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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골목의 가치를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알려주는 골목들은 대구에 있는 골목들이다.
달성
(2천년 세월 흔적 따라 토성 한 바퀴)
달성에 유명한 것은 공원이라고 하나 달성을 말 그대로 성이었다 그래서 달성공원만 가는 것 보다 적어도 토성을 가봐야 한다고 달성공원을 들어가 향토역사관을 따라가면 토성 산책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공원 담장 안쪽 기슭을 따라 걸으면 좀더 토성의 맛을 음미 할수있다고 한다. 토성 산책길에서 조금만 가면 ‘대구달성’ 이라는 입간판이 있는데 간판아래에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는데 거기서 출발을 하면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석축 일부를 찾아 볼수 있다 또 걷다 보면 거북바위의 돌과 같은 종류들을 볼수 있다
. 또 산책길에 매점도 있어 편하다. 달성공원은 달성서씨 집성촌,행정, 군사 중심지,대구신가를 거쳐 1970년의 대구의 처음인 동물원이 됬다. 그 동물원 위치가 어정쩡하다 그래서 달성공원이 아닌 토성을 복원하자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토성이 별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또 달성공원에는 여러가지 비가 있다. 그 비들은 이상화 시비, 이상룡 국구기념비, 허위 선생 순국 기념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 달성 서씨 유화비, 꽃사슴 기증 기념비 죽농 서동균 선생 예술비 그리고 석재 서병오 선생 예술비가 있다
경상감영
(도심한복판 시민의 ‘역사쉼터’)
대구 도심 한복판에 있는 공원이다. 경상감영은 대로변에서 좀 떨어져있고 또 젊은이들보다 나이가 분들의 공간이다. 경상감영공원은 400년 전 역사를 기념 하는데 비해, 다른 공원은 근현대사를 기념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경상감영은 1601년에 개영돼 1910년까지 310년간 관찰사 253명이 근무한 곳이다. 경상감영은 지금의 공원 부지뿐 아니라 공원 서쪽으로는 종로초등학교, 고원 동쪽으로는 무궁화백화점까지 포함한다. 현재 공원에 복원돼 있는 감영 건물은 건물은 선화당과 징청각이다. 감영에 대해 알아보면 공원 입구에 있는 비석은 절도사이하개하마 라고 쓰여진 비석이다. 뜻은 관찰사 직급보다 낮은 사람은 이 지점부터 말에서 내려 감영에 들어 와야 한다는 뜻이다. 그 비석에서 남쪽으로 30보쯤 되는 위치에 관풍루가 있다. 그곳이 감영에 정문이였다.
대구의 읍성이 열리며 관풍루는 달성공원 안으로 옮겨 졌다. 감영안으로 들어가면 선화당을 볼수있는데 선화당은 관찰사가 집무를 하던 곳이였다. 그곳에 우물천장과 용그림의 장식이있고 선화당은 선조13년 1607년에 창건이 되었는데 3차례의 화재로 소실돼 현재는 1807년에 재건한것이라 한다. 선화당 뒤편에 있는 건물을 징청각이다 경상감영 관찰사의 처소 였다.
. 또 징청각의 뒤편에 비석들이 세워 져있다고 한다. 이제 공원을 나오면 서쪽에 감영의 객사가 있다. 공원 동쪽에는 군사시설 공간인 중영이 있고 2006년부터 경상감영의 풍속을 재연하는 경상감영 풍속 재연행사가 있다 문화관광부 가 지원 하는 상설문화 관광프로그램인 이 재연 행사는 수문병 교대의식, 경점시보의식, 순라군 활동들으로 다채롭게 구성이 되는데 백미는 경상감사 순력행차다. 순력행차는 민정수시를 뜻한다. 감사행차는 저잣거리를 순찰하다 도둑을 잡으면 즉석에서 형틀을 설치해 곤장을 치고, 횡포를 부리는 취객을 만나면 군사들이 취객을 체포해 함차에 가두어감영으로 이송 한다
대구읍성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대구읍성은 현대화가 되어서 과거의 도시는 이름으로만 존재할뿐이다. 동성로,서성로,남성로, 북성로라는 도로명이 대구읍성의 존재를 뒷받침한다.
최초의 대구읍성은 토성이었다. 임진왜란 2년 전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만들어졌지만 불행히도 임진왜란때 파괴되었다 현재의 경상감염 주변을 감싸던 석성은 1736년 구축됐다.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에 옮겨진 영영축성비에 따르면 둘레 2.7킬로미터, 높이5미터, 벽두께 8미터의 축성에 연인원 7만 8584명이 동원 되었다고 한다. 읍성에 남문 영남제일관, 서문 달서문, 북문 공북문, 동문 진동문 4대문을 냈다. 남성로 약전골목. 남쪽 성벽이 헐리고 약재상들이 옮겨오면서 800미터 골목 양쪽에 한약방, 약업사, 한의원, 약찻집 등 상점이 들어 섰다. 약전골목 끝에서 서성네거리를 지나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 네거리까지 서성로 만경관 쪽으로 8차로를 지나면 깡통골목이다. 경상감영공원 길 어귀의 달서문 표지석 맞은편에 일제 강점기 지역 최대 문구점이었던
무영당이 있었다. 1킬로미터 되는 50년 전통의 북성로 기계공구상가. 북쪽에 경부선 철로가 나면서 일본일로 인해 성곽중 가장먼저 허물어 졌다. 또 공북문 표지석을 따라 골목에 들면 감영감옥 자리의 대구교회, 대안 성당등 종교 시설이 눈에 띈다. 동쪽으로 지하도를 건너면 동성로로 들어서게된다. “없는 게 없다”는 소리를 들은 교동 시장은 1990년대 쇠락의 길을 걷다 다행이도 컴퓨터 상관과 교동주얼리 특구로 괜찮아지고 있다. 또 여러 가지 별미가 있는 먹자골목을 지나면 대구백화점에서 중앙치안센터로 가는 깅의 동소문 표지석이 여정의 종착점이다
종로
(화교와 기생들의 거리)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종루가 있던 거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종로이다. 역사적으로 종로의 주인공은 화교와 기생이었다.
화교는 어디에서나 상업에 종사를 하여 그 도시의 가장 번성한 시내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는 법이다. 기록에 따르면 화교들이 대구에 처음 정착한 해는 1905년이다. 경부철도가 있고, 전국 3대 시장으로 꼽히는 서문시장과 전국의 최고의 악령시가 열리던 대구에 화교기 몰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 대구 속 중국을 찾는 마음으로 보면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은 종로2가 31번지다. 여기에 대구화교협회건물이 있고, 대구화교소학교도 있다. 그런 건물들은 대부분 중국기술자들이 지은 전형적인 건물이다.
남성로
(쌉살한 한약 향기를 맡으며 ‘웰빙 워킹투어’)
종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남성로는 시작된다. 남성로는 차가 다니기는 하지만 걷기에 아주 나쁘지는 않다. 현재의 남성로는 약전골목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악령시로 경상감영 시절 감영 안 객사 주변에서 봄,가을에 열리던 정기적인 시장이었지만, 읍성이 헐린 뒤 남성로 일대로 이전돼 상설화됐다. 읍성이 헐린 게 1906년 에서 1907년 사이이니 남성로 악령시는 이제 100년이 지난 셈이다. (악령전시관을 가면 남성로 악령시 전성기 때 모습을 볼수있다.) 악령시전시관 2층 전시관 입구에서 맛볼수있는 약차가있다. 그리고 전시관 주변은 악령태마공원으로 조성 돼있다. 약초들이 가득 있기는 한데, 테마공원 치고는 좀 갑갑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전시관 1층 북쪽에는 한국에서 하나 뿐인 한약재도매시장이 있다. 남성로 근대 건축물 중 명물은 1933년에 건립된 제일교회 예배당과 1937년에 건립된 예배당 종탑이다. 제일교회 맞은편 이해영 정형외과는 1914에 건립된 교남 YMCA가 있던 건물이다. 붉은 건물이 인상적인 옆 건축물은 현재 병원 입원실로 쓰이고 있다. 동쪽으로 가다보면 인보한약방 앞 도로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에 새겨져 있는 건 광무 4년 6월에 이 인근에 화재가 났을 때 화재의연금을 낸 명단이다. 이제 거기서 더 가면 악령서문이 나오면 남성로의 끝이다. 여기서부터는 북쪽으로 서성로가 시작이 된다. 그리고 현재 악령동문은 악령테마공원 광장 입구에 악령문이라는 이름으로 어정쩡하게 세워져 있다.
서성로
(‘상화, ‘고월’과 함께 길을 걷다)
서성로의 작은 골목길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서성로는 약전골목 끝에 세워진 악령서문에서 서성네거리를 지나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까지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 거부들이 살던 동네로 대구읍성의 달서문 표지석이 있다. 악령서문 인근의 담쟁이 덮인 고려양조장 건물을 뒤로하고 , 성성네거리를 가로지르면 깡통골목이 나온다.
웅장한 연회장 느낌이 나는, 1930년대 대구지역 최대 문구점인 무영당이 서성로 탐사의 출발점이다. 화교 음식점인 복영춘을 지나 서성로다방 간판이 보인다면 멈춰 골목안으로 10미터 정도 들어가면 철재대문 넘어 기와집이 보인다. 서성1길과 서성2길의 안쪽은 이 도시에 아직 이런 곳도 있구나 신기해 할 정도로 한옥이 많고 이상화 시인의 생가 터도 있다.
북성로
(소리로 감상하는 대구 최대 공구골목)
일제 강점기 때 대두 최고의 번화가로 1960년대 중반까지 상업,문화 중심지였던 북성로. 이 지역의 핵심 공간은 1킬로미터 정도 길게 늘어선 공구골목이다. 공구골목에는 공구 가는 소리,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한 차들이 내는 경적소리, 이륜차들이 내는 요란한 이동소리, 그리고 상인들과 고객들의 큰 목소리가 이 골목의 활기를 전해준다고 한다. 골목탐사는 대우빌딩 뒤편에 있는 미원회초밥집 2층 건물에서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때 타마무라서점 자리도. 북향의 벽돌조 2층 건물로 목재 오르내리창과 박공지붕등 외관이 독특하다. 이 건물처럼 북성로에서는 북향 건물과 가오을 많이 볼수있다. 북향 건물은 거의 대부분 일제 강점기 건물로 보면 된다. 중앙로를 건너 공구골목으로 가 보면, 널찍한 2차로가 서성로 대구은행지점 까지 곧게 뻗어 있다. 몇 걸음 더 서쪽으로 옮기다 보면 왼편에 2,3층짜리 근대 건축물이 나란히 서있다. 공구골목 가운데 쯤에는 높이 3미터짜리 철제 공룡 조형물이 서 있다. 그 뒤편에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난 길은 1990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행차한 길 어행정이다.
동성로
(박근혜 생가가 여기 있었다)
젊은이의 거리, 동성로에 익숙해서 인지 읍성 동편의 길이 라는 원래의 의미가 낯설 정도다. 교동 방면의 동성로는 한국전쟁 시절 피란민들의 개척시장. 국채보상로를 기준으로 북쪽은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는데, 요즘에는 구제옷 가게 골목이 늘어나면서 색다른 도심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2000년대 초창기만 해도 중년을 대상으로 하는 덤핑 가게들이 주류하였다. 지금의 SC제일은행 대구영업본부 앞이 읍성의 동쪽 대문, 진동문 자리였다. 경상감염의 진영, 즉 군부대가 있는 동쪽 문이라는 뜻에서 진동문이라 불렸다. 동성로를 젊은이들의 거리라고 말할 때는 대개 남쪽 동성로를 말하는 것이다. 동성로는 대구백화점을 빼 놓고 말할 수가 없다. 지금에 대구백화점 자리가 2006년 기준 수도권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2째로 비싼 땅이다. 옛 동인호텔 근처는 대선이 있던 2007년 풍수지리학자들이 부쩍 관심을 가지던 곳이다. 이 근처에 박근혜의 생가가 있었다. 풍수학자 김두규씨는 한 시사 잡지에서 이 자리를 험난한 시대 위기의 시대에 거친 광야에서 깃발을 들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모양새로 표현 했다. 대구백화점과 중앙치안센터 중간에는 읍성 시절 동소문이 중앙치안센터 앞 분수대 근처에는 남장대가 있었다. 북성로 끝 지점에서 출발한 발길이 남성로 출발점에 이르면 동성로의 어질어질하던 시간여행은 끝난다.
진골목
(달성 서씨 살았던 대구 최고의 부자 동네)
종로 홍백원에서 중앙시네마까지 이어지는 진골목. 300미터 정도 되는 좁은 길의 굽이침이 정겹다. 붉은 벽돌담과 곱게 둘러쳐진 돌담, 마당에 선 아름드리나무가 있다. 진골목은 일제 강점기 시절 달성 서씨가 모여 살며 대구의 부촌으로 이름이 높았던 골목이다. 당시 대구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해 서병직,서병기,서병원,서병오, 국채보상회 간부 서병규 등이 이 골목의 주인 노릇을 하였다. 진골목은 긴골목 이라는 뜻이다. 길다의 경상도 사투리 질다에서 나왔다. 진골목은 종로보다 폭은 좁았지만 종로처럼 감영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지금은 중앙시네마 뒤편 길에서 미도다방을 지나 진골목식당 안쪽까지를 보통 진골목이라 한다. 근대 시절 진골복은 부자 동네였다. 진골목의 최고 부자였던 서병국의 대저택은 지금의 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 운동장 등 약 3305 제곱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저택의 입구는 중앙시네마 뒤편 길에서 남쪽으로 약간 내려와 오른쪽 등나무식당 골목 막다른 끝. 지금은 세월의 먼지만 소복이 쌓여있다. 진골목 달성 서씨의 마지막 거주자 서제균이 2006년 작고한 뒤 진골목에서 달성 서씨는 사라졌다. 진골목의 매력을 완성하는 것은 소박한 식당들의 소박한 음식들이다. 한옥을 개조한 식당들의 상차림은 과하지 않고, 조미료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역사와 먹을거리, 풍경이 적당하게 어우러지는 골목이 흔치 않으니, 골목을 테마로 하는 관광 상품의 공간으로는 최적이다.
계산동
(대구 천재들의 삼각지대)
계수나무가 있는 산을 의미안는 계산에서 유래된 대구 계산동, 조선 말기 현재의 약전골목이 된 대구읍성의 남쪽 상곽 옆에 흐르던 천을 따라 형성된 동네다. 역사성과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계산성당 일대와 더불어 민족 운동가 서상돈, 민족시인 이상화, 서예가 박기돈 등 수많은 민족운동가와 예술인의 고택이 있는 곳이다. 격동기 역사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의 고택, 도심지 고목, 일제 강점기 건축물 등 골목길 구석구석 남아 있는 역사의 자취를 따라가 볼수가 있다. 골목 탐사의 출발지는 영남지방에서 최초로 건립된 고딕 양식의 성당인 계산성당. 대구총포사 왼쪽 골목길, 대구를 대표하는 냉면 전문점인 대동면옥이 있다. 골목 입구에 있는, 화교 1세대가 문을 연 성립행 잡화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곳은 아예 작은 입간판조차도 없다. 약령서문 서쪽도로 네거리. 음악가 박태원, 박태준 형재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약령서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횟집 사가이. 여는 대형 횟집 같지 않은 거무튀튀한 도색과 외형이다. 현재 등심과 삼겹살을 주 요리 하고 잇는 대청마루 식당이 있다. ㄱ자형 한옥에 사랑채를 거느린 대저택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 달의 시집이다. 이제 대로를 건너가면 대구 천채의 삼각지대가 나온다. 주상복합빌딩 미소시티 뒤편과 옛 영남대로 사이에 이상화, 이상정, 서상돈, 박기돈, 신동집, 이쾌대 등 민족운동가와 예술인들의 생가 터가 즐비하다.
덕산동
(아, 빛바랜 연서 같은 이름이여)
덕산동에는 추억을 파는 골목들이 있다. 현대백화점 공사로 인해 없어지는 염매시장 떡전골목과 화방돌목, 학사주점 골목. 높이 솟은 고층 빌딩과 맞닿은 그 골목에는 멀고도 가까운 옛날이 살아 숨쉰다
염매시장은 대구읍성 성벽이 헐리면서 형성되었다. 2007년 당시에는 남성로와 동성로4가의 남쪽 200미터 구간에 떡과 어패류, 과일, 죽, 채소 등을 취급하는 50여 개 점포가 식당이 맥을 잇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백화점 건설을 위한 철거 공사가 시작되면서 동아쇼핑을 기준으로 서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동편만 남아 있다.
지하철 2호선 반월당역17,18 출구로 나가면 대구 최대의 떡전골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덕산동에서 서너 짐만 남 있고, 현대백화점 부지에 있던 떡집 중 상당수는 종로로 진출했다. 떡전골목에서 영남대로 성밖 골목으로 접어들면 주막형 여관 흔적이 있다. 삼성금융플라자 담벼락 옆 막다른 골목에 곡주사가 있다. 원래 상호는 성주식당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다. 화방골목은 중안치안센터에서 덕산빌딩에 이르는 20여 미터 골목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청도로 가는 간선도로였다. 1980년대 중반 봉산문화거리가 형성되기 전 화방, 갤러리, 표구가 촘촘히 박혀있던 골목이다. 화방골목의 풀하우스 맞은편 골목.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이 즐겨 찾던, 학사주점 골목이다. 학사주점 골목은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옛 밀리 오래와 경상감영공원 일대에 존재하던 학사주점 골목은 1970년대 대구백화점 뒷골목에 형성되었고, 1980년대 대구백화점 주차장이 생기면서 지금의 봉산골목으로 옮겨졌다.
동산
(대구의 몽마르트)
대구의 동산은 지리적으로는 서산이다. 포정동에 경삼감영이 들어서시 전 대구읍지를 보면 왜 서산을 동산으로 불럿는 지를 알수있다. 달성토성의 중심지에서 서산은 동쪽에 있었고, 자연스레 동산으로 불렸다. 1899년 미국인 선교사 아담스와 존스가 달성 서씨 소유의 민동산이던 이곳을 사서 학교, 병원, 신학대학을 세웠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근대사 박물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계산오거리를 지나 엘디스리젠트호텔 직전의 일방통행로, 동산맨션을 지나면 90계단이나 되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녹음 사이로 하늘에 맞닿은 언덕이 보인다. 대구의 3.1운동길로, 장꾼 차림의 계성학교 남학생들, 신명학교 여학생들은 이 솔밭을 통해 서문시장 큰 장터, 종로를 거쳐 달성군청까지 행진 하였다. 언덕의 이국적 풍경은 몽마르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의료박물관과 교육역사박물관, 선교박물관은 모두 대구시 유명문화재다. 주차장 팻말을 따라 걷다 보면 흙길이 이어진다. 결혼 전 야외촬영 장소로 이름난 잔디밭을 끼고 있다.계성고등학교이 보이고 핸더슨관 맥퍼스의 매혹적인 외관이 눈을 사로 잡는다. 우리은행 동산동 지점 주차장 옆 귀암서원 입구 표지석, 막 다른 골목에서 왼쪽으로 틀어 걷다 보면 다양한 시대의 대문을 진열해 놓은 것 같은 풍경이 있다 퇴락한 경앙문 현판과 암자처럼 고즈넉한 달성 서시 종가가 보이면 동산여행의 끝이다.
시장북로
(글로벌 기업 삼성의 빛바랜 고향)
조선시대 서문시장의 북쪽으로 나 길이라 해 붙여진 이름인 대구 중구 시장북로. 등겨전골목, 말전거리, 엿장이 골목 등 삶의 체취를 다음 이름도 곳곳 남아 있다. 1920년대 초 서문시장이 현재위치로 옮겨 같지만 시장 골목의 옛 지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서성로교회에서 3.1만세운동 집결지였던 서문치안센터 앞 강씨소금집 자리를 거쳐 골목 끝자락 삼성상회가 있던 지점까지 걸으며 시장북로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볼수있다. 출발은 서성로교회 교육관으로 사용하고있는 이 곳은ㅇ 일제 강점기 떄 대구 직물업계 큰손 김성재가 설립한 포목점 자리다. 당시 지역 전체 상인의 거래량보다 이 포목점 물량이 많을 정도로 김성재는 대구 직물업계에 큰손이 었다고 한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젊은 시절 이곳에서 삼성상회를 시작했을 즈음 김성재 엄청난 거목이었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 이윤수 시인이 명금당이라는 금은방 시계점을 운영하게 되었고 문인들이 많이 찾게돼 나중에 죽순문학회가 태동했다. 달서전 복개로에 형성된 오토바이 골목 입구의 공단화공약품점이 바로 3.1운동 집결지였전 강시소급집 자리다. 2차로 정도 너비의 일방통행길인 시장북로를 따라가면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이 없이 붙은 일제 강점기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 온다. 실가게 거리나 원사 거리로 불리던 시장북로는 섬유업이 부흥하던 시절이다. 시장북로 중간쯤 네거리, 본점다방이 보인다. 광복 뒤 실가게 거리, 신발 골목, 말전거리를 오가던 인부들이 이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행선지로 떠났다고 한다. 오토바이 골목에 이어진 공구 골목. 가게마다 각종공구가 빽빽이 차있다. 시장북로 끝자락, 삼성그룹의 모태 삼성상회 터. 옛 제일모직 터와 함께 삼성기념관 대구 유치 추진의 중심점에 서 있는 곳이다. 삼성상회 인근에는 이건희 회장의 생가도 자리 잡고 있다.
수창동
(일제수탈과 국채보상운동, 엇갈린 두 역사의 접점)
수창동에서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곳은 대구연초제조창 이라고 불리던 KT G 대구 공장이다.1910년 일제 강점기 때 설립된 연초 제조공장은 광복 뒤 국가가 한국담배인삼공장로 만들어 유지되었다. 1999년 담배공장이 영주로 옮겨간 뒤 대구시가 이곳을 공원 부지로 묶었지만 예산이 없어 공원으로 만들지 못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불기 시작한 창조도시 바람은 우리나라 첫 담배제조창을 문화공간으로 재창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도심의 폐공장을 허물지 않고 문화예술 시설로 재활용하는 세계 도시들의 사례에 자극받아 대구문화창조발전소로 조성하기로 한 것이다. 구한말 이곳은 대구의 개천 물이 몰려드는 저습지였다.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는, 쓸모가 없는 땅이었다. 그러다가 일제가 대구를 점령한뒤 대구읍성 성곽을 허무는 관정에서 나온 흙을 이 일대에 매립한다. 공구상 골목 안쪽에 자리잡은 수창초등학교는 개교 이래 교명을 그대로 유지해 이름상으로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다.
대신동
(골라,골라 서문시장의 질펀한 유혹)
서민의 삶이 녹아 있는 서문시장. 볼거리, 살거리, 먹을거리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대구 명물시장이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2500여 개 점포와 손수레 그리고 흑갈색 고무 다라이로 무장한 1000개의 노점이 있다. 큰장, 대신동 시장으로도 불리는 서문시장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읍성 북문의 작은 작으로 대구장이란 이름이 붙엇던 서문시장은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확 커졌다. 1920년쯤 천황당 못을 매워 지금의 장소로 옮겨 졌다. 한때 1만여 점포가 있던 서문시장은 현재 주단과 포목을 중심으로 여섯 개 지구 상가를 갖추고 있다. 그릇으로 유명한 육교 앞 동산상가와 의류.주단.한복.이불 등의 도매점포가 밀집한 1지구와 4지구, 청과물.도자기.잡화 등으로 대표되는 5지구, 건어물 상가, 2005년 12월 화제로 대체상가에서 손님을 맞는 2지구로 이루어졌다. 일상 생활용품은 물론 관혼상제품, 농산물,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는 만물장터다. 서문시장 현대화 사업 하나로 아케이드 설치 공사를 한 뒤로, 한동안 재래시장을 떠났던 손님들의 발길이 다시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
서문시장에는 수유실, 어린이놀이방, 짐 맡기는 곳 등 편의 시설들이 있다. 끝없이 이어질 듯 보이는 서문시장 난전의 좌판을 벗어나면 계성중 고등학교 정문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숲이 포근히 감사는 50계단과 담쟁이다 덮인 핸더슨관은 1931년 2층으로 지었다가 1964년 증축된 3층 건물로 중새 성곽의 이미지가 풍긴다. 헨더슨관 왼쪽의 아담스관은 1908년 준공된 영남 최초의 신식 2층 건툭물로 수려한 외관을 자랑한다. 계성초등학교 입구를 지나 시작되는 대구명물거리 양말골목 1970년대 말 대구상회와 원일상회를 기점으로 형성됐고, 현재 50여 점포가 자리잡고 있다. 별의별 양말을 놀랄 만큼의 가격에 판다. 동산네거리에서 큰장네거리에 이르는 금은방골목과 미싱골목도 서문시장과 함께 성장한 대표적 상권이지만 지금은 겨우 명맥만 겨우 잇고 있다.
서문로.포정동
(일제 강점기 잘나가던 정치.경제 1번지)
서문로.포정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 대구의 정치.경재 중심지였다. 서문로는 은행이 밀집하던 곳으로, 요즘식으로 말하면 금융 1번지로 불릴 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은행은 한 나라의 경재의 핵심 기관이니 식민자본의 수탈경제 중심지로서, 또 민족자본 육성을 꿈꾸는 저항의 중심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 대구은행, 중소기업은행의 전신인 서부금융조합, 칠곡 장씨 집안이 설립한 경일은행,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구 상공은행이 모두 서문로에 있었다. 여기에 한성은행 대구 지점까지 가세했음으로 서문로의 세를 짐작할 만하다. 서문로에서 이어지는 포정동에는 조선식산은행 대구 지점, 일제 강점기 시절 화폐를 발행한 조선은행의 대구지점이 있었다. 서성로교회에서 시작된 골목 탐사 첫머리에 만나 한 염료상은 여는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경기침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1970년대 개업했다. 기생들이 많이 살았다는 샘밖골목. 아미고호텔 주차장 자리에서 만경관, 병무천 뒤편으로 이어진 이 골목은 현재 지도에서는 사라졌지만 1930년대 지도에는 뚜렷하게 나온다. 동쪽으로 대로를 건너기 전 왼쪽으로 돌면 벽돌의 2층 건물이 있다. 1층에 한진차일상사가 자리잡고 있는 이곳을 일제 강점기 시절 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던 비단상점 지이홍포목점이 있던 곳이다. 길을 건너면 1913년에 한국인이 설립한 대구 최초의 은행인 옛 대구 은행이 있던 건물이 나타난다. 1980년대 라디오 광고에서 익히 듣던 문구의 모든 것, 기남~상사고 이곳에 있다. 아미고호텔 주차장 앞 3층 붉은 벽돌건물은 1960년대 세워진 근대식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상점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창신상회는 2대쨰 영업을 하고 있는 이곳은 샘밖골목과 달성권번의 기생들에게 포목과 장구, 북, 예복, 공연복, 족두리 등 기방 필요품을 공급했으나 기생문화가 점차 사라지면서 품목도 바뀌게 되었다.
대안동.향촌동
(그곳에서 종교와 문학을 생각하다)
경상감영공원에서 볼 때 북쪽 동네가 대안동이다. 군데군데 있는 여관이나 상점이나, 도로 모두 한적해 슬슬 하릴없이 걷기에 무난하다. 대안동에서 볼만한장소는 대한천리교 대구교회-대안성당-대안성결교회로 이어지는 길이다. 조선시대 대한천리교 대구교회와 대안성당 자리에는 금학루가 있었다 한다. 서거장이 읊은 대구 10경중 4경 학루명월은 금학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말한다. 한국전쟁 때 두 절은 난민 수요소로 사용됐고, 전쟁이 끝나면서 각각 대한천리교 대구교회와 성당이 개보수 됐다. 그 옆에 있는 대안 성결교회는 일제 강점기 때도 교회로 이용된 곳이다. 교회길을 쭉 나가면 여관 골목이다. 플라스틱 통에 심겨진 나무들,장미,선인장 등이 묘하게 동네를 장식하고 있다. 여관 골목을 나가면 바로 향촌동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은행, 금융, 우체국, 전화국, 헌병대 등이 몰려 있던 경북도청 앞이 낮의 중심지였다면, 그 옆 동네인 향촌동에는 요정, 여관, 술집, 찻집 등이 밀집해 밤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대안동 만큼이나 한적해 보이는 현재의 향촌동에서 가장 깔끔하게 보이는 곳은 수제화 골목이다. 대안동까지 이어지는 수제화 골목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년동안 이어오는 골목으로, 스무 개 남짓한 수제화 가게들이 사이 좋게 들어서 있다.
태평로
(큰 평화의 길에 숨겨진 역사의 아이러니)
태평로. 그 이름을 풀이하면 큰 평화의 길이다. 태평로 이름 속에 숨은 일제의 수탈. 지금의 태평로는 그야말로 평화롭다.
태평로는 달성네거리에서 동인네거리에 이르는 2.16킬로미터의 도로를 말한다. 경부선 철길과 평행을 이루며 뻗어 있는 폭 30미터의 일직선 도로다. 대구역은 일제 식민지 사업의 거점이자 물류.자본.문화의 중심지였다. 철도, 운송, 석유, 석탄, 미곡, 무역 등 수많은 회사가 대구역 앞으로 신작로가 났다. 오늘날의 컨벤션 센터나 마찬가지인 경북상공장려관 문화공간인 공회당까지 세워졌다. 태평네거리에서 대구네거리까지에는 쌀 공출의 전진기지인 미창을 비롯해 석탄과 석유상점, 운송회사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북성공구골목 초입의 태경키친, 대나무형의 원형기둥과 둥근 창이 눈길을 끄는 분도석유주유소는 각각 운송회사와 석탄 상점이던 근대 건축물이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가 열리던 대구시민회관. 1929년 지하1층, 지상5층의 대구공회당이 이곳에 문을 열었다. 당시 조양회관과 함께 대구 문화1번지로 1935년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이 있었다. 대구역 인근의 번개시장. 이른 아침 완행열차 도착시각에 맞춰 반짝 섰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부여진 이름이다. 지하절 대구역 광장의 칠성바위는 조선 정조떄 경삼감사 이태영이 일곱 아들의 복을 빌며 바위에 이름을 하나씩 새긴 고인돌이다. 일제 식민지 수탈의 전진기지 태평로 여행에서는 격동의 역사를 보게된다.
중앙로
(대구에서 가장 넓었던 도로가 대중교통전용지구로)
중앙로는 1927년 일제가 식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현재의 대구역에서 반월당까지 뚫은
길이다. 개설 당시에는 대구에서 가장 넓은 도로였다.
골목탐사는 옛 제일서적 자리에서 시작했다. 방향을 북쪽으로 잡고 걸으면 대구역 앞 대우빌딩을 가기전, 아직도 네댓 집 붙어 있는 마크사들을 만난다. 복잡한 중앙로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골목에는 아직도 축음기로 음악을 들려주는 녹향 음악실이 있다. 녹향 음악실 바로 옆에는 카메라 전문 박물관인 한국영상 박물관이 있다. 답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2003년 대구지하철방화 사건으로 대구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안긴 중앙로 그 중앙로가 전국 최초의 대중교통전용지구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있다.
교통
(없는 게 없네 만물상 거리 된 옛 교육 1번지)
교동 일대는 조선시대 달구벌의 정신문화, 교육의 중심지였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된 국립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기 떄문이다. 교동이라는 이름도 향교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대구 항교는 1398년 교동에 세워 졌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돼어 1599년 지금의 달성공원 부근에 재건된 향교는 1605년 교동으로 다시 옮겨 졌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교동의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교동시장은 미군부대에서 빠져나온 PX물건들을 팔아 양키시장으로도 불렸고, 도깨비 방망이처럼 두드리면 원하는 물건이 쏟아진다고 도깨비 시장이라고도 하였다. 1956년 3월 교동 시장으로 정식 허가를 내 보따리 무역을 통한 수입품과 군수품을 기반으로 1970~80년대 호황을 누렸다. 교동시장 뿌리치고 교동시장 백화부 2층 계단을 오르면 생활용품의 별천지가 펼쳐진다. 또 근처에 귀금속골목 거리 상점들이 파는 귀금속 가격을 따지면 대구에서 가장 비싼 골목 중 하나일 것이다. 1970년대 시계 매장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이 골목의 역사는 시작됐다. 시계 판매, 수리와 중고제품 판매를 중심으로 이 골목의 역사가 시작됐다.
남상동 아미산
(무당골에 자리잡은 순교기념관)
반월당네거리에서 남쪽으로 남산시장네거리까지, 서쪽으로는 반월당네거리에서 계산오거리까지가 예부터 부르던 이름으로는 아미산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남산2동에 속한다. 적십자병원 주차장 뒤에 자리잡은 관덕정이 있고 관덕정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동화사 포교당 보현사 바로 아래쪽이다. 거기에 초가집 한두 채가 남아 있다. 보현사에서 남서쪽 맞은편의 현 동부교육청은 옛 복명보통학교 자리다. 남상동 아미산에는 또 하나의 민족교육기관이 있는데 바로 교남학원이다. 인쇄골목 중간쯤에서 안으로 들어간 문우관길에는 아담한 기와집이 있다. 담장이 야트막해서 밖에서 마당이며 건물이다 보인다. 인쇄골목을 빠져나와 계산오거리까지 거의 다 오면 천재화가인 이인성 아틀리에가 있던 남산병원 자리다. 남산2동은 낡은 주택가, 그리고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섬 같은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대비되는 주거 지역이다
남산 1동, 봉산동
남산1동과 봉산동은 연구산을 경계로 맞대 있다. 연구산은 서거정이 대구 10경의 하나로 읊었던 곳이다. 건들바위네거리에서 향교를 거쳐 봉산문화거리까지 지그재그 골목투어에서는 돌거북, 군소 사찰, 일제관사건물, 피란촌 등 볼거리가 심심찮게 이어진다. 향교 방향으로 몇 걸음 옮기면 일제 강점기 때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일본 육군관사가 보인다. 삼익장한방탕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어 건들바위 뒤편 언덕에는 도심에서 보기 드문 산동네 풍경이 펼처진다. 유림문화행사 등 특별한 날이 아니면 조용할 것 같은 향교에는 의외로 중고생들이 삼삼오오 보인다. 대구향교는 원래 교동에 있었는데 1932년 일제가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유생들의 독립운동이 확산될 것을 두려워해 일본 육군부대와 관사가 밀집해 있는 남산도으로 옮겨 버렸다 남산동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대폿집이 있다. 향교에서 남문시장 네거리로 가다 왼쪽 골목길 안에 46년 역사를 자랑하는 남산동 도루묵 이라는 대폿집이 있다. 골목탐사의 끝은 제일중학교다.
남산동 카톨릭타운
(거부 서상돈이 교황에게 바친 땅)
대구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후자의 가치를 앞세우고 종교를 초월해서 걸어볼 만한 동네다. 이 동네는 서상돈이 일대 땅을 교황에게 바쳐 카톨릭 소유 건물들이 하나 둘 건립되 카톨릭 타운이 된거다. 이 이국적인
풍경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유스티노 캠퍼스의 잔디 운동장과 프랑스풍의 벽돌 건물, 주교와 신부들이 잠들어 있는 성직자 묘지, 프랑스 루드르 지방의 성모 동굴을 뜬 성모당 건물과 넓게 펼처진 잔디 등은 유럽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공평동과 삼덕동 1,2다
(즐겨라 축제의 삶을 전하다)
공평동과 삼덕동 골목은 묘하다. 화려한 네오사인 속에 펼처진 이 거리는 축제의 삶을 권한다. 야시골목, 늑대골목, 로데오거리, 카페거리의 소란스러움이 숙제 같은 삶을 잊으라한다. 삼덕동은 삼덕은 천덕,지덕,인덕을 뜻한다. 통신골목 옛 고려양봉원에서 갤러리존을 거쳐 금융결제원 대구경북지역본부에 이르는 거리에는 아기자기한 옷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다. 단박에 사내를 호리는 구미호로 변신한다는 패션 아지트 야시골목이다, 야시골목에서 100미터 정도 되는 거리는 남성들의 늑대골목이라고 불린다. 로데오거리는 서울의 홍익대 부근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복합유흥지점이다. 날마다 젊은이들의 축제가 열리는 공평동과 삼덕동 1~2가. 삶은 즐기는 자의 몫임을 웅변하는 거리다.
삼덕동3가
(재개발에 흔들리는 담장 허물기 원조 동네)
담장 허물기 사업의 출발지. 동네 미술관과 국악당, 그리고 동네축제가 있는곳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라는 주제가 나오면 빠지지 않는 곳이 삼덕동3가다.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동덕로를 가로질러 마을에 들어가면 동덕4길을 살기 좋은 마을의 작품집 같다. 대구시 청소년 쉼터 맞은편에는 1998년11월 최초로 담장을 허문 개인 주택이 있다. 그건 바로 담장 허물기운동의 출발이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마을공동체 문화가 만들어졌다. 1999년에는 병뚜껑 벽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벽화거리를 나오면 빛솔미술관이 나온다.
대봉동
(논밭 천지가 모던한 명품거리로)
대봉동은 대로에도 차량이 붐비지 않아 조용하고 여유롭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논과 밭이 있는 벌판이었는데 식민지 통치후 근대학교, 공장 등이 들어 서면서 개발이 돼었다. 달구벌 대로변 옛 대구사범학교 본관 건물에서 골목탐사를 시작 하면 된다. 삼덕네거리에서 대백프라자로 가는 길은 패션, 골프, 명품가구점과 고급레스토랑 등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청운맨션에서 강변도로로 가다 왼쪽 6층건물 PB아트센터. 연극 전용 소극장과 패션살롱, 화랑 등을 같춘 복합문화공간으로 이 부근의 아름다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옛 경북고등학교, 본관 건물에 들어선 대봉도서관. 경북고등학교는 전신 대구고등보통학교 시절의 붉은 벽돌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갤러리전시관으로 사용되고있다. 신천제방을 따라 개설된 방천시장. 1970~80년대 까지만 해도 대구에서 나름 큰 규모의 전통시장이었으나 급속한 상권 위축으로 인해 현재는 활기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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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에고고..요악하느라 고생햇겟다.ㅠ
잘지내니 레오?
벨라에게 얘기들엇다요..ㅋ
나중에 혼내줄거임..ㅠ(농담)
레오야..
이제 얼마남지 않앗다..길어보이는 시간이겟지만..네겐 더많은 시련과 시험들이 다가올걸 보면 지금의 그시간들은 너무 의미잇고..좋은경험들로 기억될거야.
후회없이..한시간한시간 의미를 부여해 지내보렴..항상기도하며 응원할게..사랑한다
감사합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어머니 위해 기도 하겠습니다 ㅎㅎ
@이찬영 믿는다.레오..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