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문화류씨(文化柳氏)
【시조】류차달(柳車達)
【인구】284,083명 (2000년 현재)
【주요파】▲시랑공파 ▲문숙공파 ▲하정공파 ▲장령공파 ▲곤산군파 ▲문평군파 ▲지후사공파 ▲좌상공파 ▲검한성공파
▲정숙공파 ▲판사공파 ▲수사공파 ▲부윤공파 ▲충경공파
시조 류차달은 후삼국 통일전쟁 당시 유주(문화의 당시 이름)의 호족이었다.
문화는 황해도 신천군에 있는 지명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을 치러 남으로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웠다.
이때 류차달이 수레 1천량을 만들어 군량을 보급했다. 그 공으로 삼한공신이 되었다. 류차달의 원래 이름은 류해(柳海)였다.
그러나 태조 왕건이 "이차위달(以車爲達)"했다고 하여 차달(車達)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한편 류차달 이전의 조상은 고조선말의 차무일이다.
차무일의 32대손으로 신라 때 좌상을 지낸 차승색이 멸문지화의 위험에 처하자 멀리 도망가서 성을 류씨로 바꾼 것이다.
류차달은 효전과 효금의 두 아들이 있었다.
그래서 큰 아들 효전에게는 본래의 성인 차성을 쓰게 하고 둘째 아들 효금에게는 류성을 그대로 세습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류씨와 차씨는 뿌리가 같으면서 다른 성을 갖게 된다.
류씨는 문화류씨를 비롯 풍산, 선산, 서산, 전주, 진주, 고흥, 영광 등 여러 본관이 있다.
이중에서 고흥, 영광을 제외하고는 모두 류차달의 9대손에서 나누어졌다.
문화류씨의 7세조 류공권에게는 류언침과 류택 두 아들이 있었다.
그 후손을 각각 갑파, 을파라 하며 그 뒤 모두 15개 파로 갈라진다.
풍산류씨, 서산류씨, 선산류씨, 진주류씨 등은 모두 갑파에서 분관됐다.
류만주는 고려 우왕 때 밀직부사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웠다.
요동정벌군 장수로 출전했다가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태조 7년 이성계의 계승자를 둘러싸고 왕자들간에 싸움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 측에 의해 참살되었다.
류관도 이성계의 개국에 협조하여 조선 개국 후 공신이 되었다. 청백리에 올랐으며 학문에 뛰어나고 시문에 능했다.
울타리도 없는 초가에 살면서 비가 새자 우산을 받고 앉아 우산 없는 사람을 걱정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유명한 류성원은 문화류씨가의 대표적인 절신이다.
세종 26년 식년문과에 급제, 다음해 "의방유찬" 편찬에 참여했다.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1453년 수양의 협박에 못이겨 정난공신을 표창하는 교서를 쓰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통곡했다.
그 후 류성원은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일이 탄로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류만주의 증손 류자미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성삼문의 나이 어린 딸을 몰래 데려다 숨겨 길러 며느리로 삼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켜 일생을 은거했다.
반계 유형원은 현종 때 유명한 실학자로 이름이 높은 인물이다.
165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떠나 평생을 야인으로 보냈다.
경기도 여주 등지로 옮겨 살다가 1668년 전북 부안에 정착한 후 저술과 학문 연구에 전심하면서
여행을 즐겨 수차 전국을 유람했다. 그는 실사구시의 학풍이 시작되는 맹아기에 실학을 학문으로서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이러한 경세치용의 사상은 이이의 영향을 받았으며 반계 이후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에 이르러 크게 발전되었다.
저서로 "반계수록"이 있다.
유득공은 북학파의 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산업진흥을 주장했다.
문장에도 신경지를 개척, 박제가 등과 함께 "한문신파4가"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