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와 더불어 / 구 상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홀로와 더불어 / 2002,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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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친구 / 구 상
주일(일요일)마다 명동성당에 가면
초입 언덕에 구걸상자를 앞에 놓고
뇌성마비로 전신이 뒤틀린
그 친구가 앉아 있다.
그가 거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지는
한 5년 되었을까?
나하고는 그 언제부터인지
아주 낯익고 친숙해져서
내가 언덕을 오를 양이면
멀리서부터 혀꼬부라진 소리를
지르곤 한다.
그런데 그 친구 이즈막에 와서는
더욱더 우리 우정에 적극성을 띠어
지난 주에는 주스 한 병을 건네주더니
오늘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있다가,
그 비틀어진 팔과 꼬인 손으로 내주었다.
그 극진한 우정에 和答할 바를 몰라
나는 마치 무안이나 당한 사람처럼
휭하니 성당엘 들어와 앉는다.
이윽고 나는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두 손에 장미를 받들고 기도한다.
하느님! 당신의 영원한 동산에서는
저와 내가 허물을 벗은 털벌레처럼
나비가 되어 함께 날게 하소서!
* 장궤틀 - 성당에 놓인, 무릎을 꿇는 기도대.
인류의 맹점에서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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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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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과 더불어 / 구상
아파트 베란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
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웠다.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그지 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며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기 그지 없다.
곰곰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그 풀꽃과 더불어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여기 여기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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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구상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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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구멍 / 구상
내 마음 저 깊이 어디
한 구멍이 뚫려 있어
저 허공과
아니 저 무한과
저 영원과 맞닿아서
공空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그 곳으로부터
신기한 바람이 불어 온다.
신비한 울림이 울려 온다.
신령한 말씀이 들려 온다.
나는 어린애가 되어
말 이전의 말로
이에 응답할 제
온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서 제 모습을 하고
총총한 별이 되어 빛을 뿜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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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 구상
저 성현들이 쳐드신 바
어린이 마음을
지각(知覺) 이전의 상태로
너희는 오해하지들 마라!
그런 미숙(未熟)의 유치란
본능적 충동에 사로잡히거나
독선과 편협을 일삼게 되느니,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린이 마음이란
진리를 깨우침으로써
자기가 자신에게 이김으로써
이른바 '거듭남'에서 오는
순진이요, 단순이요,
소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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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에다 / 구 상
요즘 멀쩡한 사람들 헛소리에
너나없이 놀아날까 두렵다.
길은 장님에게 물어라.
해답은 벙어리에게 들으라.
시비는 귀머거리에게서 밝히라.
진실은 바보에게서 구하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길은 네 마음에다 물어라.
해답은 네 마음에서 들으라.
시비는 네 마음에서 밝히라.
진실은 네 마음에다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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