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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후서 2:12-17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내용분해 : A. 마게도냐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과 당시의 심정을 회상함(12-13절)
1. 이 복음 전파를 위해 소아시아 서북단에 위치한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좋은 기회의 문이 열렸음 (12절)
2. 그러나 ‘눈물의 편지’ 를 가지고 고린도에 갔던
디도를 거기서 만나지 못함으로 심령이 편치 못하여
드로아를 떠나 마게도냐로 갔음 (13절)
B. 사도직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아는 기본 인식을 밝힘 (14-16절)
1.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승리의 행진을 하게 하시고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림 (14절)
2. 바울은 만인에게, 곧 구원될 자나 망할 자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인식하고 있음(15절)
3. 자신의 사역은 어떤 이들에게는 사망의 악취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작용함을 밝힘 (16절)
C. 오직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려는 자신의 기본 자세를 밝힘 (17절)
1. 바울 자신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가감. 왜곡하는 자가 아님 (17a절)
2. 오직 바울 자신은 하나님께 보냄받은 자로서 순전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전함 (17b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새 날을 허락해 주시고 우리에게 보낸자의 뜻을 밝히 알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보내신 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우리 다함께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데는 그 이유가 분명히 있음을 각성하고, 보내신 분의 뜻대로 행하는 행복한 보냄받은 자로써 사명을 마음껏 감당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아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고린도후서 2:12-17절 말씀으로 마게도냐 여정 회상 과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인식 및 기본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앞서 1:12- 2:11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한 오해와 공격의 빌미가 되었던 고린도 방문 계획 변경에 대해 해명 한 바 있습니다. 그에 이어 이제 2:12- 7:16에서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 곧 자신의 사도직 (Apostleship) 및 사도로서의 직무(Apostoli c Min istry) 수행에 대해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2-7:16은 다시 전반부 2:12-5:10과 후반부 5:11-7:16 으로 양분할 수 있는데, 후반부인 5:11-7:16 이 ‘화목게 하는 직책’으로서의 사도직의 본질적 목적 혹은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면, 여기서 다룰 2:12-5:10은 사도로서의 바울의 확고한 신분적 정체성 및 그 직무 수행의 정당성을 변론하고 있습니다.
문맥을 따라 본문의 내용을 개괄하자면, 2:12-3:18의 네 문단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확고한 신분적 정체성을 밝히고 있는 부분으로, 먼저 첫 문단인 2:12-17 은 마게도냐 여정 회상과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인식과 기본 자세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2:12, 13에서 바울은 자신이 마게도냐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회상하며 진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회상은 2:14-7:4까지 중단되었다가 7:5 에서 다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14-7:4까지는 바울이 본 서신을 쓴 마게도냐에 도착할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변호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첫 부분에서 자신은 사도의 직무를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인식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어 3:1-3은 바울이 본 서신의 수신자인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자신의 사도직을 입증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임을 주장한 내용입니다. 당시 팔레스틴으로부터 와서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와서는 그것을 사도의 신분을 입증하는 증거물인 것처럼 제시하였습니다(1절). 그런 한편 이러한 추천서가 없는 바울은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이러한 추천서가 필요 없는 인물이었고, 바울은 전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 고린도 성도들 자체가, 바울의 사도됨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편지 (a Letter from Christ)' 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어 바울은 3:4-18 의 두 문단에서는 옛 언약인 율법을 전달한 모세의 직분과 새 언약인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직분을 대조하며,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의 확신과 긍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모세의 직분 역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직분은 의문(橫文) 곧 율법의 직분으로서, 그리스도를 희미하게 계시할 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義)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밝히 제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직분은 인간의 죄성을 지적하여 자각하게 하는 직분으로서 본질적으로 정죄의 직분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3:7.9; 롬 3:20 ; 7:13). 반면 바울의 복음의 직분은 영의 직분 (the Ministry of the Spirit) 으로서, 복음을 듣는 자를 '의' 자체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의의 직분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모세의 직분과 자신의 직분을 비교 대조하는 것은, 모세에 비해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자신의 사역의 영광스러운 성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음과 그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은 자로서 확고 부동한 신분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표명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이 그들 가운데에서 수행한 복음 사역의 성격을 이해하도록 돕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사역은 아무것도 감추는 것이 없으며,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자는 진정한 자유와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17.18절).
이상의 네 문단이 바울의 사도로서의 신분적 정체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면, 4:1-5:10의 세 문단은 바울의 사도로서의 직무 수행 자세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먼저 4:1-6에서 바울은 자신이 진실하게 예수만을 증거하는 자세로 사도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불순한 동기와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스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어디를 가든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만을 전파하였으며, 오히려 자신은 예수를 위하여 성도들의 종이 된 것을 전파하였습니다(5절). 바울은 진실하고도 명백하게 자신의 마음속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곧 복음의 광채를 발하는 자세로 사역을 수행하였음을 밝힘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이 가리웠다면 멸망하는 자들에게 그런 것임을 경고 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어 4:7-15 에서 바울은 자신이 약함 속에서 고난을 무릅쓰고서 사도의 직무를 수행해 오고 있음을 밝히는데, 바울은 복음과 자신의 관계를 보배와 질그릇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실로 질그룻처럼 연약한 몸으로 숱한 고난과 수고를 감수하지만, 자기 속에 담겨 있는 보배로 인해 고난을 헤쳐올 수 있었으며, 장래에도 궁극적인 승리를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4:16-5:10 에서 바울은 자신이 장차 도래할 영원한 영광을 열망하는 자세로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사실 이 문단은 바울이 극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복음 사역에 충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바울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곧 장차 덧입게 될 부활의 몸 (the Body of the Resurrection) 을 사모하였습니다. 바울이 품고 있는 바, 영원한 영광에 대한 열망은 심지어 바울로 하여금 육의 몸을 떠나기를 원하게 만들 정도였습니다(5:8). 이 열망이 있었기에 바울은 비록 육신의 몸은 날로 쇠퇴하나 낙심하지 않았으며 (4:16), 이 땅에 거하는 동안 오로지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5:9).
이상에서 살펴본 바, 바울이 자기 직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분적 정체성과 그 직분을 수행하는 자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무에 대한 인식과 직무 수행의 자세는 서로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분적 정체성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군인은 군인으로서의 신분적 정체성을 가지고 군인으로 행동하며, 교사는 교사로서의 신분적 정체성을 가지고 교사로서 행동합니다. 복음 사역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사역자가 자기 직분에 대해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과 의의 직분으로서의 신분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사역자의 마음에는 세속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욕망이 자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질그릇 같은 약함 속에서도 그 속에 담긴 복음의 광채를 발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온갖 수고와 고난 중에 비록 육신은 날로 후패해져 간다 할지라도 영원한 영광에 대한 소망으로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4:5). 그는 자신의 양심이 떳떳이 증거하듯이, 복음의 진리를 바로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았습니다(3:17;4:2). 그러나 오늘 이 땅에는 예수님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불순한 목적과 동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드는 사역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속적인 욕심과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불순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마치 저잣거리의 싸구려 장사꾼들처럼 파는 자들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 혼돈스러운 현실 속에서, 복음 사역자의 한 사람으로 그저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복음을 맡은 주의 일꾼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달라고, 그리고 한국 교회의 강단을 새롭게 하여 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건, "신앙의 성숙은 주님의 필요성을 더 많이 인정해 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4절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본절을 보십시오. 여러가지 문제로 곤경에 처한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의 주체가 누구라고 합니까? 하나님입니다. 자신의 삶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는 지금 심리적으로 편치않은 상태이며, 영적으로도 침체기에 속해 있으면서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실 것이기에 감사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담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우리에게 주는 귀한 메시지가 됩니다. 그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자신이 하나님과 빈틈없이 완전히 밀착된 관계임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순간 순간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했던 일들 중에 자신이 선택한 일이 있고, 자신이 계획한 것이 있었다면 어려운 상황에서 회개하며 자신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자라면 우리의 중심을 아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회개보단 감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순간 순간에 주님의 필요성을 인식하며, 그분의 뜻을 구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는 성숙한 성도입니다. 그의 온 힘과 정성과 마음은 주님께 맞춰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알고 그렇게 생활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성도는 신앙이 성숙되길 원합니다. 과연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기도로 한 명을 낫게 하는 것보다 다섯 명을 낫게 하는 것이 성숙한 것입니까? 방언하는 것이 성숙의 기준이 됩니까? 성경을 읽은 횟수가 성숙의 절대적 기준이 됩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성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외형적인 삶이지, 성숙을 나타내는 척도가 아닙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의 성숙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얼마나 의존하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앞에서 인간 자신의 작음을 인정하고, 순간 순간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가 바로 성숙한 자입니다. 즉 모든 순간에 주님의 필요성을 인식하며, '주님, 제게 주님이 필요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가 성숙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공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으며, 실패해도 낙담하지 않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한국 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성숙에 대하여 이러한 교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생활이야 어떻게 됐든 교회만 잘 출석하면 성숙한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기도만 오래하면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적 열심은 성숙의 기준이 아닙니다. 성숙한 성도는 주님의 필요성을 더 많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태도가 주님께 고착된 정도가 곧 성숙의 정도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며, 주님께 무릎 꿇는 자가 성숙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던 것을 버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성숙한 자입니다. 때문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에 나와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목이 굳은 사람은 결코 성숙한 자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겸손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신앙이 성숙되어 감을 나타내는데 전심 전력하길 다 함께 소원 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냄받은 자로 사용하시길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두란노아카데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