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일본은 지난 20년간 사용하던 화폐의 인물들을 바꾸었다. 그러나 1만엔권 지폐 속의 인물은 바꾸지 않았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적 인물로서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 계몽 사상가인 그는 학문과 교육으로 일본을 일으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이 서양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선언한 그의 저서 「학문의 권장」은 당시에 무려 340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그가 세운 게이오 의숙은 서양의 신식 학문을 배운 학생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이들은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소원은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바탕으로 한 문명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나라의 힘을 길러 일본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000권의 국제법이 한 개의 대포만 못하다."고 주장하며 '힘'으로 조선과 중국을 접수하자고 호소하였다. 그에게 조선과 중국은 평등한 이웃 나라가 아니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국 일본이 야만국 청나라를 이겨야 한다며 사비를 털어 국가에 헌납하였다. 일본이 승리하자 "황홀하고 꿈만 같아서 저절로 울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제국주의의 문턱에 들어선 일본을 자랑스러워했다. 일본의 침략 전쟁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합리화되었고, 이후 일본은 조선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의 주권을 빼앗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지식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였던 조선의 개화사상가 유길준은 동학 농민군이 '문명화'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하여 일본군이 이들을 학살하는 것을 두둔하였다. 친일파였던 이광수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무덤을 찾아가 "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망연자실하였다가 다시 눈을 들어 묘비를 바라보니 존경의 마음이 더욱 새롭다."는 말로 존경심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생각대로 문명은 힘이고 나아가 '힘은 곧 정의'라는 믿음을 가져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게 되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인물 정보
- 후쿠자와 유키치 (ふくざわゆきち | 福澤諭吉) 전 교원
- 출생-사망
- 1835년 1월 10일 (일본) - 1901년 2월 3일
- 경력
- 1882 시사신보 창간
1873 메이로쿠사 창설, 실학 장려
1868 학숙 이전, 게이오기주쿠로 개칭
1858 네덜란드 어학교 난학숙 개교
첫댓글 어느 나라나 그 시대의 인물은 있는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