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金時敏)이 진주 목사가 되었다.
임진년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성을 보수하고 적을 막으니 왜병이 이기지 못하여 물러갔다.
이듬해 6월에 왜병이 다시 진주를 포위했는데 8일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목사 서예원(徐禮元), 판관 성수경(成守璟),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본도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의병 고종후(高從厚) 등이 모두 죽었다.
이때 죽은 군사와 백성이 6만 명이 넘었다. 말· 소· 닭· 개들도 남지 않았다.
적이 성을 허물고 가옥을 불사르며 우물을 메우고
전번의 패전에 대한 분풀이를 하니, 때는 6월 28일 이었다.
이때 패한 원인은 구원병이 이르지 않은 데에도 있었지만
김천일이 거느린 병사가 모두 서울 저자거리에서 모집한 오합지졸이라는 데 있었다.
그런데도 김천일과 목사 서예원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서로 시기하는 마음에 군령이 일치하지 못하였다.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이 죽음에 임하여 시를 지어 일렀다.
矗石樓下三壯士(촉석루하삼장사) 촉석루 아래 세 장사여,
一杯笑指長江水(일배소지 장강수) 한 잔 술 들고 웃으며 강물을 가리키네.
長江萬古流滔滔(장강만고유도도) 길고긴 강물은 도도히 흐르누나.
波不竭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 물결은 다함없으리. 혼도 또한 그러하리.
진주성 전투가 끝난 뒤 의기(義妓)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논개는 최경회와 정분이 있는 여자였다.
-《리더의 아침을 여는 책》-
첫댓글 논개는 자신의 삼촌? 이 노름으로 빚지자
논개 모녀를 빚으로 넘기겨지려는것을
최경회 장군이 구해주게되고
그 집안 하인으로 지내다가 장군의 부인이 죽자
두번째 부인으로 장군을 따라다니며 보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최경회와 정분이 있는 여자였다기 보다
팔려가는 모녀를 구출해준 은인에게 보답을 하였다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ㅡ
함양군 금당리 부부묘소
진주 목사-김시민(金時敏)이
목사-서예원(徐禮元),
판관-성수경(成守璟),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본도병사-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황진(黃進),
의병 -고종후(高從厚
/
矗石樓下三壯士(촉석루하삼장사) 촉석루 아래 세 장사여,
一杯笑指長江水(일배소지 장강수) 한 잔 술 들고 웃으며 강물을 가리키네.
長江萬古流滔滔(장강만고유도도) 길고긴 강물은 도도히 흐르누나.
波不竭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 물결은 다함없으리. 혼도 또한 그러하리.
/
삼장사는
김천일· 최경회· 황진 세분을 가르키는가 보네요
예전 진주성을 지키는~ 큰 강 같은 것을 빙들러 팠다든데
그 자리가 진주 배영 국민학교 부근쯤 떨어진곳으로
진주성을 빙 둘러 파여져 있었던가봅니다
저도 논개에 대한 얘기를 어디서 본 듯한데,
저 역시 지기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삼장사의 시에는 의기에 불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장부의 기개가 엿보입니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싸워도 이기기 힘든 전쟁에서
서로 시기하는 마음에 군령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다만 역사는 승자의 것이란 말이 있듯이
역사를 책에 있는 대로 믿기 또한 어렵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