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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에 개봉된 영화 “증인”은, 따뜻하고 감동적인 스토리여서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집중하며 소통이 서툴렀던 “지우”가 사건의 증인이 되어 세상과 소통하려는 용기를 갖게 되는 모습은 큰 진폭의 울림을 전했습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요?”라는 “순호”를 향한 “지우”의 질문에서, 영화 “증인”은 마음을 여는 것보다 닫는 것에 더 익숙해져 버린 현대인에게, 타인의 거울에 비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증인”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소송 당사자는 아니지만, 법원이나 법관의 신문에 대하여 자기가 듣고 본 사실을 진술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곧, 증인은 사람 그 자체가 증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아닌 사람도 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될 수 있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거나,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사건의 피해자가 아니지만 증인으로 법정에 소환되기도 합니다. 사건의 중요한 서류를 다뤘던 사람이나, 사건의 중요한 장면을 신고하거나 신고를 받았던 사람도 모두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성도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누구에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만나서 알고 있다고 해서 다 증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증인으로서 감내해야 할 고난들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사 43: 10을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내가 더 중요한 삶을 살면서 기도한다면,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명은,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온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온 세상이 예수님을 알게 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는 부활을 믿을 수도 없고, 말씀대로 살지도 못합니다. 성도된 우리의 삶이, 내 생각을 말하고 싶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나누는 삶, 예수님을 드러내는 증인으로서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라고 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모여야 합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그 영광이 재현되기를 간절히 바랬기에, 이제 십자가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죽음도 이기셨으니까 이제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껏, 고통을 겪으며 메시아를 갈망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셨고, 죽음에서 승리하고 부활까지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독립과 회복을 통하여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아가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자신들이 권력의 중심에 앉게 될 것이라는 욕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면, “그들이 모였을 때에”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모이다”란 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이 교회의 시작과 급속한 확장이라는 초대 교회의 역동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에서, 헬라어 성경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그에게 계속하여 물었다”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본문 앞의 4 - 5절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을 정치적 메시야 왕국의 도래가 임박하였음을 예언한 것으로 오해하여, 흥분된 마음으로 거듭 반복하여 질문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열심히 모였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목적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달랐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명자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했습니다. 곧, 자신들이 가졌던 욕심과 욕망의 생각을 버리고, 진정,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명자의 모습으로 변했고, 세상을 향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성도인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 수 없어도, 계속해서 하나님 앞으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그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간증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상 앞에서 복을 비는 비 기독교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히 10: 25을 보시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하며, 행 2: 46을 보시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하며, 마 18: 20을 보시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힘써서 모임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분명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은, 주인과 종의 관계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 앞에서 침묵으로 묵묵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간절한 물음에 대해, 예수님이 본문에서 하신 대답은, 참으로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제자들의 물음을 묵인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현실의 절박함이 해결된다면, 하나님을 더 잘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지 않고, 본문과 같이 대답하신 겁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은 종말의 때가 언제인가가 아니고, 종말의 때를 어떻게 준비하느냐는 것임을 알려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시기”를 묵묵히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오직 아버지의 주권적인 섭리에 있으므로, 너희가 알 바 아니라고 하신 겁니다. 여러분, 주님의 재림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종말 섭리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오직 종말의 때와 시기에만 신앙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지닌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종말 섭리에 늘 관심을 가지되 자기가 오늘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신학자 “벵겔”은, “종말의 때는 멀지만 가깝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그 시간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상관할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오늘도 근면으로 주님을 섬길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의 때와 시기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시기”를 묵묵히 기다리며,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때”와 “시기”는 하나님의 영역이고, 사명에 대한 순종과 충성은 우리의 영역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영역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세상의 종말 시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시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믿음, 선교, 기도, 봉사, 충성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에 충성하심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하게 주목할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전에 성령이 임하셔서 권능을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역으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복음은 우리의 말과 재주로는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주체로 세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들이 증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무임승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유를 누리는 삶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과 땀, 값비싼 대가가 있었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체가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시작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증인”이 무엇입니까? 증인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을 가리켜 증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재판정에서 증인을 세우고 재판할 때, 증인으로 나온 사람이 “내 생각에는, 내가 느끼기에는”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재판정에서 증인이 할 말은,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증인은, 어떠한 진리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사실성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증인은 반드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된 우리 역시, 경험적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해서,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사도된 것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첫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하고, 둘째는, 갈 6: 17에서는,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학식과 혈통을 앞세워 사도되었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던 것처럼, 이제 제자들도 그와 똑같이 기름 부음을 받아 사역을 수행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승천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내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사역과 가르침을 모두 결집한 명령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속의 제자들과 성도된 우리에게 주신 절대 의무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권능을 받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향기가 나타나며, 나아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언제나 모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