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의 아버지!
김인희
올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가장 높은 기온, 가장 긴 열대야 등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젖게 하는 태양의 뜨거운 입김을 감내하면서 선선한 가을을 고대하고 있었다. 더위가 물러갈 때쯤이면 마지막 몸부림인 양 태풍을 불러들이곤 했다. 태풍 9호 종다리는 농작물을 휩쓸고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는 하늘이 도와야 하는 천수답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농부였다. 청양군 남양면 첩첩산중의 마을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땅을 일구고 살았다. 아버지는 둘째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께서 군(軍)에서 얻어온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큰집을 오가며 두 집안을 건사하였다.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할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댁 안방에는 할아버지 궤연을 모셨고 작은 방에는 큰아버지 궤연을 모셨다. 큰댁에는 할머니와 큰어머니와 조카 넷이었다. 아버지에게 딸린 가족은 어머니와 올망졸망 육 남매였다. 아버지의 고단한 일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전답은 천수답이었다. 매년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씨를 뿌릴 수 있었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내기를 할 수 없었다. 어느 해 모내기 철에 아버지의 다랑논이 거북이 등딱지처럼 쩍쩍 갈라졌다. 냇가에 있는 남들 논은 물을 대어 모내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황토 먼지가 폴폴 날리는 논바닥에서 한숨을 쉬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딸의 고사리손을 잡고 힘찬 목소리로 올해도 풍년이 될 거라고, 아무 걱정 없다고 말했다. 가을에 수확을 끝내면 아버지는 해마다 풍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매번 큰집 일이 우선이었다. 봄에 소에 쟁기를 지우고 산비탈 밭을 갈 때도 큰집 밭부터 갈았다. 아버지 논의 모내기는 큰집 모내기가 끝난 후였다. 가을에 나락을 걷어 들일 때도 큰집이 우선이었다. 가을 추수를 마치고 볕에 벼를 말릴 때 후드득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큰댁 마당으로 달려갔고 아버지 벼는 어머니와 올망졸망 고사리손이 담아 들였다. 그때마다 듣는 어머니의 푸념 아리랑은 덤이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큰집 가족은 할머니의 궤연을 모셔둔 채 대처로 떠났다. 그때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두 집 살이 했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궤연을 모셔둔 큰댁에서 주무셨다. 그때도 아버지는 가뭄에 먼지가 날리던 논에서 풍년을 기약하신 것처럼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허허 웃음소리는 모든 걱정을 싹 날려버리는 특효약이었다. 아버지는 웅장한 산이었고 수호신이었다.
아버지는 육 남매가 차례로 성가하고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남매를 두었을 때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아무것도 부럽지 않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의 행복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 가을 무서리 내린 어느 날 어머니께서 쓰러진 후 일주일 만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어머니를 잃고 딸은 마음껏 울 수 없었다. 태산이었던 아버지께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수호신이었던 아버지께서 비틀비틀 중심을 잃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일이 닥치거나 깜짝 놀랐을 때 ‘엄마’라는 외마디를 뱉는다. 그러나 딸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 ‘아버지’라고 외친다. 딸의 잠재의식에는 아버지, 오직 아버지뿐이었다.
딸은 날마다 아버지께 전화하고 주말마다 아버지께 달려갔다. 시간이 시나브로 흐르던 어느 날 딸은 아버지 집에서 현관에 놓여있는 지팡이를 발견했다. 그날 딸은 주방에서 설거지하면서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넘어지더라.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지팡이를 장만했구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등 뒤로 들으면서 소리 없이 엉엉 울었다. 백발이 된 아버지께서 지팡이를 짚고 동구 밖에 서 있는 모습이 눈물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전화하는 일이 드물었다. 언젠가 아버지께 전화했다가 불통이었을 울고불고 걱정했던 딸 때문에 멀리 출타할 때 “아비가 이만저만해서 거시기 다녀올 테니 전화 안 되더라고 걱정하지 마라.”라고 당부할 때 외에는 좀처럼 전화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께서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우리 동네에도 버스가 들어온단다. 그러니 아비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거라. 읍내 다녀올 일도 걱정 없단다. 집 앞에서 버스 타고 갔다가 집 앞에서 내리면 된단다.”라고 말했다. 딸은 기쁜 소식들 듣고 확인하고 싶어서 주말에 아버지께 갔다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버지의 문전옥답(門前沃畓)이 뚝 잘려 버스 길이 되었고 아예 논 하나는 버스정류장으로 변해 있었다.
아버지는 딸을 토닥토닥 달래면서 “아버지 걱정은 하지 마라. 평생 마을의 은덕으로 살았느니라. 마을 길을 넓히고 버스를 돌릴 수 있는 정류장이 있으면 버스가 들어온다고 하더라. 마을에 좋은 일 하고 싶었다. 너희들 앞길 잘되라고 적덕(積德)했느니라. 그러니 너희들은 의좋게 지내거라. 이다음에 아비가 떠난 후 산소에 와서 울지 마라. 너희들 추억을 꺼내고 즐겁게 얘기하다가 가거라. 아비하고 어미는 너희들 잘 지내면 되느니라. 애들 잘 키우면 효도하는 거란다. 진이와 택이 잘 키우거라.”라고 하셨다.
그 이듬해 아버지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화재의 원인은 누전으로 판명되었다. 백발의 팔순 아버지는 금방이라고 부스러질 삭정이와 다르지 않았다. 딸은 팔을 걷어 올리고 아버지 집을 짓기로 했다. 딸의 위로 오빠와 언니들은 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할 수 없었다. 딸은 천수답으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전부를 끌어안고 감내하고자 했다. 오로지 아버지만 무사하기를 바랐고 아버지만 힘낼 수 있다면 태산이라도 짊어지겠다고 했다.
아버지 집을 짓는 동안 마을 회관에서 지내는 아버지를 위해 하루가 멀게 달려 다녔다. 아버지께 드릴 음식을 장만해서 갔다가 아버지 옷에 흙이라도 묻었으면 바로 세탁했다. 아버지께 만의 일이라도 자존심 상할까 우려하면서 예전보다 더 살펴드렸다. 그때 부여에서 청양을 오가는 나령리 고갯길을 울면서 다녔다. 그때 얼마나 힘들었던지 딸의 정수리에서 한 움큼 머리카락이 빠지더니 휑하게 탈모 증상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딸의 사춘기 남매가 딸의 가슴에 파고들면서 엉엉 울었고 딸도 목 놓아 울었다.
딸의 아버지는 새집에서 오래 살지 못하셨다. 같은 계절을 두 번씩 보내고 산비탈에서 연분홍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릴 즈음 동화처럼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딸은 평생 반듯하게 살았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자부한다. 딸은 아버지를 본받아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며 살고 싶어 전율하고 있다.
딸은 자녀들 잘 키우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자녀들을 국가와 사회의 인재로 키워냈다. 딸의 아름다운 딸은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영어 교사로서 사랑을 베풀고 있고 딸의 아들은 해군 장교로서 국가를 지키고 있다.
딸은 해군 장교 아들이 문무를 겸비한 성웅 이순신의 뒤를 잇는 제독이 되기를 바라면서 효가문에서 충신 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딸이 목 놓아 사부곡을 부르면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