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약수(湛若水, 1466-1560) 묘소와 명대 수정 주자학의 일물론(一物論)
2024년 11월 16일
2024년 6월 29일에는 광동성 증성구(增城區)에 있는 담약수(湛若水, 1466-1560) 묘소에 찾아가서 자연환경을 둘러보고 묘소에 참배하였습니다. 주변은 새로 개발하여 높은 아파트 단지가 묘소를 둘러싸았습니다. 얕은 산에 龍眼肉 과일나무밭으로 큰길에서 몇십 미터를 들어가면 묘소가 있습니다. 사암을 깎은 벽돌을 쌓아 묘소를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진헌장 묘소보다 훨씬 크고 잘 꾸며놓았습니다.
진헌장의 학생 가운데 담약수를 진헌장의 학생이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말하고 있으나 사실과 다릅니다. 다시 말해 담약수는 진헌장에게 잠깐 배우고 이정(二程)이 강조하였던 체인천리(體認天理)를 이해하였다고 진헌장에게 보고하고 진헌장의 승인을 받았고 이것을 근거로 진헌장의 추천서를 받아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담약수를 진헌장의 학생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담약수는 분명히 과거시험에 떨어진 뒤에 남경 국자감에서 좨주 장무(章懋, 號楓山, 1436-1521)과 사업 나흠순(羅欽順, 1465-1547)에게서 정주학을 배워서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사승관계와 과거시험의 보증인 관계를 보면 장무와 나흠순의 학생입니다. 따라서 담약수는 당시에 남경 국자감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정 주자학자들 여우(余祐), 위교(魏校), 하상박(夏尙朴), 소예(邵銳), 왕도(王道) 등과 어울렸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담약수는 사실상 수정 주자학자에 귀속시켜야 합니다.
물론 당시 수정 주자학자들의 학술 주장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호거인의 사위 여우가 지은 성론(性論)을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여 현재는 그의 「성서(性書)」 문헌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정 주자학자 가운데 왕준(汪俊, 1468-1529)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왕준은 왕양명을 직접 만나 학술을 토론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흠순과도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왕준은 정주학이 무엇이든지 둘로 나누기에 지리(支離)하다고 비난받아온 이분론(二分論)을 수정하여 일물(一物)을 주장하였고 다른 내용은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습니다. 일물론이 수정 주자학의 핵심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왕양명의 유식무경(唯識無境) 관점에서 보면 수정 주자학자의 일물론이 정주학의 지리하다는 이분론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하곡학연구원, 2021년 1월 8일, 수정 주자학자 汪俊의 性學 및 無未發과 動察공부) 일물론은 조선 성리학계에서도 주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학술 주장은 당시 학계 또는 명말시기 학계에서도 주목하지 않았고 명말에 사승관계에 따라 위교--허부원--유종주 등 일부 관원들이 따랐을 뿐입니다. 다만 조선 학계에서는 나흠순과 위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명유학안에 기록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조선시기 이퇴계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성리학자들의 학술적 위상입니다. 이들은 사실상 조광조 도학운동 이후에 일어난 수정 주자학자에 속합니다. 이들은 나흠순 서적을 보고 비판하거나 긍정하였다는 것에서도 잘 보입니다. 나흠순과 위교 모두 수정 주자학자에 속합니다. 퇴계 선생을 비롯한 조선 수정 주자학자들은 명나라 수정 주자학자에 호응하고 지지하였는데 양국의 수정 주자학자들이 서로 맞대응하여 지지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왕양명이 39살에 북경에서 대흥륭사에서 담약수, 황관 셋이 강학하던 시기에도 담약수는 사실상 장무와 나흠순의 수정 주자학 견해를 지켰고 또 진헌장의 견해도 알고 있었습니다. 왕양명과 담약수는 처음부터 서로 학술 주장과 수양공부방법이 달랐습니다. 담약수는 수양공부에서 일반 정주학자처럼 동찰(動察)을 주장하였고 왕양명에게 불교와 도교의 정좌공부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권고하였습니다. 황관도 왕양명이 세상을 떠난 뒤에 왕양명이 학생들에게 정좌를 가르치기 전에 육조단경과 오진편 후서를 읽으라고 강요한 것을 비난하였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담약수의 "마음을 크게 가져야 한다(心大)"는 주장입니다. 왕양명이 저주(滁州)에서 근무하는 동안(1513년 10월-1514년 5월)에 담약수가 찾아와서 유학의 수양공부를 놔두고 불교 또는 도교의 방식대로 설명하지 말라고 왕양명에게 권고하였습니다. 왕양명의 「答方叔賢(方獻夫)書」, 己卯, 1519, 실제로는 1520년) 서신을 보면 담약수가 육상산을 비판하면서 “마음을 크게 가져야 한다(心大)”고 주장하였다고 말합니다. 심대(心大)는 사실상 장무(章懋) 『풍산어록(楓山語録)』에 나오는 말입니다.(章懋,『楓山語録』︰“學者須是大其心,蓋心大則百物皆通,此須做格物窮理之功,心便會大。學者心又須小,正是文王小心翼翼一般,此須是做持敬涵養工夫,心便會小,不至狂妄矣。”“學者工夫須極要細密,越細密,越廣大,窮理須是‘精義入神’方好。格物窮理須是物物格、事事理會,講明停當,方接物應事得力。”) 왕양명 입장에서 보면 장무의 심대(心大) 또는 담약수의 심대성소(心大性小) 같은 주장은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튼지 담약수가 장무와 나흠순의 학생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나흠순이 왕양명에 관하여 상세하게 알고 있었던 배경에는 사실상 담약수가 왕양명에 관한 소식을 나흠순에게 전달하였다고 추측합니다.
물론 담약수가 나이 들어 관직을 사퇴하고 광동성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오히려 진헌장의 학생이라고 자처하고 진헌장 문인들을 자기 문하에 엮어넣고 흔들러보려는 야심도 가졌고 또 왕양명이 죽은 뒤에는 왕양명 문인들도 휘어잡아 자기 문하에 귀속시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야심 모두 물거품이 되었고 지금 보면 그냥 수정 주자학자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