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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 명장의 몰락-충주 탄금대 전투(1592년 4월 28일)
제국의명장 추천 0 조회 4,672 11.07.20 02:02 댓글 1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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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7.20 16:32

    첫댓글 안타까운 역사군요.
    이 글을 통해 보니, 예전에 학교에서 배운 '적들이 짧은 막대기를 들고 싸우니, 우린 언덕 위에서 긴 막대기를 들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 고 하다가 패했다는건 말도 안되는 얘기같군요. 그런 얘긴 어디서 나온건지;;;
    그림은 무슨 게임 화면 같은데, 어떤 게임인가요?

  • 11.07.23 01:40

    엠파이어즈 돈 오브 더 모던월드(Empires; Dawn of the modern world)랑 라이즈 오브 네이션스(Rise of nations)입니다.

  • 11.07.20 17:03

    음......

  • 11.07.20 22:20


    그냥 예로,

    '기병들이 가장 발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 에서 싸웠다면 어땠을까용..

  • 11.07.21 01:14

    그래도 고니시군이 신립보다 쪽수가 많아요..

  • 11.07.21 01:22

    글죠....더 큰 피해는 줬을 지는 몰라도...수십년간 통일되지 못 해 주구장창 싸웠던 나라하고 200년 간 그리 큼직한
    전쟁(북방지역은 아니지만..)은 겪지 못 한 나라간의 전쟁인데요 ㅎㅎ;

    진짜 무슨 롬토의 버서커가 아닌 이상..........

  • 작성자 11.07.21 03:11

    Yunhan:막대기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창검이 일본군보다 짧았으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 인것 같습니다.
    부비트랩:??
    라티움:조선의 능욕을 더 보시길 원하십니까? 조선의 반격을 보시기 원하십니까?
    VOCALOID 時代:남한강 이남에서 새재 이북 사이에서 기병활용이 가능해보이는 곳은 수안보-단월역-충주목 일대인데 잔도 출구(단월역)로 빠져나오는 일본군을 기병으로 강습하여 밀어냈다면....,
    gksmf:고니시 군도 고니시 군이지만 고니시 군 뒤에 가토 군도 오고 있었습니다. 한 하루 정도 차이 났지요.(신립이 그것을 알았을진 모르겠지만.)

  • 11.07.21 04:30

    탄금대 전투같은 경우는 워낙에 많은 견해가 존재하는터라...신립의 무용은 누구도 폄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전술적 측면으로 따져본다면;;; 헌데 제승방략체제로 집결한 충청도 병력중 신립이 운용할 수 없었던 병력이 저렇게 많았다는건 처음보는 내용이네요...실제로는 저 병력이 참전을 했을 가능성도 생각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프로이스의 기록을 따져보았을때...(물론 참수한 조선군의 수가 8만이었다는것은 허구일지라도...)우리가 알고 있는 "8천의 조선군"보다는 참전병력이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 11.07.21 09:23

    일본측 기록으론 조선군이 자기들보다 숫자가 많고 자기들은 지쳤기때문에 움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측도 조선정예병으로 충주로 온걸 알고 있었습니다.

  • 11.07.21 04:32

    다른 내용의 글을 읽어보면 8천의 조선군중 기병이 4천을 되었을 것이나, 그중 신립이 정예로 육성했던 함경도 기병대 같은 궁기병은 소수였고 나머지는 겨우 말에 오른채 냉병기만 다루는 수준이었다는 글을 본 기억도 나고...사실 조선활의 사거리를 따져봐도 4천중 대부분이 궁기병이었다면 일본군에게 저렇게 처참하게 괴멸되었을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헌데 탄금대 전투때 고니시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는지요?

  • 11.07.21 07:41

    신립의 군사들이 약졸이었다거나 기병에 불리한지형이었다거나 하는건 그냥 사실을 축소시키려는 의견들 같습니다 조선최고의 정예군이 무참하게 깨지니 필요한 변명정도요

  • 11.07.21 07:46

    기병전에 자신있는 장수인데 최적의 장소를 골랐을거라 생각합니다 깨지니까 말이 많은거고 단지 본인이 기병전에 경험이 많다고 정면대결로 간걸 보면 장군보다는 돌격대장,선봉정도의 역할이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 11.07.21 10:56

    제국의명장// 아.... 김여물이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로다 싶어서 말입니다 ㅎㅎㅎ;;;

  • 작성자 11.07.21 11:32

    Balian de Ibelin:이 글에서 소개된 충청도 조선군 수는 탄금대 전투 직후인 1592년 5월에 조사된 병력 입니다. 그런데 저 병력이 투입되지 않았으니 충주병사 신익이 청주에서 병력을 모은 채 보내지 않았습니다.(당시 신익이 모은 군대 수가 얼마 였는지 왜 병력을 안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다른 도 지원군은 충주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립이 활용할 수 있는 충청도 조선군은 기껏해야 충주목 인근 병력 뿐이었고 전투 당일 김여물도 편지에 [8도에서 우리를 도와주러 오는 이 없다.]라고 한탄했습니다. 따라서 탄금대 전투 당시 병력은 8천~1만 정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작성자 11.07.21 11:44

    Balian de Ibelin:조선군 기병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가면서 창을 덜 쓰고 활을 많이 쓰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탄금대 전투 당시 일본군을 활로 공격할 수 있어도 일본군을 격파하려면 기병 돌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전력의 상당수였던 궁기병도 돌격해야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궁기병이 활쏘며 적 공격을 피하는 전술은 꽤 넓은 장소에서 해야하는데 이 전투 당시 일본군은 3면에서 포위하여 조선 궁기병의 기동성을 제한시켰습니다. 고니시 군의 피해는 전사자 500명이란 말이 있긴 한데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 작성자 11.07.21 11:55

    찰목합:최소한 신립의 군대는 상주 전투의 농민병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정예병도 아니었지요. 그리고 충주 일대 지형을 보면 넓은 평지에 논이 많긴 하지만 기병 운용이 불가능해보일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장과 군대를 운용하는 지휘관의 재량이 문제인데 확실히 신립이 북방에서 돌격장으로서 활약은 했으나 전략가로서 활약을 한 적은 없어서 대국적인 판단능력이 떨어진 듯 합니다.
    부비트랩:전쟁은 수많은 인재들을 희생시키지요. 신립이 패전지장이긴 했으나 살아서 다시 조선 기병을 지휘했다면 전공을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신립이 김여물의 말을 듣고 조령에서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작성자 11.07.24 14:00

    전황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본군은 조령 뿐만 아니라 추풍령(구로다 나가마사의 3번대)으로도 진격하고 있어서 신립이 조령을 막아도 일본군의 서울 진공을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가토의 2번대는 조령과 죽령을 선택해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령은 우회로가 있으니 이화령과 계립령(하늘재)가 그 루트 입니다. 고니시는 이미 황산잔도에서 좁은 길목을 막던 조선군을 우회하여 격파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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