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찐 개찐
“도찐 개찐!”
콩고 사람들의 살림살이에 대한 나의 물음에 사람 사는 게 다, 거서 거라고 그녀는 답했다.
친구가 가르쳐 준 꽃마리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땅거미가 졌다. 그는 날이 저물기 전에 산에서 내려와야겠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전만 해도 꽃망울마다 후끈 달아 터진 꽃들의 숨소리로 천지가 소란스러웠는데, 지금은 또 다른 채비를 하고 있었다. 병아리 털처럼 보송보송한 산수유, 그 달빛 그림자 같은 꽃은 노을에 스러지듯 문득 종적을 감쳤다. ‘고딩’들의 담뱃불 같던 홍매는 한 줌 재처럼 꽃보라가 되어 시간 속으로 사라졌나?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러운 꼴은 보이지 않는다. 충신의 잘린 목처럼 송이채 떨어져 천지를 붉게 물들인다. 아마 지금 쯤 통영 장사도 바닷가에는 논개의 심장같이 붉디붉은 동백꽃이 숯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으리라. 그 애들을 바람이 데려갔을까, 흙이 데려갔을까. 차례대로 왔다가 차례대로 가버렸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지만 섭섭한 마음 없는바 아니다. 허나 어찌하랴. 자연의 섭리는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최영미 시인의 한탄처럼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었다. 이제는 가뭇없이 사라져간 꽃 진 자리에 돋은 신록이 산을 덮어간다. 어쩌다 신록 사이에 먼저 온 진달래가 나 여기 왔소, 하고 부끄러운 듯 손짓한다. 하기야 파릇파릇 새싹도 여간 싱그럽지 않다. 모든 어린 생명체(맹수의 새끼도)들이 그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 애잔한 느낌으로 만든 것은 험한 세상에서 보호 받게 하기위한 창조주의 배려라고 누군가 말했다. 계절 따라 자연은 화려하게 거듭 난다. 산도 그러하다. 아도니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의 손길 탓인가.
상리 공원으로 가는 길은 산 그림자가 이미 야금야금 먹어가고 있었다. 호젓한 길에 빨간 포르쇄 한 대가 공원 쪽 길 가에 서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운전석 창문이 열리며 희미하게 소유-정기고의‘썸(some)'이 들렸다.
내꺼 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 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
연인 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너
조금 후 운전석에서 가냘픈 여인의 팔이 쭉 뻗어 나왔다. 여인의 손가락에는 금방 불을 붙인 듯 타고 있는 긴 담배가 들려 있었다. 순간 그는 그 담배가 ‘팔말’이 틀림없다고 속단했다. 고등학교시절 팔말을 처음 피울 때 그 애가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자의 손목에는 투박한 팔찌가 여러 개 힘겹게 걸려있었다. 인디언 여인처럼. 담배를 쥔 그 손이 노래에 맞추어 까딱였다. 그 때마다 담뱃불이 흔들리며 홍매처럼 붉게 타올랐다. 그는 애써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정면을 주시하며 포르쇄를 스쳤다.
“하나 물어요.”
그 때 차 안에서 껄렁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성이었다.
“…?”
그는 걸음을 멈추고 차 안의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젊은 여자가 혼자 타고 있었다. 그녀는 분홍빛 머플러에 주걱 만 한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콧잔등에 주름을 한껏 잡으며 물었다.
“시마는 어디로 가죠?”
“가스나는…!”
선아였다. 그녀는‘터미네이트’시리즈 첫 편 마지막 장면에서 용광로 속에 잠기며 ‘쿨’하게 “돌아올 게(I’II be back)"라고 말했던T-800(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손가락으로 제스처를 쓰며“그저께 돌아 왔어요. 딱 100일 만에….”라고 말하곤 옆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언밸런스지게 유난히 도톰한 아랫입술이 반달을 그렸다.
그녀는 시마로 가지 않았다. 용산 지하도를 지나 그녀의 아파트로 향하며 말했다.
“외국에 나가보니 우리 술 만 한 게 없더라고요. 면세점에서 이강주를 조금 사왔어요. 콩고에 있는 내내 아빠하고 술 마시고 싶어 미칠 뻔 했어요. 꿈속에서도 마신 걸요. 멋진 장소가 문제 아니고 누구와 있느냐가 문제이듯 주류불문, 누구와 마시느냐가 내겐 중요해요. 아빠하고 마시면 술 맛이 업 되거든요. 이강주는 고종이 한미통상조약 당시 건배주로 쓰였다고 해요. 좋죠?”
그녀는 계속 쫑알거렸고 그는 그저 차창 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늘 익숙했던 풍경이 스냅사진 속 모습처럼 낯설면서도 비의가 담겨있었다. 그런 풍경이 그에게 말을 걸어 왔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고?
복도를 걸을 동안 대리석바닥에 부딪치는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분명하게 그의 심장 박동과 일치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맞은 편 액자 속의 체 게바라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그리고 게바라의 아포리즘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거실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건너편 벽에 걸린, 불거웃이 비칠 정도의 망사 팬티만 입은 여인의 엉덩이와 허리의 경계선에는 타투 한 나팔꽃이 아직도 기어오르고 있었고, 호리낭창한 여인의 허리에서는 금방이라도 함성 같은 나팔소리가 아프게 울려 퍼질 것 같았다.
그들은 주방의 체리 색 연꽃등 아래에 놓인 아일랜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식탁에는 만한전석은 아니더라도 이바돔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너비아니는 새로 토렴하여 내왔다. 그들은 술에 걸신 든 사람들처럼 자리에 안자말자 약속이나 한 듯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가 잔을 채우고 혀에 묻은 장난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건배를 제의했다.
“청바지! 됐나요?”
“됐다!”
그들은 와인잔을 부딪쳤다. 잔은 쨍! 하고 소리를 냈고, 잔에 담긴 맑은 노란색 이강주는 춤을 추었다. 그에게 이강주는 처음이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자 매콤하고 감칠맛이 났다. 꼴깍 삼켰다. 내려가며 식도를 훑었다. 생각보다 독했다.
“술꾼들 사이에선 ‘여름밤 초승달 같은 술’로 불려요. 25도. 쨍하죠? 그래도 첫 맛은 냉정한데, 입안에서 굴려보면 끝내는 자상해져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술이 그녀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훤히 보였다. 그녀는 빈 잔을 머리 위에 붓는 흉내를 내며 쫑알거렸다.
“비가 모래밭으로 스며들 듯 몸속으로 녹아내리네요. 술을 함께 마신다는 건 삶을 나누는 일이잖아요. 그렇죠?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너무 좋아요. 아빠는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좋은 때가 있었나요?”
물론이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몸과 마음이 녹아내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남의 말 하듯 했다.
“지나간 시간은 다 황홀한 거야.”
“좋아요. 그럼, 지금보다 더 좋은 시간이 오리라 기대하나요?”
“글쎄…?”
“다음을 기다리지 마세요. 다음은 남의 시간, 빼앗긴 들이니까요.” 그녀는 그를 핼끔 쏘아보고는 클러치백에서 팔말을 끄집어내며 물었다. “피워도 되죠?”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고였다. 그녀는 특이한 팔말의 빨간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론손라이터로 불을 붙여 볼이 옴팡 파지게 한 모금 빨았다. 그리곤 그를 보고 혀 없는 악마가 아니라는 듯, 티베트여인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웃었다. 그 사이로 담배연기가 흘러내렸다.
그는 담배를 끊은 지 거의 10년이 됐다. 담배를 피울 때는 남과 달리 항상 담배갑을 아래쪽에서 뜯었고, 담배를 물고 불을 켜지 않고 불을 켜고 난 다음 담배를 빼물었다. 항상 일탈을 꿈꾸던 그는, 그렇게라도 보통 사람들과 달리 어깃장을 놓아야만 속이 풀렸다. 콤플렉스의 또 다른 이름이었는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질 하기 싫어 마이너리티의 길을 택했다.
그녀는 뽁, 뽁, 뽁 담배 연기를 말아 도너츠처럼 계속 허공으로 날렸다. 담배 팔말은 ‘남자는 흘러간 로맨스 때문에 항상 사랑을 기억 한다’의 영문약자다. 그에게도 ‘팔말’에 대한 흘러간 추억이 있었다. 사춘기의 기억이 대개 그러하듯, 장마철 빨래처럼 눅눅하고 불편하지만 지나간 날들은 다 아름답고 그 시절의 뽕을 다시 맞고 싶다. 그는 빛바랜 추억을 꺼내 들고 회상에 잠겼다.
그 애는 깡블리(깡다구 있지만 ‘러블리’한 여자)로 안동여고 후렛빠면서 오타쿠였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고2 때부터 담배를 피운 내겐 담배셔틀이었다. 보통 담배 길이는 8․5cm지만 팔말이 10cm로 길어진 이유를 그 애가 말해 주었다.
‘미국의 담배제조회사 사장 딸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어. 그런데 이 남자는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거야. 안달이 난 아가씨는 아버지께 긴 담배를 만들어 보라 졸랐어. 덕분에 담배회사는 대박이 났고, 아가씨는 사랑하는 남자와 더 오래 있을 수 있었대. 내가 왜 아버지 한데서 팔말을 굳이 쌔비는지 알겠지?’
젊은이는 추억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고, 늙은이는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살아간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런데 그는 그 나이에 추억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친구가 캐릭터 ‘그’가 바로 ‘나’일 텐데 굳이 ‘그’로 표현 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는 또 다른 ‘나’라고 답했다.
첫댓글 도진 개진= 충청도 말투로 도찐 개찐, 50보 100보의 뜻
요즈음 충청도 정치인들 도찐개찐 그말이 그말(거짓말).
아!그래서 팔말이 10cm였구나.
촘촘하게 쓰여진 글이 전체로 볼때 버릴것 없는 한편의 시로 보인다. 지나간 세월이 다시 올 순 없지만 그세월이 있었다는 자체가 아름답고 버릴 수 없는 것 처럼 글을 읽으면서 지나간 또 다른 하늘 하나를 보았다.안나카레리나를 읽고 있다.자네의 묘사력은 비유와 표현이 대 문호에 못지 않아.친구 있음이 소중하고 자랑 스럽다.
아름다운 몽환적인 풍경같은 님의 작품!!.......
어째 좀 어려운것 같기도 하고 심비로운것도 같고요~
모든게 지나고보면 매순간순간이 참으로 소중하고도 의미있는 시간들이
추억으로 포개포개지는 것인지라요..
와인잔에 담긴 맑은노란색 이강주가 춤을추는 분위기를 연상 해 봄니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