를 할 수 있다하여 귀암조대라 하고 또 조대 곁에 바위돌에는 용(龍)자가 거꾸로 새겨져 있으므로 용암(龍巖)이라 부르며 과거 옥과 현감이 부임하면 반드시 봄철에 이 정자에서 향음례(鄕飮禮)를 베풀었다고 한다.
9대 홍교진사 두영(斗永)선생이 지은 다음 원운을 명필 이삼만(李三晩)의 글씨로 현판 하였다.
들은 넓으며 하늘은 개고 고목은 시름한듯 한데
우리집 구대조 정자가 여기 모였네
구비친 장강에 용바위 솟았고
툭 트인 서쪽에는 서석산이 떠있구나
낚시하는 늙은 이 멀리 술 가져오라 소리치고
농부는 손님맞아 배에 태워 돌아오네
만약 이 번같이 천 번을 손질한다면
흐르는 물 높은 산과 만년을 함께 하리라!
군지촌정사( 池村精舍)
----------君자는 삼수변을 넣은 토할 군자이니 새겨 읽으세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55호
소재지 :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군촌
이 건물은 해주목사(海州牧使)와 병조참판을 지낸 심안지(沈安智)선생의 손자인 심광형 선생이 조선 중종 30년(1535)에 지은 가옥인데 당호를 군지촌정사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윤리관에 따른 남녀유별 상하귀천의 신분계급이 있어 주택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성들은 안채 남성은 사랑채 하인들은 행랑채에 거처 하였으므로 재력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낮은 담에 마당을 갖춘 여러 건물을 한집안에 배치하였다. 이 건물도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된 기와집인데 조선중기 사대부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을 지녔다.
몸채는 전면4칸 측면2칸의 기와집인데 뜰방돌을 쌓을 때 처마 물받이 돌을 놓아 뜰방 아래의 토사 유실을 막았으며 연돌을 세우지 않고 연기를 수평으로 빼어내 연기로 건물의 방충 방습 작용을 하게 하는등 현대 과학으로도 시공키 어려운 건축 기교를 부렸으며 몸채와 사랑채는 대표적인 고건축 양식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 되었다.
사대부 집에 들어가려면 대문밖 멀리서 하마석이 놓여 있고 김완(金完)장군이 장가와서 무릎위로 들어올렸다는 1톤 무게의 삼각 바위가 사랑채 토방에 놓여 있다.
주위 경관을 살펴보면 백리밖 서석산(무등산)과 30리밖 설산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동악산 북쪽 천마봉에서 한줄기 산맥이 서쪽으로 내려온 끝에 수목이 울창하니 여기에 함허정이 나래를 폈고 섬진강 물줄기는 서출 동귀하여 구비치고 있으니 이 어찌 승경(勝景)이 아니겠는가?
살뿌리 어전 = 도깨비살
위치 :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섬진강변(일명 살뿌리)
섬진강의 어전은 살뿌리어전(입면 제월리) 두계어전(고달면 고달리) 고뱅이 어전(순창군 유등면 외이리) 3개소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설치 년도는 임진왜란 10년전 1580년대 청계 양대박 장군(청계동사) 의병 양성시로 추정됨.
어전은 흐르는 물을 막아 보를 쌓으면 물살을 튀어오르고자 하는 은어같은 물고기들이 물살에 밀려 발이나 멍석 위로 떨어지는 것을 이용하여 고기를 잡는 방식을 말함.
현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곳은 입면 제월리에 있는 살뿌리 어전 뿐이다.(일명 도깨비살)
도깨비살은 어느 시기에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문헌상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며 시대에 따라 향민들이 그때 그때 유지 관리하여 왔을 것으로 추측되며 대홍수가 수없이 지나갔지만 돌로 막아 설치를 해둔 보가 그대로 유지되어 있어 마을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도깨비가 쌓은 것으로 믿고 어전 이름을 도깨비 살이라 불러 오고 있음
"살" 자료를 보면
- 마천목(1358-1431 석곡) 장군 : 고달면 고달리 두계어전 도깨비살의 전설
- 은어가 궁중에 진상하는 품목이니 이를 잡고 운반하는 자들에게 면세,
면역 조치하라는 내용의 조정에서 곡성현에 내린 19세기 문건
- 청계선생이 "살"을 쌓을 때 구렁이의 설화를 참고로 삼았다. 청계동사
- 율사곡 상류쪽 200m지점 (현 살뿌리)에 "살"이 있다. 청계동사
위와 같은 자료로 보아 살을 이용한 고기잡이는 고려말, 조선초부터
이어져 내려왔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제월리에 있는 살뿌리 어전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현존 보전되고 있는
최후의 "살"로 길이 보전됨은 물론 학생들의 체험 학습장으로 활용
양대박 장군과 청계동(梁大撲 將軍과 靑溪洞)
양대박 장군은 조선조 중종38년(1543년) 전북 남원군 주생면 상동 伊彦(이언)에서 태어나 字(자)는 士眞(사진)이요 號(호)는 靑溪(청계)인데 牛溪 成渾(우계 성혼)에게 師事(사사)하여 도학의 연원을 터득 문장이 뛰어나 일찍부터 그의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九世忠孝(구세충효) 八世文章(팔세문장)의 집안에서 태어난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십 년전(1582년) 청계동에 靑溪鄭舍(청계정사) 내외사와 보호정(동정2, 서정2, 남정, 북정3)를 짓고 당시 朴思庵(박사암) 鄭松江(정송강) 諸賢(제현) 등과도 교분이 두텁게 지내며 닥쳐올 국난을 예견하고 미리 계책을 세웠다.
1592년(50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전부 기울여 의병 4,000명을 모집 총, 칼, 투구와 갑옷 등을 이곳에서 만들고 노적봉에 마람을 둘러놓고 백회 수백 포를 준비하여 섬진강에 풀어 곡성지역에 대군이 주둔하여 있는 것같이 위장전술을 폈고 제봉 고경명 장군과 이종제인 월파 류팽노 장군 등과 담양 추성관에서 혈맹을 맺고 돌아와 임진 6월 25일 아들 형우와 함께 임실 운암전투에서 일본군 수괴 대남비의 왜병 만여명과 싸워 1,200여명에 달하는 왜군을 섬멸하고 전사하셨다.
이 전투가 의병 호남(삼남)에서는 첫 전투였다.
그후 대제학과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리고 시호를 忠壯公(충장공)이라 하였으며 이언 고을에 旌閭門(정려문)를 세워 그 이름을 父子忠義之門(부자충의지문)이라 이름하였다.
남원 이언 용장서원과 충열사 만인의총에 모셔져 배향하고 있다.
유물로는 만인의총 유물관에 戰鼓(전고)와 親筆檄書(친필격서) 창의격문 파왜첩서가 소장되어 있으며 남원시 화정동 한우물 교룡산하(교룡산성이 있는데 김개남 동학군이 주둔한 적이 있음)에 묘소가 있고 제각에 대사마실기 목판본이 있음.
양대박 장군의 휼륭하신 애국충정에 감동하여 이고장 문사님들께서 큰바위에 靑溪 梁先生 휴허라 새겨 여섯분의 호와 이름을 새겨놓고 그 밑바위에 청계동문이라 대자로 음각하여 그 옆에 여덟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도로확장공사로 인하여 부득이 매립되어 있음
우리 전라도쪽에서는 임진왜란 후에도 우리 강토를 강전하였던 일본의 만행에 다시는 부끄럽고 치욕적인 과거를 남겨서는 아니 되겠기에 이고장 청소년들의 교육의 도장으로 남김
호남이 없이는 조선이 없다는 말은 허언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좋은 자료군요. 호남인-곡성인이 가져야할 자부심이란 국가와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몸을 사리지 않고 의병을 조직하는 리더쉽이 있는 인재들이 처처에서 준비된 사람으로 리더로서의 자질을 도야하는 풍토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댓글 나중에 사진도 찍어다가 올릴께요!
와우~~ 많은 공부했음니다 감사함니다^^
어렸을때.... 모두 소풍 갔던 곳인데... 그때 공부좀 해둘껄 그랬습니다.. 감사합니다.
여태 몰랐던 입면의 역사...잘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동악산과 현대사는 안 알려진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매평이고 큰집이 흑석인데 우리 아버님세대에 산타신분들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혹 그런 역사를 알고 계시면 역시 올려 주시면 감하겠습니다.
호남이 없이는 조선이 없다는 말은 허언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좋은 자료군요. 호남인-곡성인이 가져야할 자부심이란 국가와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몸을 사리지 않고 의병을 조직하는 리더쉽이 있는 인재들이 처처에서 준비된 사람으로 리더로서의 자질을 도야하는 풍토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