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봄밤」 평설 / 신형철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行路와 비슷한 回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人生이여 災殃과 不幸과 격투와 청춘과 千萬人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합동시집 『平和에의 證言』 (1957)
.....................................................................................................................................................................................................
여럿이 마시는 사람은 희망이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이고, 혼자 마시는 사람은 절망이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일까. 전자가 결국 절망뿐임을 깨달으면 귀가하다 혼자서 한잔 더 할 것이고, 후자가 끝내 희망을 포기 못하겠으면 누군가를 불러내 한잔 더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신 것이 희망이건 절망이건, 자고 일어나면 남아 있는 것은 부끄러움뿐일 때가 있다. 어젯밤 내가 느낀 감정들, 내가 과장해서 나 자신에게 제공한 그것들의 구겨진 포장지만 남아 있어서다. 대체로 희망과 절망은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는 멀리 있다. 현실의 대부분은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냥 무명(無明)의 시간인 것이다. 술 덜 깬 눈에만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 이것이 무슨 대단한 각성의 체험 같은 것은 아닐 테고, 그저 현장검증에 끌려간 자가 어쩔 수 없이 ‘예, 맞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같은 것이겠지만, 여하튼 이 작취미성(昨醉未醒)의 시간만큼 우리가 삶의 진실과 가까워지는 때도 드물 것이다. 1936년 어느 날의 이상(李箱)도 그러했으리라. “육신이 흐느적흐느적 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날개>) 그러나 ‘은화처럼 맑은 정신’이라면 이상보다도 역시 김수영이다. 누구보다 수신(修身)에의 강박이 심했던 그는 그 맑은 정신으로 제 욕망을 관찰하기를 즐겼다. 김수영의 시 ‘봄밤’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때는 어느 봄날 저녁인데 화자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이제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런 몸일 때만 찾아오는 생각들이 있어서 그것을 제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다. 김수영의 시치고는 의외로 매섭지 않고 다독이는 어조라 읽는 사람이 뜻밖의 위안을 얻게 된다. 그의 시 중에서 의무감 없이 좋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연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시는 아닌데, 특별히 분석할 게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의 문장이 쉬워도 시인의 마음이 쉽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그러니까 제 마음에 쫓기지 말자는 말이다. 한국어 문장으로서는 별로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는데도 저절로 외워져서 되뇌게 되는 매력적인 구절이다. 이 시 전체가 저 구절의 변주/확장이다. 숙취 때문에 뒹굴다 깨어나 보니 벌써 저녁일 때의 낭패감과 억울함. 이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시인은 묻는다. 그것들은 “혁혁한 업적”을 바라는 마음, 그러니까 빨리 꿈을 이루고 싶다는 갈급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는 자기를 제어할 필요를 느낀다. ‘개’와 ‘종’과 ‘달’이 밤이 왔음을 알려도 당황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시인이 ‘서둘지 말라’고 말해주니 위로가 되기는 하는데 이게 언제나 유효한 말은 아닐 것이다. 미루는 게 버릇인 사람이나 수십 년 동안 그대로인 사회 시스템을 향해서는 오히려 ‘서두르라’고 일갈해야 할 일이 아닌가? 1연에서 그가 ‘같은 듯 다른’ 세 가지를 함께 말했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싶다. 서둘지 말고, 바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라. 이 셋은 자주 엉킨다.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은데, 이룬 것이 너무 없어 당황스러울 때, 그때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위험한 때다. 김수영이 걱정한 것도 그것이지 않을까. 빨리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마음에 지면 나를 잃고 꿈은 왜곡된다. 그러므로 서두르지 않는 마음이란 현실 앞에 의연해지려는 마음이다.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말이다. 달은 지구를 따라 끝없이 돈다. 이상(꿈)이 현실(삶)에 내려앉지 못하고 그렇게 겉도는/헛도는 사태를 보는 일은 괴롭다. 게다가 달은 차고 이지러지기를 반복하지 않는가. 김수영 자신의 꿈도 달의 모양처럼 날카롭다가 환했다가 비어 보였다가 그러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공전할 때 기차는 어디로건 자꾸 떠나니 그 기적 소리가 어찌 들렸을까. “과연” 쓸쓸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성마르게 시동을 걸면 안 된다고, 그는 또 제 욕망에 제동을 건다. 김수영의 꿈(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이 시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3연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김수영의 ‘수신’에 대한 강박은 본래 ‘제가’(齊家)와 ‘치국’(治國)에 대한 열망과 이어져 있다. 이 시에서도 그의 근심의 대상은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까지를 포괄한다. 한국의 낙후된 정치·사회적 조건이 언제나 그를 서두르게 했다. 그 형형한 눈에 너무 많은 누추한 것들이 보이니 괴로운 것이다. 오죽하면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가 될 것을 상상했겠는가. 서두르지 말고 묵묵히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제 그는 어느 봄밤 자신에게 또렷해진 이 ‘서두르지 않기’의 방법론에 “절제”라는 이름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부터 ‘절제’란 내 욕망과 관계 맺는 바람직한 방식이었다. 고대 철학자에게 욕망의 ‘강도’가 문제라면, 우리의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욕망의 ‘속도’다. 이 절제는 개인적·사회적 꿈을 이루기 위한 긴 싸움에 나서려는 자에게 필요한 탁월성(德, arete)인 것이다. 그가 절제를 “나의 귀여운 아들”이라 한 것은 그것이 ‘내가 낳았으나 오히려 나를 인도하는’ 생각이기 때문이고, “나의 영감”이라 한 것은 그것이 향후 시작(詩作)의 지침이 되어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릴케의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를 읽다 보면 마지막 구절인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에서 언제나 뜨끔해진다. 김수영의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역시 그런 구절이다. 이런 백발백중은 좀 신기하다. 그만큼 내가 언제나 ‘바꿀 필요가 있는’ 또 ‘애타도록 서두르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리라. 최근에도 나는 어떤 글을 쓰는 와중에, 이 시를 다시 읽고 나서, 내가 쓴 많은 조급한 문장들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결국 ‘혁혁한 업적’을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워라. 김수영이 김수영이어서 괴로웠던 것은 김수영뿐이고, 우리에게는 그가 있어 온통 다행인 일들뿐이다. (한겨레신문 2016-03-18 , 신형철의 격주시화 ) 신형철 문학평론가 |
첫댓글 김수영의 시 ‘봄밤’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때는 어느 봄날 저녁인데 화자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이제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런 몸일 때만 찾아오는 생각들이 있어서 그것을 제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다. 김수영의 시치고는 의외로 매섭지 않고 다독이는 어조라 읽는 사람이 뜻밖의 위안을 얻게 된다. 그의 시 중에서 의무감 없이 좋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연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시는 아닌데, 특별히 분석할 게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의 문장이 쉬워도 시인의 마음이 쉽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