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木浦の涙)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 이난영(李蘭影) 노래
1935년 초 『조선일보』에서 향토 노래 현상 모집을 실시했고, 거기서 당선된 가사에 곡을 붙여 9월 신보로 발매되었다.
1936년 일본에서는 「와카레노후나우타(別れの船歌)」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고 애상적인 멜로디는 일본인에게도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한다.
목포 유달산,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李蘭影 [본명이옥례(李玉禮)]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한국 대중음악계 불멸의 가수.
1916년 6월 6일에 목포에서 태어난(이러한 호적 기재와 달리 10월 22일생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난영이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 일본 오사카 극장에서 불러 갈채를 받았던 곡은 민요 '도라지타령'이었고,
1933년 가을에 발매된 첫 번째 음반에 수록된 '지나간 옛 꿈'은 경쾌한 재즈 느낌의 노래였다.
1934년에 제주 민요를 처음 음반에 녹음한 가수가 이난영이었고,
한국 재즈의 기념비적인 작품 '다방의 푸른 꿈'을 부른 가수도 이난영이었다.
1936년 동료들과 함께 일본 주요 도시 순회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이난영은,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예명으로 일본 대중가요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일본 순회공연중 황궁앞에서 1936년대 이난영( 岡蘭子 , 오카란코 좌측에서 네번째)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그가 일본에서 발표한 곡들 중에는 신민요 '아리랑'과 대표작 '목포의 눈물'의 번안곡,
그리고 당대 일본 최고의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와 함께 만든, ' 자작나무그늘아래 合歡の木蔭で' 등이 있다.
이난영은 1939년 이후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나로 일본은 물론 중국 각지의 무대까지 누볐고,
1963년에는 미국에서 활약 중이던 딸들과 조카, 즉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한국 가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일본, 중국, 미국 무대를 모두 밟아 본 이가 바로 이난영이었던 것이다.
1939년에 결성된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를 이끈 리더 또한 이난영이었다.
저고리시스터즈. 가운데가 이난영.
이난영은 16세 때에 제주도에서 삼천가극단의 순회 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가
노래실력을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다니게 됐다.
삼천가극단이 일본에서 순회 공연을 할 때 작사가인 강사랑이 이난영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오케레코드사의 사장인 이철에게 추천해서, 1932년에 문호월의 곡 <고적>을 처음으로 취입했다.
1934년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히트를 쳐서 가요계의 스타로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1936년, 20세에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다.
남편 김해송은 K.P.K악단을 이끌며,
'다방의 푸른 꿈'의 작곡자이자 당대 무대음악의 귀재로 '청춘계급'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선창'등을 만들었고,
'낙화유수'(남인수) '아주까리 등불'(최병호) '고향 설'(백년설) 등 많은 히트곡을 남긴 작곡가 이봉룡은 이난영의 오빠였고,
.
한국 전쟁때 남편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직접 운영했다.
이 시절, 동료가수였던 남인수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을 챙겨주고 아껴주는 남인수의 모습에 반해서 사실혼관계로 지낼 정도였지만, 남인수도 폐결핵으로 갑자기 죽게된다.
(1962년 5월 남인수가 45세를 일기로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난영이 간호해 주었다.
남인수와 전처 김은하의 이혼 사유가 이난영과의 불륜 때문이었다는데,
김은하는 이난영의 남편이었던 김해송의 불륜 상대였기도 했다.)
이후, 이난영은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여,
1965년 알코올과 아편 중독의 후유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향년49세).
미국에서 출세한 딸들은 미국사람과 결혼 ,잘살고 있으며,
큰아들은 남인수의 딸과 미국에서 장모 김은하를 모시고 잘 살고 있다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 지난 날을 회상하자니
가슴속 설운 눈물 어이 아니 고일 것일까 보냐~~~
🤔#목포의눈물 #이난영 #木浦の涙
1957년 이난영 목포의 눈물 육성 최초 공개
c
못 오는 님이라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서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첫댓글 목포의 눈물
원곡이
다르군요
역시나
유명한 가수는 다르군요
오늘도
즐거운
시간들
보내세요 ~^^
어느 다방에서
만날까요.
목포다방?
눈물다방........
1957년 이난영
목포의 눈물
과 사랑
75년전의 노래입니다.
그때의
사랑은 늘 애타고 눈물짓는 노래였나 봅니다.
전 유명한 항구는 못가보고 목포의
구도심에 딱 한번 가봤습니다.
손혜원이 막 사놓은 헌집들을...ㅎㅎ
목포의 눈물은 1934년도 노래이니
91년이나 된 노래입니다.
삼학도엔 낙지도 있고...
유달산 노적봉도 있고...
손헤원 이라니
설치는 설치류? ㅎ
불금입니다..
홀라당 태우소서 ~~~
발기찬 주말 보내세요
탈거라면
활활 타서
완전연소 재도 남지 말아야...
불금 뜨거우세요. ㅎ
저고리 시스터 넘 웃겨요
차라리 저고리 자매들이라 하지 ㅎ
해솔이 시스터즈...
핫바지 브라다스 ㅎ~
망키 췰드런 ㅎ~
치마 걸스 그룹빠 ~
작명은 듣기 좋고 부르기 좋고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애인 이름처럼...
이 난영씨의 노래 참 오랫만에 듣네요.
오늘 공부 많이 하셨네요.
옛날 문화를 끄집어 내 우리의 것으로
자리 잡게 하면 일부 문화의 획을
긋게 되겠죠. 요즘은 세계에서 한국의
문화를 알고 싶고 베우고 싶은 세계인들이
많을뿐 더러 그외 한국말을 배우는
국가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한국말을 무척 잘 하는 사름들이 많더군요
오히려 우리가 영어 배우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죠. 하지만 해외 나가려면
우리도 국제 공용어인 영어는 필히
해야겠죠. 얘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 갔네요.
별고을님 공부 열심히 하시어 좋은 것들
발굴해 올려 주시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기대해 보겠어요.
안녕히 ~~~
돈 안 되고
돈 안 나오는 짓거리에나
몰두해서야 어따 쓰갔슴메.
그냥
심심풀이 딱딱껌 씹는 맛이라도... ㅎ
숨은 뒷골목 야그들이
굴러다니는데
한 자락씩 들춰보는 자미랄까요.
기대까지는
하시지 말아주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