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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리얼리즘적 양상과 그 특성(2)[시론]
방법적 원리와 시적 양상, 기법과 서술면에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2. 방법적 원리와 시적 양상
이 장에서 다룰 과제는 ‘시에서 리얼리즘의 성취에 기여하는 방법적 원리에 따른 시적 양상’이다. 리얼리즘시에는 리얼리티를 성취에 작용하는 미학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그러한 원리를 리얼리즘과 관련하여 탐색하는 것이 본 장의 내용이 될 것이다. 리얼리즘 성취에 기여하는 어떤 방법적 원리가 있다면 그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창의성이 발휘되고 예술적 성취 또한 이룩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 장은 리얼리즘시로 명명된 시작품 속에 구현된 창작 방법을 살핌으로써 리얼리즘의 시의 시적 특성을 살피게 될 것이다. 리얼리즘 시를 논의할 때, 시에 나타난 <리얼리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느냐 아니면 리얼리티를 획득하려는 시적 장치에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리얼리즘 논쟁의 향방은 크게 양분될 것이나, 이 장에서는 리얼리티의 문제와 시적 장치를 동시에 고려하고자 한다. 리얼리티 측면은 내용면과 작가의 정신면에서 고찰하고,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시적 장치는 기법적인 면과 서술면에서 고찰할 것이다.
가. 기법면과 서술면
리얼리즘이 사회 현상의 문학적 반영이라고 할 때, 문학의 모습은 몇 가지 기법적 양태를 띠게 된다.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상황은 서민들에게 억압적이고 비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얼리즘 시인의 시 창작 태도는 강한 저항의 모습을 띠게 될 것이고, 이 경우 리얼리즘시의 형태는 기법적으로 현장성을 리얼리티로 적용할 수 있다. 노동 현장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저당당한 채 생산의 수단으로만 취급당하며 기계처럼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성 회복에 기여하는 이런 시는 무엇보다도 체험에서 온 지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두 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끄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넣는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 박노해, <하늘> 부분 -
인용시는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적 풍자가 잘 드러나 있다. 노동 현장의 비인간적 모습을 고발하고 동시에 노동은 오히려 신성한 것이고 건전한 삶의 원천이라는 논리로 확대 인식시키기 위해서 리얼리즘 시를 창작할 때는 현장 체험적 기법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억압적 현실 상황의 인식적 반영에서 요구되는 또 다른 기법은 고도의 풍자를 들 수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해체시가 그 한 예다. 사실 세상이 완전히 타락한 것이라면 비극적 인간 그 자신에게나마 어떠한 진실이 가능하겠는가. 자신의 진실이 통하는 길로 시인은 풍자의 기법을 취하게 된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안에 온통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니 배꼽에 연결된 비닐끈들
저 굴뚝과 나는 간통한게 분명해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의 텅들을 하루 종일 뽑아 댄다.
- 최승호, <공장지대> 부분 -
인용시는 도시시의 한 현상인 산업 사회의 문명비판적 요소를 강하게 띠면서 비인간화를 고발하고 있다. 진창영은 이 생태주의적 도시시 현상은 해체시 이후 우리 시단의 한 대체물로 자리할 수 있으리라 보고 있다.이는 세태 반영과 풍자적 기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리얼리즘의 한 특성이지만, 해체의 방법적 정신은 곧 기존 질서의 부정 또는 자유 추구 정신이라는 모더니즘이기도 한다. 리얼리즘이란 용어가 단순히 기법상의 의미로 쓰인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즉 예술에 있어서 어떤 관찰된 디테일을 특히 정확하고 생생하게 그린 것을 지적하는 단어였다. 애초에는 이것이 어떤 특정한 수법을 다른 수법들과 구별하기에 충분할 만큼 정확한 용어로 간주되었다. 즉 이상화에 반대되는 테크닉으로서의 사실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시의 리얼리즘을 실현하는 데에는 여러 시적 요소들이 같이 작용한다. 즉 시적 화자, 시의 언어, 시적 상징이나 비유, 시의 운율 등이 시의 리얼리즘을 위해 동원된다. 이런 다양한 시적 기법이나 요건 중에서 서술 구조도 시의 리얼리즘을 실현하는 중요한 장치다. 일단 시를 작가의 소망을 충족하는 이야기, 그 중에서도 사회적 상징 행위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시인의 소망이나 욕망의 충족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 즉 현실 원칙의 검열을 받고 상징화된 이야기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사회적 상징 행위로서의 이야기에서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이야기의 현실반영, 곧 현실 표상이라는 리얼리티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에 가장 유용한 이야기로서 기본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경험적 사건을 작품화할 때, 사용하는 기본적인 틀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그런 작품의 기본 이야기를 비롯하여 그 밖의 중요한 서사들에서 작자 및 등장 인물의 욕망과 무의식 내지 작품의 메시지들을 찾아내고, 거기서 또 사회 구성의 성격을 조명해 낼 때, 작품의 의미를 한층 풍요하게 포괄적으로 해설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관점은 현실 재현 표상적 기능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리얼리즘적 관점에도 부합하게 된다.
특히 이야기나 사건을 전달하는 서술 구조는 리얼리즘 실현에 가장 널리 쓰이는 방식이다. 한 편의 이야기는 인물이나 상황의 전형을 창조하고, 이를 통하여 현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에 적합한 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시의 내용은 수용 과정에서 나름의 정서적 반응도 일으키게 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독자에게 읽히지 않으면 작가의 그 고상한 뜻은 전달될 수 없다. 시를 비롯한 모든 문학 작품은 독자를 만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서술 구조는 리얼리티 확보에 크게 기여한다 고 할 수 있다. 물론 심훈의 <그날이 오면>과 같은 서정시에서처럼, 직접적이고 강렬한 정서를 표현하여 현실에 대한 시인의 현실인식을 전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육사의 절정에서처럼 상징적 형상을 창조하여 일제 강점기의 암흑과 같은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 줄 수도 있다. 이런 시 역시 주관적이고 직접적인 기술이지만, 나름의 시적 성취를 이룩하고 있다. 그리고 당대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리얼리즘적인 시적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야기나 사건을 전달하는 서술시는 리얼리즘 실현에 가장 널리 쓰인 방식 중의 하나다. 한 편의 이야기는 인물이나 상황의 전형을 창조하고, 이를 통하여 현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에 적합한 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시의 내용은 수용과정에서 나름대로 정서적 반응도 일으킨다. 즉 전형과 현실반영이 이루어진 문학 작품은 주로 독자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내포적 총체성 실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술시의 미학적 장점은 산문소설에 등가되는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여탁은 서술시를 통하여 리얼리즘이 성취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서술적인 구조를 통하여 형상화되고 있는 시의 서술구조를 이루는 이야기나 사건이라는 시적 소재가 어떻게 현실을 반영하여 리얼리즘적 성취를 이루는지 살펴보자.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싯푸른 사과들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어릴 적 우리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닐는지 몰라
천자문을 더듬거린다고
아버지에게 야단 맞은 날은
내 손목을 가만히 쥐고 쇠죽솥 가로 가
천자보다 좋은 숯불에 참새를 구워 주며
멀뚱멀뚱 착한 눈을 들어
소처럼 손등으로 웃던 소년
못줄을 잘 못잡았다고
보리밭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왔다고
남의 집 제사밥에 단자를 갔다고
사랑이 시끄럽게 꾸중을 들은 시적 아침에도
말없이 낫을 갈고 풀숲을 헤쳐
꼴망태 이에 가득 이슬 젖은 게들을 걷어와
슬그머니 정지문에 들이밀며 웃던 손
만벌매기가 끝나면
동네 일꾼들이 올린 새들이를 타고 앉아
상머슴 뒤에서 함박 웃던 큰 입
새경을 타면 고무신을 사 신고
읍내 장터로 서커스를 한판 보러 가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서울서 온 형이
사년 동안 모아둔 새경을 다 팔아갔다고 하며
그믐날 확독에서 떡을 치는 어깨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꾸려준 옷보리를 들고
주춤주춤 뒤돌아보며 보름을 쇠고
꼭 오겠다고 집을 떠난 후꾸도는
정이월이 가고 삼짇날이 가도 오지 않았다.
장사가 잘 되는지 몰라
- 이시영, <후꾸도> 전문 -
이 시는 이시영의 첫 시집인 <만월>(창작과 비평사, 1976)에 실린 서술시의 하나다. 비교적 긴 시인데, 앞뒤에 현재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중간 부분에 과거의 추억이 삽입되고 있다. 한편의 이야기가 서술되기보다는 사건이 제시되고 있다. 이 시에는 시적 화자가 골목길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좌판 사과 장사의 얼굴에서 어릴 적 친구의 모습을 되새기고 있다. 웬만큼 살았을 집안의 아이였던 화자의 눈에 비친 우리 근대사의 질곡이 잘 드러나 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집에서 화자의 집으로 와서 꼴머슴으로 살았던 친구의 삶이 어린 아이의 시점에서 진솔하게 묘사되고 있어, 시적 리얼리즘을 성취하면서 독자에게 쉽게 읽힌다.
비록 이 시가 후꾸도라는 인물을 통하여 농촌을 떠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민중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그치고 있지만 이 시는 나름의 진솔함을 전달하는 여러 장치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수미상관의 반복, 아련한 추억 속에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여러 기억들을 반복함으로써 한 인물의 형상과 그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울러 장년이 된 화자의 판단 유보적인 어법도 기법적 측면에서 리얼리즘의 성취를 위한 중요한 장치가 되고 있다. 이런 시적 어법이 이 시의 내용을 더욱 사실적으로 느끼게 하면서 근대화의 도정에서 우리 민중들의 삶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에 ‘언뜻 다가서려’는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리얼리즘이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서술시는 이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 결과로 독자에게 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어렵게 표현하기 경쟁을 하는 난해시가 독자들을 혼란시키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지닌다. 너무 쉽게 써서 읽을 가치가 없다는 일부의 우려는 리얼리즘시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대중성>이란 물론 정신적 자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주로 기법상의 문제다. 즉 <형식주의>의 난해성을 배격하고 대중적인 소박함과 전통적인 명료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어렵기만 한 '문학주의'의 난해시를 멀리하고 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시를 찾고 있다. 대중성의 요소로서 현대 독자를 어필하려는 노력은 리얼리즘을 성취하는 시적 모색의 한 방식인 것이다. 대중성이란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기 적당한 요소로서 난해한 요소보다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통하여 독자들의 시적 이해를 돕는 것이다. 대중성에 의한 시 창작은 기초적인 문학 지식으로도 시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그대로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최대의 장점이다.
1928년에 전개된 시의 대중화 논의에서 김기진은 프로시가의 대중화 방법으로서 소재를 사건적, 소설적인 데서 취할 것, 시어는 세련된 것을 피하고 소박하고 생경한 <된 그대로의 말>을 사용할 것, 노동자들의 낭독에 편한 리듬을 창조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또 이같은 시를 단편서사시로 명명하고 임화의 <우리 옵바와 화로>를 전형적인 작품으로 들었다.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의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냄새가 나지 않니-하시든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날마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곡을 미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우리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장 알았어요.
- 임화, <우리 옵바의 화로> 부분 -
시어의 장황한 구사에서 보듯 인용시는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차원에서는 미흡한 점이 있지만 리얼리즘의 성취면에서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제사공장에 다니다 쫓겨난 여공이고, 시적 주체는 그러한 배역을 소화해 내는 자이다. 시적 주체를 노동자 배역을 맡아 소화하는 자로 설정한 것은 노동자 아닌 카프 시인으로서 임화가 고심한 발로로 해석할 수 있다. 지식인이 직접 노동자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배역을 매개로 하는 것이 진실성의 확보에 더욱 유리하다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임화의 시는 긴 형식을 주로 하면서 서사구조를 적절히 가미하고 있다. 또한 노동현실이나 계급적 분노, 미래에의 기약 등을 주로 직절적인 어조로 설명한다. 그리고 심한 반복에 의한 리듬의 형성과 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이야기를 적절한 극화없이 털어놓는다.
김형원은 1920년대의 주된 흐름이었던 낭만시에서 비켜서서, 생활과 당대 현실의 수용을 주장하였다. 이는 문학이 언어유희를 벗어나 광범위한 독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평이한 일상 구어체로서의 서술시는 사실 대중적 성격을 띠게 마련이며, 대중시로서 매우 적합한 유형일 수 있다. 덜 세련된 듯한 단순성, 소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린애다운 유아성을 서술시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동요나 최근 부각된 랩 음악을 비롯한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서술체임은 서술시가 대중들의 취향에 어필한다는 증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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