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旅情)〈14〉이별(離別)
동창생의 중병(重病) 소식을 접하고 지난 3월 초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까하고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친구는 미쳐 글을 보지도 못한 듯 3월 중순경
자신의 카카오스토리에 젊은 시절 남편과 다정하게 촬영한 사진 한 장과
“사랑 한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사투를 벌이다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이야기 하면서 인간의 여덟 가지 고통을 말하는
인생팔고(人生八苦) 중 하나인 애별리고(愛別離苦)라 하여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고통을 언급한바 있는데 오늘은 하늘나라로 먼저
가버린 친구를 생각하며 우리들의 인생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또 한
가지의 고통인 이별을 이야기하려합니다.
이별은 생리사별(生離死別)로 살아서 서로 멀리 떠나 이별하는 생이별과
죽어서 영원히 헤어지는 사별(死別)로 구분되는데 생이별은 삶의
여정에서 그 사연이 셀 수 없이 많으며 인위적으로 그 고통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겠지만 사별은 생로병사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때때로 우리들과 함께합니다. 또한 생이별과 사별은 부모를 산에
묻는 것과 자식을 가슴에 묻는 아픔의 차이와 고통의 시간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겠지만 이별은 달갑지 않은 삶의 일부분으로 우리들 주변을
배회합니다.
지구상에 생존하는 수많은 민족 중 우리 한민족보다 이별에 익숙한
민족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이유때문인지 아님 약한 국력 때문인지 주변국들로 부터 수많은
침략을 당해왔고 또한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이유로 동족 간 전쟁과
갈등을 치루는 과정에서 수천만의 동족이 생이별과 사별의 고통을
겪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시시비비를 명쾌하게 밝힐 수 없는 제주도4.3 / 노근리, 거창, 산청
양민학살 / 보도연맹 / 여순, 대구 폭동 등 서로 부끄러운 민낯을 들지도
못하는 각종 사건들이 이민족이 아닌 동족에게 이별의 고통과 한(恨)을
안겨주었습니다.
어디 부끄러운 사건과 침략, 전쟁뿐이겠습니까 척박한 이 땅의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 및 친구들과 이별하고 지구촌 곳곳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나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 동족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대손손 잊을 수 없는“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아리랑의 가사처럼 민족의 한은 타민족보다도 빈번한 이러한
이별로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에 한민족(韓民族)이
한민족(恨民族)으로 여겨집니다.
이별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뿐이겠습니까. 태어나 자란 고향을
떠나고 고향이 흔적조차 없어지는 일도 애지중지 아끼며 정든 물건과의
헤어짐도 이별입니다 가끔 경관이 수려한 댐과 호수주변 이름난 곳을
여행하며 호수와 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고향을 그리며 수몰
지역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기 위한 전시관을 둘러보며 그들의 추억과
이별의 애틋함을 엿보곤 합니다. 그럴 때 마다 그곳은 나에게
구경거리에 불과하지만 고향을 잃은 당사자들은 이별의 정한(情恨)을
달래는 공간으로 삶의 중요한 한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들 고향에서 사라지는 마을(두동)도 조그만 전시공간을 만들어
훗날 고향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고 이별의 정한(情恨)을 달래는 작은
공간이 되길 간절하게 기원해봅니다.
이렇게 이별의 고통에 익숙한 우리들은 북받쳐 오르는 그 설움을
억누르기 위해 노래와 시로 감정을 추슬러 왔습니다. 유달리 대중문학에
이별을 주제로 하는 노래와 시 등이 많은 이유 또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평소 즐겨 부르는 노래 한 소절 시(詩)
한 단락에 이별의 정한(情恨)이 베여있지 않은 노래와 시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근래 들어 “아름다운 이별”이란 노래와 영화가 가끔
등장하는 것을 보고 이별이 고통과 설움이 아니고 마치 평온함과
기쁨으로 바뀐 것 같은 이야기 같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별의 과정을
아름답게 치장하여 아름다운 이별이라 이름 붙여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이별의 고통이 우리들의 삶에서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불가(佛家)에서의 만남과 이별은 삶속에서 필연적 요소로 여기고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하여 만남은 필연적으로
이별로 이어지고 이별은 또 다른 해후로 이어진다하였습니다.
시인(詩人) 한용운님의“님의 침묵”에도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고하여 이별을
또 다른 해탈의 경지로 승화시켰습니다. 만남이 곧 인연이라 한다면
그 인연은 잠자리 날개와 같은 천사의 옷자락이 바위에 부딪혀 그
바위가 하얀 눈꽃 같은 가루로 변할 때 억겁의 인연은 찾아온다
하였습니다. 그렇게 맺은 인연을 끊는 아픔을 어찌 윤회와 같은 또 다른
해후로 달래지 않으려 하겠습니까.
우리들은 일상의 삶속에서 처음 겪게 되는 생이별이 첫사랑의 아픔이며
사별은 대체로 부모님과의 이별입니다. 둘 다 사랑이라는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지만 사랑의 의미에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별의 정한(情恨)도 당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흔히 첫사랑을
평생 동안 못 잊어한다 라는 말은 그 애틋한 정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첫사랑은 아픔보다 슬픈 그리움으로 부모님은 그리움보다
아픔으로 우리들을 한층 성숙시켜 왔습니다. 오래전 모 방송국 드라마
“아름다운 이별”의 작가 노희경씨의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작가는“아름다운 이별”이란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드라마로 방영할 때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나문희씨가
작가에게“이렇게 울려도 되는 거야?”라고 항의하자 작가가
“나는 며칠을 구르며 울었는데 그 정도는 울어야지.”라고 했던 일화가
생각납니다. 부모님과의 사별은 그러한 것입니다.
배삼선 친구가 자신의 카카오스토리에 남긴 마지막 메세지
지금까지 집안 어르신을 배웅하는 사별의 장소에 불려 다니다
언제부터인가 형제자매를 배웅하는 자리에 왔습니다. 하물며
이번 친구의 주검은 친구들과의 이별도 이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죽음이 순서대로 다가온다는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어 죽음은 나이순도 아니고 다만
생자필멸(生者必滅)이란 말처럼 누구나 태어나면 한번 죽는다는
숙명적 생각뿐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종교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죽지 않고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하였고 기독교는 죽지 않고 영생(永生)한다고 하였나봅니다.
최근 우리는 서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 두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한사람은 죽음 앞에 안간힘을 다하여 생을 부여잡고 연명치료를 하고
있는 삼성그룹의 총수 이건희 회장과 구차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저승으로 홀연히 떠난 럭키그룹 구본무 회장의 주검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별은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공포와 고통으로
다가오고 보내는 자들에게는 가슴을 시리게 하는 고통으로 남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별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마치 죽음을 이야기 한듯하네요 생이별 보다
사별의 고통이 무엇보다 큰것이라 여겨져 사별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죽음에 대한 이야기처럼 되었네요 그저께(5. 20) 갑자기 나의 휴대폰에
하늘나라로 떠난 배삼선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달라는 카카오스토리
메시지를 읽고 축하 댓글을 하나 달았습니다. “유교의 풍습에 의하면
친구는 마지막 생일을 맞는다고 그리고 축하한다고”사이버 공간에서
친구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이별의 고통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느낌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이젠 친구들과 이별해야하는 서글픔이
오늘따라 나를 슬프게합니다. 두서없는 이글을 친구의 영전에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