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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운주필(唱韻走筆)
운자를 부르는 대로 빠르게 시를 짓다.
唱 : 부를 창(口/8)
韻 : 운 운(音/10)
走 : 달릴 주(走/0)
筆 : 붓 필(竹/6)
필체가 날아가는 듯하다고 하면 빨리 쓰면서도 잘 쓴 글씨를 말한다. 단순히 속필(速筆)이라면 잘 쓰기보다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다. 붓이 달리는 듯하다는 주필(走筆)은 글씨를 흘려서 빨리 쓴다는 뜻도 있지만 시를 빨리 짓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시작에서 동일한 위치에 규칙적으로 같거나 비슷한 음조의 글자를 사용하는 것이 운(韻)이다. 운자를 부르게 하고(唱韻) 곧바로 시를 짓는다(走筆)는 이 말은 옛날 양반들의 시회에서 유희로 곧잘 행해졌다고 한다.
조선의 방랑시인 김립(金笠; 김삿갓)이 가진 것 없이 팔도를 유람하면서 이 실력으로 잘 대접 받았다니 타고난 재주였다.
이보다 훨씬 앞서 고려 중기의 문신 이규보(李奎報)를 두고선 주필을 말할 수 없다. 60년간 이어진 최충헌(崔忠獻) 등의 무신정권에 협조했다는 평도 있으나 다양한 방면에 명문을 많이 남긴 시호(詩豪)로도 이름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과 걸음이 빠르고 시를 잘 짓는다하여 '삼첩(三捷)'이란 별명을 얻었고, 성장해서 문단에서는 唐(당)의 이백(李白) 만큼 시를 빨리 잘 쓴다고 '주필(走筆) 이당백(李唐白)'으로 불릴 정도였다.
시와 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자칭했던 이규보는 문신 진화(陳澕)와 함께 '이정언(李正言) 진한림(陳翰林) 쌍운주필(雙韻走筆)'이란 기록까지 남게 됐다. 정언과 한림이란 벼슬 이름을 땄다.
이런 찬사가 정작 본인에겐 못마땅해서 '논주필사략언(論走筆事略言)'이란 글에서 깎아내린다. "창운주필이란 것은 사람을 시켜서 운자를 부르게 하고는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시를 지어내는 것(夫唱韻走筆者 使人唱其韻而賦之 不容一瞥者也/ 夫唱韻走筆者)"인데 술자리에서 한 때의 즐거움으로 했던 것이라 했다.
술 취한 중에 지어 알아보지 못하는 글자도 있고, 뜻도 통하지 않아 수준이 떨어진다며 시가의 죄인이라 자책한다. 점차 구경거리로 되어 가소롭기까지 한데 높은 사람들이 이런 재주를 찬미하자 후진 중에서도 잇따라 나왔다며 자신은 취중에 지은 작품을 많이 없앤다고 했다.
이규보는 자신의 재주를 낮췄지만 그의 명문은 많이 남았다. 이 난에 소개했던 성어 슬견외경(蝨犬畏敬)은 해충이나 개의 목숨도 다 같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햇곡식을 수확하는 농부를 찬미하는 시는 더욱 좋다. "한알 한알을 어찌 가볍게 여기겠나, 사람의 생사와 빈부가 달렸다네(一粒一粒安可輕 係人生死與富貧)"하며 농부를 부처처럼 생각한다는 신곡행(新穀行)이다.
상대방의 말에 즉각 멋지게 잘 대응하는 사람은 부럽다. 이런 능력도 정치판에서 주고받는 막말 공박이 되면 피곤하기만 하다.
임기응변으로 순간의 재치를 겨루는 쌍운주필(雙韻走筆), 창운주필(唱韻走筆)의 행태에 대해
"기실 시가(詩家)의 죄악이다."
투철한 현실인식에 근거해 심장과 간을 깎아 그 즙으로 시를 짜낸 민족시인
이규보는 고려무신집권기를 살았던 시인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연구 초기에는 상반되는 양면으로 받아들여졌다.
대체로 최씨 정권에 아부한 문객이라는 평과 진취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의 면으로 받아들여지다가 이우성, 조동일, 김시업 교수 등에 의해 그의 일대기와 시론, 시 등이 본격적으로 연구되는 동시에 번역되어 조명됨으로써, 현재 이규보의 문학사적 가치는 진취적이고 양심적인 민족시인으로서 평가하는 데 이론이 없는 것으로 안다.
歲儉民幾死(세검민기사) : 흉년 들어 백성들은 죽을 지경
唯殘骨與皮(유잔골여피) : 뼈와 살갗만 남았는데
身中餘其肉(신중여기육) : 몸에 조금 있는 살점 그마저도
屠割欲無遺(도할욕무육) : 남김없이 베고 찢고자 하누나
君看飮河鼴(군간음하언) : 그대는, 물 마시는 두더지가
不過滿其復(불과만기복) : 얼마 못 먹어 그 배가 부르는 걸 보았을진대
問汝將幾口(문여장기구) : 묻노라 네놈은 주둥이가 몇이나 되어
貪喫蒼生肉(탐끽창생육) : 백성들의 살점을 먹으려 탐하였느냐
문군수수인이장피죄이수(聞郡守數人以贓被罪二首) : 군수 몇이 뇌물을 받아 죄를 범한 것을 듣고 지은 시 2수)
위의 오언시 두 수는 1978년 김시업 교수의 논문 '이규보의 현실 인식과 농민시'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조명되었다.
김시업 교수의 이 논문을 기점으로 한국 한시의 사실주의(현실주의, 리얼리즘)는 유럽문학의 리얼리즘론의 시각에서 탈피하여 그 이론과 작품 미학을 논의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후 한국 한시의 사대부 리얼리즘론(현실주의론)으로 정립되어 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규보는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뿐만 아니라 시의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도 완벽을 추구하던 시인이었다.
만약 앞의 시구에 문제가 있으면 뒤의 시구로써 이를 해결하고, 단 한 자의 시어로 구 전체를 안정시킬 수 있으니 시를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를 사려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或有以後句救前句之弊 以一字助一句之安 此不可不思也).
현재 우리가 이규보의 시와 시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규보는 '심장과 간을 깎아 그 즙으로 시를 써 내려간' 진정한 예술인으로 평가하고 싶기 때문이다.
문학은 도를 싣는 그릇이라는 성리학적 문학관 이전의 예술가로서, 그는 유학자이자 경세가였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벽(詩癖)
年已涉縱心(년이섭종심) :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으며
位亦登台司(위역등태사) : 지위 또한 삼공(三公)에 올랐으니
始可放雕篆(시가방조전) : 이제는 시 쓰기를 버릴 만도 하건만
胡爲不能辭(호위불능사) : 어찌하여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가
朝吟類蜻蛚(조음류청솔) :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노래하고
暮嘯如鳶鴟(모소여연치) : 밤에는 올빼미처럼 읊노라
無奈有魔者(무내유마자) : 떼어버릴 수 없는 시마(詩魔)가 있어
夙夜潛相隨(숙야잠상수) : 새벽부터 밤까지 몰래 따르고는
一着不暫捨(일착불잠사) : 한번 몸에 붙자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使我至於斯(사아지어사) :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네
日日剝心肝(일일박심간) : 나날이 심간(心肝)을 깎아서
汁出幾篇詩(즙출기편시) : 몇 편의 시를 짜내니
滋膏與脂液(자고여지액) : 기름기와 진액이
不復留膚肌(불복류부기) : 다시는 몸에 남아있지 않네
骨立苦吟哦(골립고음아) : 앙상한 뼈에 괴롭게 읊조리는
此狀良可嗤(차상식가치) : 내 이 모습 참으로 우습구나
亦無驚人語(역무경인어) : 남을 놀라게 할 문장으로
足爲千載貽(족위천재이) : 천년 뒤에 물려줄 만한 시 못 지었으니
撫掌自大笑(무당자대소) : 스스로 손뼉 치며 크게 웃다가
笑罷復吟之(소파부음지) : 문득 웃음 멈추고는 다시 읊는다
生死必由是(생사필유시) : 살거나 죽거나 오직 시를 짓는
此病醫難醫(차병의난의) : 내 이 병의원도 고치기 어려우리
시마(詩魔) : 몸에 달라붙어 시를 쓰게 만드는 귀신! 이규보는 자신이 시마에 시달려 "밤이나 낮이나 심장과 간을 깎아서/ 그 즙으로 몇 편의 시를 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이/다시는 몸에 남아 있지 않네"라고 한다.
범인의 시각으로 볼 때 그에게 부러웠던 것은 과연 무엇이랴! 당대 최고 학자이자 문인으로 추앙받는 동시에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그에게 과연 무엇이 부족하여 심장과 간을 깎아 그 즙으로 몇 편의 시를 짜내고 있다 하는가?
안락에 잠겨 시를 잊고 지냈던 필자의 늘어진 정신을 후려치는 가르침이다.
붓을 달려 시를 쓰던 젊은 날을 반성하다
한림이란 문과급제자 출신으로 임금의 명을 받아 문서와 조칙, 역사편찬 등을 맡아보던 문신(文臣)이다.
한림의 '한(翰)'은 '날개, 문서, 글월'이란 의미인데, 문과급제자가 '한림원(예문관, 홍문관)'에 배속되어 한림학사가 된다는 것은 과거에 합격한 선비로서는 최고의 영광인바, 임금의 명을 직접 받고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고 문장으로써 임금을 보필하는 외에도 한림원에 배속되었다는 것 자체가 공식적으로 당대 최고의 젊은 학자이자 문장가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포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의 주인공 유연수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된다. 그래서 유연수를 '유 한림'이라 칭한다. 나중에 벼슬이 높아져도 성씨에 한림을 붙여 '유 한림'과 같이 불러주던 것은 '한림학사' 출신을 높이고 공경하던 문치(文治)의 풍습 때문이다.
고려 한림원의 여러 선비가 공동으로 창작했다는 '한림별곡' 제1장의 둘째 구에,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이라는 시구가 나온다. 이정언(李正言)은 이규보이다.
이규보 역시 한림원 출신이지만, 正言 벼슬로 명성을 떨쳤으므로 당대 사람들이 '이정언'이라 불렀던 것이다. 正言은 조정의 잘못을 바른 마음과 말로 바로 잡아 간쟁을 벌이는 간관(諫官)을 이른다.
현재 대한민국 청와대에는 이런 '정언(간관)'이 있는가? 외날도끼와 양날도끼를 들고 "이 목을 치십시오!" 하며, 오로지 정의 앞에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고 간쟁할 수 있는 간관의 제도가 있냐는 말이다.
행정부 안에 없으니, 정당인 여당에라도 있어야 할 것이며, 야당은 이 역할을 맡아 간쟁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이며, 대통령은 여당과 야당의 토론을 통하여 수립되는 정론을 받아들여 인정(仁政)을 펼쳐야 할 것이며, 수시로 야당과 만나 그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편 '진한림'은 한림학사로 명성을 떨쳤던 고려 시인 진화(陳澕)를 이른다. 한림원의 여러 선비들이 공동으로 창작하여 이들과 이들 출신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애창되었던 '한림별곡'은 일종의 '한림원 또는 한림원 출신들의 단결가'(이 전통은 조선의 예문관, 홍문관의 600년 전통으로 이어진다.) 역할을 해왔다.
왕은 한림학사가 새로 배속되면 직접 술잔, 술, 고기 안주를 내려 마음껏 마시고 즐기라 하였다 한다. 조선 태종실록, 세종실록, 성종실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공식적인 노래에 이규보와 진화가 제1장의 둘째 구에 나란히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로 등장한다는 것은 이들이 당대의 선비와 문신들로부터 얼마나 존경을 받던 시인들이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필(走筆)'의 문자대로의 뜻은 '달리는 붓'이다. 붓이 달려가듯이 운자를 부르면 운자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써 내려가는 한시의 작법을 주필이라고 한다.
이정언(李正言) 진한림(陳翰林) 쌍운주필(雙韻走筆)은 실제 역사서(고려사절요, 고종 안효대왕조)에 정언 이규보와 직한림 진화가 40여 운의 시를 즉흥적으로 지어 서로 실력을 겨루었다는 사실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규보와 진화가 운자를 부르면 부르는 대로 40운이고 100운이고 막힘없이 붓을 달려 척척 시를 얼마든지 길게 이어서 바로바로 지어냈다는 것은 일종의 유희로 이를 예술의 본령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규보와 더불어 주필에 쌍벽을 겨뤘던 고려후기 시인 진화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규보와 시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다는 사실을 통해 서로 엇비슷한 연배였을 것으로 추단할 따름이다.
진화의 한시 하나를 살펴보자.
야보(夜步; 저녁 무렵 강가를 걷다)
小梅零落柳僛垂(소매영락유기지) : 매화 붉은 꽃잎 고요히 지고 버들가지 나려 춤추고
閑踏靑嵐步步遲(한답청람보보지) : 파아란 이내 속을 뜻없이 밟으며 느릿느릿 걸어갔네
漁店閉門人語少(어점폐문인어소) : 어부의 주막은 문을 걸어 사람들 소리 고즈넉한데
一江春雨碧絲絲(일강춘우벽사사) : 봄비는 나려 버들가지 줄줄이 온 강이 쪽빛이네
'시는 곧 그 사람이다'는 우리 시학의 입장에서는 '야보' 속 인물은 진화 자신일진대, 무슨 일로 그는 저녁 무렵 버드나무 줄줄이 늘어선 강가를 걸었을까?
'소매(小梅)'를 붉은 매화로 볼 때, 물이 올라 연두 빛이 오르는 버드나무 늘어선 강가에 매화는 붉게 지고 잔풍 불어 꽃잎 날려 떨어지는 강가를 그 꽃잎을 밟으며 그는 강가를 느릿느릿 걷는다.
강물의 물안개는 모락모락 피어올라 퍼져가니 물오른 버드나무의 푸른 빛깔과 어둠이 내리는 저녁빛깔에 섞여 그 흰빛이 푸르게 번진다.
진화는 이를 "한답청람보보지(閑踏靑嵐步步遲) : 파아란 이내 속을 뜻없이 밟으며 느릿느릿 걸어갔네" 라고 했다.
그렇게 무심히 걷던 중 강가의 어부가 경영하는 주막의 불빛이 눈에 온다. 살아 펄떡이는 쏘가리나 잉어를 싱싱하게 회를 쳐서 탁주라도 한 잔하며 세상사를 듣고 싶었을 터인데, 그만 문이 닫혀 버렸으니 그 안의 두엇 나그네의 말소리는 희미하게 들려올 뿐.
눈을 돌려 강가를 보니 어느 새 봄비는 가느다랗게 점이점이 나리고 줄줄이 늘어서 날리는 버들가지 사이사이 저녁 봄 강과 강변 전체는 점점 푸르러져 온통 옅은 쪽빛으로 물이 든다.
漁店閉門人語少(어점폐문인어소)
어부의 주막은 문을 걸어 사람들 소리 고즈넉한데
一江春雨碧絲絲(일강춘우벽사사)
봄비는 나려 버들가지 줄줄이 온 강이 쪽빛이네
한 20년 전쯤인가, 시인 최영미가 그랬다. 박남준이 시집 '풀여치의 노래'를 냈을 때 그 시의 몇 구절을 훔쳐가고 싶었다고. 나는 진화의 '야보' 두 구, "漁店閉門人語少(어점폐문인어소), 一江春雨碧絲絲(일강춘우벽사사)"를 도둑질해 가고 싶다.
세 번 네 번,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고 다시 속으로 소리 죽여 읽고 또 읽어도 맛있기만 하여 질리지 않는다. 자꾸만 새로운 맛이 난다.
당대 왕 위의 왕이라 할 수 있었던 최충헌이 운자를 불러 주면 40운이든 100운이든 주필을 자랑하며 이규보와 겨뤄 써내던 시가 어찌 그의 예술적 본령일 수 있었겠는가?
이규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필을 자랑하던 젊은 시절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늙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스스로 주필을 자찬하며 마구 갈겨대는 현재 노추(老醜)의 시를 볼 때 차라리 지난시절 사춘기 소년의 둔하고 서툰, 묵은 연애편지를 읽고 싶은 심정이다."
회천(懷川) 김시업 선생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를 인용하면, 이규보는 젊은 날 술에 취해 사람들에게 운자를 부르게 하고 즉석에서 운을 받아 재주를 자랑하던 창운주필(唱韻走筆)의 행태에 대해 "기실 시가(詩家)의 죄악이다"고 반성했다 한다.
처음에는 구구한 이런 짓(창운주필)을 세상에 알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도리어 권문귀족들에게 알려진 바가 되어 그들이 모두 나를 맞아 술자리를 베풀고 지어보기를 권하여 간혹 부득이한 경우에는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광대의 유희나 잡기와 같이 되어서 간혹 구경꾼들이 담장처럼 둘러서기도 하였으니 더욱 가소로운 일이었다.
이규보 '주필을 일삼았던 것에 대해 논하는 말(論走筆事略言)'
이규보의 시 '영중중월(詠井中月; 우물 속의 달을 읊다)'을 감상해 보고 가자.
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 스님이 달빛에 욕심이 생겨
井汲一甁中(정급일병중) : 물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 절간에 와서야 알았다네
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 물병이 기울면 달도 또한 공(空)이라는 것을
이규보의 '영중중월'은 법정 스님이 애송하였다 한다. 무소유를 실천하고 가신 스님, 산 속에서 지낼 때 물을 긷던 옹달샘을 '급월정(汲月井)'이라 불렀다 한다.
이규보는 자신의 시가 천 년 뒤에도 남아 애송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그의 원대로 이루어졌다 하겠다. 어찌 시재(詩才)만을 밑천 삼아 붓을 달려 가능했을까?
시를 쓰고 난 뒤 고치고 다시 고치던 그의 퇴고에 대한 자세와 방법에 알아보자.
자기 시를 반복해서 보고 고쳐라
중국 동진(東晋)의 서예가 휘지(徽之)는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 아들이다.
왕휘지는 대나무를 군자(君子)로 높여 차군(此君)이라 하고, "何可一日無此君邪(하가일일무차군야) : 이 분께서 계시지 않다면 어찌 하루인들 살 수 있으랴"라 했다 한다.
그 외에 대나무는 죽존자(竹尊子), 관자허(管子虛) 등으로 존칭되었다. 이와 같이 한, 중, 일 동아시아의 문사들은 대나무를 높여 시와 그림을 남긴바, 이규보(李奎報)는
此君爭肯入毫輕(차군쟁긍입호경)
대나무가 어찌 쉽게 붓으로 표현되겠는가?
必待通身作竹莖(필대통신작중경)
반드시 온몸이 대가 되기를 기다려야 하리
- 次韻丁秘監寫墨竹四榦(차운정비감사묵죽사간) : 정 비감의 ‘사묵죽사간’에 차운하여
라고 하여, 그림 그리는 이나 시를 쓰는 이가 대나무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의 온몸이 대나무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이중섭(李仲燮)은 닭을 그리기 위해 닭을 데리고 놀다가 함께 잠을 자고 일어나 함께 밥을 먹고 다시 놀다 자는 행위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는 닭을 잡아먹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미적 대상과 미적 창조자가 온몸이 서로 관통될 때 미가 창조된다는 것인데, 이를 이규보의 시구에서 개념을 끌어와 '통신(通身)'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대통신 : 대상과 온몸이 관통되어 스스로 대상과 구분이 되지 않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기다림이 없이 짓거나 꾸며진 시화(詩畵)가 어찌 참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이규보의 미적 자성은 현대 문단에는 공허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미적 대상에 감응하기 위하여 정신과 몸을 닦아내는 데 힘쓰기보다 휘황하지 않으면 기이한 색채로 덧칠하는 데 힘을 쓰는 풍토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규보 당대에도 휘황하거나 기이한 색채로 덧칠하듯 언어의 형식미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풍토가 있었고, 이규보는 이에 대해 일갈한다.
夫詩以意爲主(부시이의위주)
시는 의상(意想)을 본질로 삼는 것이므로
設意尤難 綴辭次之(설의우난 철사차지)
의상을 펴나가는 어려움이 1차적이고, 수사(修辭)를 펴 나가는 것은 2차적이다.
의상(意想) 또는 의상(意象)을 펴나감이 시인에게 1차적 어려움이 되는 것은 '필대통신 (대상과 온몸이 관통되어 스스로 대상과 구분이 되지 않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기다림)'의 과정이 있고 난 뒤에야 시가 써지기 때문이다.
이규보는 이 '통신'의 과정에서 겪는 시인의 고통을,
日月剝心肝(일월박심간)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심장과 간이 벗겨지고 깎여져
汁出幾篇詩(즙출기편시)
심간(心肝)에서 흘러나오는 육즙(肉汁), 몇 편 시로 나오네
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규보는,
蓋雕鏤其文(개조루기문)
시어를 다듬고 아름답게 무늬를 새긴 시문은
丹靑其句 信麗矣(단청기구 신려의)
구절구절이 붉고 푸르른 무늬가 아롱져 아름답다 할 만하다.
然中無含蓄深厚之意(연중무함축심후지의)
그러나 그 가운데 깊고 도타운 의상이 함축되어 있지 않다면
則初若可翫(칙초약가완)
처음에는 보고 즐길 만하나,
至再嚼則味已窮矣(지재작칙미이궁의)
재차 읽어 곱씹어 봄에 이르러 이미 그 시의 맛은 끝나고 말 것임이리라."
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이규보는 '필대통신'의 과정을 통해 '의상'이 이루어졌다면 시의 형식과 표현 등은 무시하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의상의 가치를 1차적이라고 강조한다고 하여 어찌 2차적 형식과 수사를 무시한다 할 수 있으랴!
이규보는 시문의 형식과 표현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역설하였다. 그런 후에도 흠결이나 실수를 찾지 못하게 되어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凡詩成(범시성)
무릇 시가 이루어지면
反覆視之(반복시지)
반복해서 보아야 한다.
略不以己之所著觀之(약불이기지소저관지)
자기가 지은 것으로 보지 말고
如見他人及平生深嫉者之詩(여견타인급평생심질자지시)
다른 사람이나 평생 미워하는 사람의 시로 보아
好覔其疵失(호멱기자실)
그 허물을 열심히 찾아도
猶不知之(유부지지)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方可行之也(방가행지야)
허물을 없앤 뒤에야 그 시를 세상에 내놓는다.
위에서 확인했듯 "자기가 지은 시를 평생 미워하는 사람의 흠결과 실수를 찾아내듯 반복해서 살피고 살펴 도저히 결점을 찾을 수 없을 때 세상에 내 놓으라"고 퇴고를 강조한 이규보!
사람을 경천동지하게 할 말로 천년 뒤까지 미칠 시를 써야
亦無驚人語(역무경인어)
사람들을 경천동지케 할 말로
足爲千載貽(족위천재이)
천년 뒤까지 끼칠 시를 못 이루었으니
撫掌自大笑(무장자대소)
스스로 손뼉 치며 크게 웃다가
笑罷復吟之(소파복음지)
웃음 다한 후 괴로이 다시 읊는다
- '시벽(詩癖)'이라는 자신의 시 쓰는 '벽'을 고백한 이규보!
오랜 체험과 관찰 속에서 대상과 몸이 관통하면서 섬광처럼 상(象)이 오는 실감(實感) 그것이 아니라, 진정이 아닌 것을 진정인 양 거짓으로 꾸며대는 관념의 '날조(捏造)'로써 스스로 천재인 양 자랑하는 시작의 경향을 김수영(金洙暎)은 '사기'라고 했다.
자신의 시 전편을 통틀어 '사기'인 시는 단 한 편도 없다고 과연 김수영 스스로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겠는가 마는, 천 년이 흐른 뒤에도 김수영 시인이 과연 이규보만큼 우리 시문학사에 존재할 수 있으려는지 의문이다.
김수영(金洙暎)은 단명했지만 70살을 넘겨서도 자신의 시작 태도를 반성하는 이규보와 같은 철저함이 있었다고 말하기에 회의적이라는 말이다.
김수영은 자신에 대해 솔직했다기보다 자학적이리만큼 자아 반성을 노출해 냄으로써 실상 자아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에게 가장 가까웠던 박인환(朴寅煥)이 죽고 난 뒤에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자기 입지를 세웠던 김수영의 비열성을 볼 때 나는 김수영의 정직성에 대해 끝내 회의하게 된다.
一粒一粒安可輕(일립일립안가경)
한 톨 한 톨을 어찌 가벼이 여길 건가
係人生死與富貧(계인생사여부빈)
생사, 빈부가 여기에 달렸는데
我敬農夫與敬佛(아경농부여경불)
나는 부처님처럼 농부를 공경하노니
佛猶難活已飢人(불유난활이기인)
부처님도 못 살리는 굶주린 사람 농부만은 살리네
- 이규보, ‘신곡행(新穀行)’ 부분
부처님도 못 살리는 굶주린 사람을 농부가 살리니, 쌀 한 톨 한 톨에서 부처님과 같은 자비로움을 생각하면서 농부를 부처님처럼 공경한다던 이규보의 시를 읽으며, '시에서 자아 성찰과 세계 지향성의 진정한 통합은 과연 무엇인가' 새삼 생각을 키우게 된다.
일흔 살이 넘어서, 이규보는 자신의 시가 천년 뒤에도 사람에게 놀랄 만한 감동과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는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한편 그는,
純用淸苦爲體(순용청고위체)
순전히 청고(淸苦, 맑고 꾸임이 없음)한 체(體)는
山人之格也(산인지격야)
산인(山人)이 쓰는 시의 격(格)이요,
全以姸麗裝篇(전이연려장편)
순전히 화려한 말로 시편을 장식하면
宮掖之格也(궁액지격야)
궁궐의 시인이 쓰는 시의 격이다.
惟能雜用(유능잡용)
능히 섞어 제대로 쓸 수 있는
淸警雄豪姸麗平淡(청경웅호연려평담)
청경(淸警; 지극히 맑아 타인과 자아를 스스로 살피도록 함), 웅호(雄豪; 웅장하고 씩씩함), 연려(姸麗; 곱고 섬세하며 아리따움), 평담(平淡; 꾸밈이 없어 소박하며 맑음)을
然後備矣(연후비의)
연후에야,
而人不能以一體名之也(이인부능이일체명지야)
사람들이 '하나의 체(一體)'로 이름 짓지 못하리라.
- 論詩中微旨略言(논시증미지약언) 중에서
시의 다종다양한 심미적 형식과 범주를 달통한 후 이를 섞어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는 시의 기량을 익힌 후에야 사람들이 어떤 한 형식이나 문체로 규정짓지 못할 그 시인만의 독창적이며 두텁고 깊은 심미적 형식을 갖출 수 있다고 하였다.
牡丹含露眞珠顆(모란함로진주과) : 알알이 이슬 머금은 모란꽃 진주 같은데
美人折得窓前過(미인절득창전과) : 아리따운 신부 모란을 꺾어 신랑 방을 지나다
含笑問檀郞(함소문단랑) : 미소를 머금고 신랑에게 묻기를
花强妾貌强 (화강첩모강) : 꽃이 예쁜가요? 제가 예쁜가요?
檀郞故相戱(단랑고상희) : 신랑이 짐짓 서로 장난치고자
强道花枝好(강도화지호) :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美人妬花勝(미인투화승) : 아리따운 신부는 꽃이 예쁘다는 말에 질투가 나서
踏破花枝道(답파화지도) : 꽃가지 밟아 짓뭉개고 말하기를
花若勝於妾(화약승어첩) : 꽃이 저보다 예쁘시거든
今宵花同宿(금소화동숙) : 오늘밤은 꽃과 함께 주무시구려
- 이규보, '절화행(折花行)' 전문
위 시는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인가? 서양 서정시의 역사는 워낙 짧은지라 서양의 서정시 장르론에 입각할 때 위 시는 그들의 시각에서는 서정시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일천한 역사일 뿐, 우리는 그렇지 않다.
청경(淸警; 지극히 맑아 타인과 자아를 스스로 살피도록 함), 웅호(雄豪; 웅장하고 씩씩함), 연려(姸麗; 곱고 섬세하며 아리따움), 평담(平淡; 꾸밈이 없어 소박하며 맑음) 등의 심미적 의식과 같이 동아시아 서정시의 형식은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하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시의 잡풀을 제거해야
70살을 넘겨서도 시마(詩魔)에 시달리면서 자아와 세계에 심장과 간이 상하도록 온몸을 관통시켜 그 녹아내리는 즙으로 천년 뒤에도 미칠 시를 쓰고자 했던 동방의 규성(奎星) 이규보.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 중 '논시중미지약언'에서 논해진 '시유구불의체(시에는 마땅하지 않은 아홉 가지 체가 있다)'에 대해 소략하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의 뜻은 시의 중심에서 은밀하고 섬세하게 작동하는 깊고 오묘한 핵심을 논하는 간략한 말이다.
미지(微旨)의 사전적 의미는 깊고 오묘한 뜻이다. '미(微)'는 작다, 어둡다, 은밀하다, 섬세하다, 비밀스럽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지(旨)'는 뜻, 아름답다, 마루(산이나 등성이의 높은 중심) 등의 의미를 지닌 문자이다.
'시중미지(詩中微旨)'는 시라는 장르의 특성 가운데 작동하며 시인의 기(氣)와 예(藝)가 발현되어 생동하면서 시 장르 특성을 보존하면서 혁신해가는 오묘하고 섬세한 요소들의 총합과 그것 각자의 은밀한 구조적 핵심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규보의 '논시중미지약언' 중 '구불의체론(九不宜體論)'은 시를 창작하고 퇴고하는 데 피해야 할 아홉 가지 체(體)이다. 다시 말해 시에서 마땅하지 않은 아홉 가지 체가 구불의체이다
1.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
2.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
3.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
4. 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
5.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
6.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
7. 촌부회담체(村夫會談體)
8. 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
9. 낭유만전체(莨莠滿田體) : 쓸모없는 잡풀들이 시어를 가득 덮었는데 이를 뽑거나 깎아내지 않은 것
이규보가 논한 '구불의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일찍이 소개된바, 나는 이 중에서 우선 '낭유만전체'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詞荒不刪(사황부산) 是莨莠滿田體也(시랑유만전체야) - 이규보, ‘논시중미지약언’ 부분
'사황(詞荒)'의 '사(詞)'는 노랫말로 시어를 뜻한다. '황(荒)'은 거칠다는 뜻이며 잡풀로 덮여있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의 맥락을 따지면 '황(荒)'은 곡식 심은 밭을 가득 덮은, 곡식 같지만 곡식 아닌 강아지풀 즉 낭유이다. 따라서 '사황(詞荒)'은 시어가 거칠다는 뜻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
'사황'은 시의 참뜻을 해치는 불필요한 수식어, 시의 율동을 망치는 거친 시어, 본래의 의상(意象)을 가로막는 장식적 시어이다.
시를 쓰고 나서 잡초같이 쓸데없는 말들을 가리어 뽑고 깎기를 반복하지 않아 시의 참뜻과 아름다움은 가려진, 무성한 잡초처럼 비시적이거나 반미적인 말이 무질서하게 엉겨 있게 된 시가 ‘낭유만전체’이다.
시인의 심미적 의도는 좋았으나 쓸데없는 말들과 무질서한 말들에 그 의도가 가려져 작품이 의도에 미치지 못하거나 반하게 된 시의 골격과 풍격!
'낭유'는 가라지풀이나 강아지풀로 번역되지만 곡식과 매우 흡사한 잡초이다. 오랜 농사의 경험으로 미립을 체득하지 못했다면 잡초인지 곡식인지 알아보기 힘든 풀이 바로 '낭유'이다.
이 '낭유'를 솎아내 시인의 심미적 의도를 작품의 실상으로 구현하지 못한다면, 그 시는 미국 신비평에서 말하는 의도론적 오류(intentional fallacy)에 빠진 졸작이라 할 것이다.
공자는 군자로 보이나 실상은 그 반대인, 교언영색에 능한 사이비-군자를 '낭유'에 비유했다. 그만큼 군자와 사이비-군자를 가려내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를 씀에 있어서 시의 참뜻에 해당하는 골력(骨力), 아름다움의 감성적 형상화에 해당하는 풍격(風格), 이 둘의 조화로운 구성과 표현에 해당하는 시어와 구절, 그를 가로막거나 그에 반하는 시어와 구절을 정확히 가려내 과감하게 솎아내기란 밭에 볍씨를 뿌리고 싹이 돋을 때 이 싹들이 곡식인지 강아지풀인지 가려내 솎아내기 어려운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규보는 시를 쓰고 나서 시의 결점에 해당하는 요소를 찾아내 고치기를 계속 반복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 과정의 오랜 숙련을 통해 미립이 체득되어야 참뜻의 기상이 생동하며 그 구성과 표현이 부합하여 함께 살아 움직이는 참되고 아름다운 시를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규보가 시 쓰는 후학들을 깨우쳐 주는 한편 자신의 시 쓰는 과정을 스스로 경계하고자 했던 '낭유만전체'의 의미이다.
곡식은 뽑아버리고 잡풀만 무성하게 된 농사처럼 적실하고 참된 심미적 시어와 구절은 삭제해 버리고 독자와 작가의 참뜻과 아름다움을 속이거나 가로막는 장식적인 시어와 구절을 강조하듯 늘어놓은 무질서한 시,
이런 시를 창작하게 되는 과정은 초보자뿐만 아니라 전문 시인도 종종 빠져 겪게 되는 것 역시 창작과 퇴고 과정의 시중미지(詩中微旨; 시 창작과 퇴고 과정에 있는 은밀하고 오묘하고 깊으며 몹시 섬세하여 파악하기 어려운 요지)를 체득하여 구현하는 어려움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쓰고, 자신의 시를 스르로 비평하며, 미지(微旨)를 체득하는 한편 작품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각도에서 이규보는 "무릇 시가 이루어지면 반복해서 보아야 한다. 자기가 지은 것으로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이나 평생 미워하는 사람의 시로 보아 그 흠결과 실수를 찾아내듯 해야 한다. 그런 후에도 흠결이나 실수를 찾지 못하게 되어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고 퇴고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3년에 걸쳐 150번 이상 퇴고한 것이고,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와 같은 단시(短詩)를 완성하기 위해 서른여섯 번인가 퇴고를 했다고 한다.
'낭유만전'의 반사적 의미의 계승이라 할 것이다. 탁월한 시인은 탁월한 비평가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창작한 작품을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듯 살펴 골력과 풍격을 조화롭게, 현미(顯微)의 감식안으로써 시의 미지(微旨)를 살려낼 수 있어야 탁월한 시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는 인중룡(人中龍)이라고 불릴 만큼 인물이 빼어났으며, 고려의 이태백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이요, 문장가였다.
그는 또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이 정심한 경지에 다다른 학자였고, 문신으로서는 몽골의 침범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충신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 백운소설(白雲小說) 같은 걸작은 민족문학사에 길이 빛날 웅장한 서사시로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묘소는 수백년 간 잊혀졌다가 1900년대 초에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백운곡에서 비석이 발굴되고 후손들에게 알려져 1967년에 묘역이 정화되고, 영정을 모시고 향화를 올리는 사당인 백운재(白雲齋)가 복원되었으며, 그의 문학과 풍류정신을 기리는 후학들에 의해 1983년에는 묘역 앞에 백운 이규보 선생 문학비가 세워졌다.
백운재에는 사가재(四可齋)라는 현판도 걸려 있는데, 사가재란 이규보가 고려의 수도 개경을 가리켜 네 가지가 만족스러워 살 만한 곳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됐다.
그 네 가지란 첫째 농토가 있으므로 양식 걱정이 없고, 둘째 뽕밭이 있어서 양잠으로 옷감 걱정이 없고, 셋째 샘물이 있어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넷째 숲이 우거져 땔감 걱정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천재 시인이며 일세의 풍류남아였던 백운 이규보는 1168년(의종 22) 음력 12월 16일 당시 황려현(黃驢縣)이라 불리던 경기도 여주에서 호부시랑을 지낸 이윤수(李允綏)와 김씨 부인(金氏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주, 초명은 인저(仁氐), 자는 춘경(春卿)이었으며, 아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백운산인(白雲山人) 또는 지지헌(止止軒),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도 했다.
백운거사란 이규보 자신이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이란 글에서 "백운은 내 그리워하는 바이다. 그리워하면서 배우면 그 실(實)은 얻지 못하더라도 아마 그 가까이는 갈 수 있으리. 구름이란 용용(溶溶)하고 한가롭고 산에 걸리지 않고 매이지 않고 표표히 떠다니며 형적이 구애받는 바 없다. 경각에 변화하여 끝간 줄 모르고 유연히 퍼져 군자의 나옴과 같고 엄연히 거두어 고인(高人)의 숨음과 같다. 그 흰 것을 지키고 오묘한 이치를 깨우친다. 또한 거사란 집에 있어 도를 즐기는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혹호선생이란 시와 술과 거문고 세 가지를 남달리 지극히 사랑한 까닭에서 붙인 것이지만, "거문고를 뜯되 아직 정(精)하지 못하고, 시를 짓되 공(工)치 못하며, 술을 좋아하여도 아직 많이 마시지는 못한다"고 겸허해 하였다.
한편 지지헌이란 호는 뒷날 송도 동쪽에 수십 간의 초당을 짓고 살 때 붙인 당호로서 '주역'의 "능히 그칠 바를 알아 그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규보는 9세 때부터 글을 익혀 시를 지을 줄 알아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의 나이 11세 때에는 이런 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紙路長行毛學士, 盃心常在麴先生.
종이 길에 모학사(붓)가 줄지어 가고, 잔속에는 늘 국선생(술)이 있네.
또 14세 때에는 과거 예비시험에서 시를 가장 먼저 지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라는 칭송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성하여서는 유· 불· 선 삼교에 통달했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하여 100년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기재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이규보는 무슨 글이든 한 번 읽으면 좀처럼 잊지 않았고, 시문을 지어도 남의 것을 본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누구든 운(韻)을 부르면 이내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명시를 지어냈다.
이규보는 무슨 글이든 한 번 읽으면 좀처럼 잊지 않았고, 시문을 지어도 남의 것을 본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누구든 운(韻)을 부르면 이내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명시를 지어냈다.
당시 해좌칠현(海左七賢)의 한 사람이던 오세재(吳世才)가 30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이규보와 친구처럼 지내자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오세재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모른다. 이춘경은 비상한 사람이다. 뒷날 반드시 대성하리라."
해좌칠현이란 당시 무신정권에 의해 벼슬길에서 쫓겨나 강호에서 노닐던 이인로, 임춘, 오세재, 이담지, 황보항, 조당, 함순 등 7명의 문인을 가리킨다.
그들과 어울려 시와 술과 거문고와 구름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느라 과거 공부에는 힘쓰지 않았기 때문인지 천하의 이규보도 16,18,20세 때에 과거를 보았지만 세 차례 모두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189년(명종 19) 21세에 비로소 사마시에 장원급제를 했고, 이듬해에 치른 예부시에도 합격을 했다.
춘경이란 이름을 규보로 고친 것도 바로 그 해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는 했지만 워낙 술 마시고 풍류를 즐기기에 바빴던 탓인지 벼슬다운 벼슬은 못하고 계속 미관말직으로만 떠돌았다.
무인들이 철권을 휘두르던 무신정권시대였으므로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 과거에 장원급제를 했어도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마음대로 큰 뜻을 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규보는 어렸을 적에는 피부병을 심하게 앓았지만 장성해서는 훤칠한 키에 미장부였으며 성격도 밝아선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다고 한다. 그는 10대 소년시절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평생토록 술을 사랑했지만 주색으로 몸을 상하는 일은 없었다.
다음은 그가 젊은 시절에 술을 두고 읊은 시이다.
술은 시가 되어 하늘을 뛰어다니고
이곳에는 미인의 영혼인 꽃도 있구나.
오늘 밤 술과 꽃이 있으니
참으로 귀인과 더불어 하늘로 오르는 듯하네.
24세 때 부친을 여의고 천마산에 은거하며 백운거사라고 자호하던 이규보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와 더불어 한민족 고대사 여명기를 재구성한 웅장한 민족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저술하여 국사 상· 국문학 상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것은 26세 때였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참고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진 백운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280여 구 1400여 자의 본시(本詩)와, 400여 구 2200여 자의 주(註)등 총 4000여 자로 이루어진 웅장한 영웅 서사시이다.
그 내용은 우리 민족 고대사의 영웅이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탄생 이전의 계보를 밝히는 서장, 동명성왕 탄생에서 고구려 건국까지를 묘사한 본장, 그의 건국사업을 계승한 유리왕(琉璃王) 즉위까지의 경위 및 작자의 소감을 덧붙인 종장 등 3부작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이 서사시를 짓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 지난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서 그 속에 있는 '동명왕본기'를 읽어보니 그 신이로운 사적이 세상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했다. 그러니 나 역시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신이나 요술로만 생각했는데, 두세 번 거듭 읽다가 점차 그 근원에 들어가니 그것은 요술이 아니라 성(聖)이며 귀신이 아니라 신(神)이었다. 하지만 국사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쓰는 글이니 어찌 믿을 수 없는 허망한 것을 기록하여 전했겠는가.
김부식(金富軾)이 국사를 다시 편찬할 때에 동명왕의 사적을 꼼꼼하지 못하고 너무 엉성하게 취급하였다.… 하물며 동명왕의 사적은 변화가 신기하고 이상한 것으로 뭇 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요, 바로 나라를 창건한 신성한 자취인 것이다.
이러한 사적을 기술해두지 않으면 미래의 후손들이 어떻게 이 역사적인 사실을 접해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까닭에 시로ㅆ 이것을 기록하여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우리 나라가 본래 성인의 국가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동명왕 설화에는 동명성왕을 비롯하여 해모수(解慕漱), 하백(河伯), 송양왕(松讓王), 유리왕 같은 영웅들과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 같은 미인들이 등장하여 웅장한 스케일의 고구려 건국 드라마를 전개, 오랑캐 몽골족에게 시달리던 당대 고려 국민에게 민족 자존심과 자긍심을 고취하였다.
이규보는 당시로선 늙은이 축에 들어가는 4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벼슬다운 벼슬길에 올랐다. 그가 태어난 다음해인 1169년(의종 23)은 정중부(鄭仲夫)가 이른바 무신의 난을 일으킨 해였다. 세상이 무신들의 천하가 되었으므로 이후 오래도록 문신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죽어지내야만 했다.
이규보 자신 비상한 문재(文才)를 지닌 천재였으나 당대의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에게 벼슬을 구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고 하여 어용 문인 소리를 듣기도 했다. 최충헌이 같은 무인 출신인 이의민(李義旼) 일파를 몰살시키고 정권을 잡은 것은 이규보가 28세 되던 1196년 명종(26)의 일이었다.
최충헌과 최이(崔怡)부자는 정중부 등과는 달리 정권 안보를 위해 문신들의 협력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선비들을 많이 발탁했고, 이규보도 이에 따라 그들 부자에게 협력을 했던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백운의 시재(詩才)를 발견한 최충헌이 이렇게 탄식했다고 전한다. "어찌 이런 인재를 묻어 두었는고. 바라는 벼슬을 말하라."
그러자 백운이 대답했다. "지금 8품 자리에 있으니 7품이나 되게 해주시오."
"아니, 그 재주로 겨우 7품관을? 자넨 왜 그렇게도 욕심이 없는가?"
"그 정도면 제 분수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쯧쯧…, 본인이 원한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
그래서 47세에 겨우 7품관인 사재승이 되고, 그 이듬해에는 정언으로 승진했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당대의 문장가들을 평하기를, "유원순(兪元淳)은 문(文), 이안로(李安老)는 시(詩), 이공로(李公老)는 사륙(四六; 騈麗文), 이규보는 쌍운주필(雙韻走筆)에 능했다"고 했다.
백운은 쌍운을 부르면 즉석에서 붓을 달려 구슬같이 아름다운 시부(詩賦)를 지어내는 독보적 문재를 지니고 있었다.
전국시가비건립위원회장으로 백운문학비 건립을 주도했던 고(故) 김동욱(金東旭) 박사는 생전에 말하기를, "쌍운주필이란 창운주필(唱韻走筆)에서 나온 말로 내외구(內外句)로 달아가며 운을 부르게 하고 바로 시부를 지어나가는 송대(宋代)에 비롯된 작시법"이라며서, "특출한 문재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므로 백운을 가리켜 '고려의 이태백'이니 '인중룡'이니 하고 부른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작 백운은 이런 시작법이 바른 법은 아니라면서 술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지은 시는 대부분 버렸다고 한다.
1219년(고종 6)에 백운의 나이 이미 51세였다. 그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중앙 정계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때 그는 시골에 부임하여 이런 시를 읊었다.
나는 본래 서생이지 스스로 태수라고는 칭하지 않노라.
이 말을 고을 사람들에게 부치노니 나를 늙은 농부처럼 여기고
억울한 일 항시 찾아와 호소하기를 갓난아이 어미 젖 찾듯이 하라.
뿐만 아니라 이규보는 당시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이 "농민들은 쌀밥을 먹거나 청주를 마셔서는 안 된다"는 터무니없는 금령을 내려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천대하고 억압하는 데에 분노하여 이런 시를 짓기도 했다.
서울의 호강스레 잘 사는 집엔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도다.
구슬같이 흰 쌀밥을 개나 돼지가 먹기도 하고
기름처럼 맑고 맛있는 술을 심부름꾼 아이들도 마음껏 마시누나.
하나 이것은 모두 농민이 만든 것 그들이야 본시 무엇이 있으랴.
농민들의 피땀을 받아 모아서는 제 팔자 좋게도 부자가 되었구나.
한평생 일해서 벼슬아치 섬기는 일 이것이 바로 농군들이라네.
누더기로 간신히 맨살 가리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밭을 가는구나.
벼 모가 파릇파릇 자랄 때부터 몇 번을 가꾸어 이삭을 맺었건만
아무리 많아도 헛배만 불렀지 가을이면 관청에서 죄다 앗아가네.
남김없이 모두 빼앗기고 나니 내것이라곤 한 톨도 없어
풀뿌리 캐어 목숨을 이어가다 굶주림에 못 이겨 쓰러지누나!
이처럼 힘없는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다 못해 죽어가도 썩어빠진 벼슬아치들이 외세에는 호랑이 앞의 토끼나 고양이 앞의 쥐처럼 무기력하고 무능하지만 백성에는 범같이 무섭게 구는 행태는 예나 이제나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한편, 그 해는 군사독재자 최충헌이 죽은 해이기도 했다. 최충헌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선배인 정중부가 문신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던 무지막지한 전철을 밟지 않고 그들을 회유하고 포섭하여 이용했다. 그러나 끝내 거부하는 자들은 철저히 숙청하여 3대 60년에 이르는 최씨 무신정권의 기반을 다졌다.
어쨌든 그는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71세로 천수를 다 누렸는데, 그동안 그가 모신 것이 아니라 겪었다고 해야 할 임금은 다섯 명이었다. 그 가운데 둘은 강제로 내쫓고 둘은 마음대로 끌어다 앉혔으니 최충헌이야 말로 고려조의 ‘국왕 제조기’라고 부를 만한 괴걸이었다.
최충헌이 죽자 정권은 그의 아들 최이에게 세습되었는데 최이는 집권하자 좌천당했던 이규보를 불러 올려 태복소경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 뒤 백운은 지제고를 거쳐 1230년(고종 17)에는 마침내 장관급인 호부상서에 올랐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 뒤 정당문학감수국사· 태자대보 등 벼슬을 거쳐 당시 고려의 임시수도 강화에서 팔만대장경 판각이 시작되던 1236년(고종 23) 겨울 노환으로 은퇴를 요청했다가 69세 되던 그 이듬해에야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벼슬을 내놓고도 빈번한 몽골족의 침범으로 강토를 유린당하는 나라를 위해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팔만대장경 판각의 성공을 기원하는 기고문(祈告文)을 짓기도 했다.
몽골군이 우리 나라를 침범하기 시작한 것은 1231년(고종 18)부터였다. 그때부터 해마다 달마다 침범하여 노략질을 계속하자 고려 조정은 그 이듬해 5월에 강화도로 천도하여 이후 1270년(원종 11)까지 39년간에 걸친 항몽 투쟁을 펼쳤다. 이 강화도 천도와 항몽 투쟁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당시의 집권자 최이였다.
백운의 외교문서가 얼마나 탁월했던지 원제(元帝)가 감복하여 몽골군을 스스로 물러가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백운은 노년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아호 삼혹호선생에 걸맞게 시와 거문고와 술을 사랑하고, 병상에 누워서도 풍월읊기를 그치지 않다가 1241년(고종 28) 9월 2일 72세를 일기로 한점 백운 같았던 풍류거사의 한삶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 집권자 최이가 '동국이상국문집'을 편찬해 주었고, 백운의 아들 함(涵)과 손자 익배(益培)가 각각 후집을 내고 재간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실전되었다가 뒷날 조선조 숙종 때 일본에서 한 질을 가져와서 재간행한 것이 현재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백운의 글 가운데 '줄 없는 거문고 뒤에 새긴 글(素琴刻背志)'을 필자가 좋아하기에 소개한다.
풍속통(風俗通)에 "거문고는 악기의 으뜸이다. 때문에 군자들은 항상 몸에서 떼지 앟고 사용한다" 하였다. 나는 참다운 군자는 아니지만 줄 없는 소금(素琴) 하나를 가지고 즐겨왔다.
어떤 손님이 이것을 보고 웃고는 줄을 제대로 갖추어서 주므로 나는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받았다. 그리고는 모여 놀 적마다 장측(長側), 단측(短側)으로 마음대로 타며 놀았다.
옛날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에게 줄 없는 거문고가 있었다. 타는 것이 아니라 그는 줄 없는 거문고를 간직하면서 그의 높은 뜻만 밝힐 뿐이었다. 나는 이와 달리 그 소리를 듣고자 하니, 도잠(陶潛; 도연명)의 고상한 뜻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나 내 스스로 즐기는 것인데, 꼭 옛 사람을 본 받아야 할 까닭이 있겠는가.
나는 한 잔 마시고 한 곡조 타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다. 이 역시 세월을 보내는 한가지 즐거움이 되리라. 거문고 등에 백운거사금(白雲居士琴)이라고 새겼는데, 이것은 뒤에 이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내 손때가 묻은 것임을 알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강화대교를 건너서 강화읍을 통과, 301번 지방도로를 타고 전등사쪽으로 가다가 찬우물(冷井) 고개를 지나 계속 달리면 목비(木碑)고개가 나온다.
목비고개 오른쪽에 서 있는 '백운이규보선생묘입구' 표지판을 따라 300m 정도 숲속길로 들어가면 양지바른 곳에 백운거사의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114번지이다.
그의 묘역에서 보면 남쪽으로 문수산을 등지고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진강산과 마리산이, 왼쪽으로는 대모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백운 선생 묘소 앞의 '高麗李相國河陰伯文順公諱奎報之墓配貞敬夫人晋氏村' 비석은 1918년 4월에, '高麗平章事白雲李先生文順公神道碑'는 1952년 3월에 각각 세워졌으며 경기도 지방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묘역의 재실 백운재 앞에는 1983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주관하고 여주 이씨 문순공파 대종회의 협찬으로 강화군이 건립한 '白雲李奎報先生文學碑'가 그의 위대한 문학정신과 풍류정신을 기리고자 찾아오는 이들을 반긴다.
▶️ 唱(부를 창)은 ❶형성문자로 誯(창)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昌(창)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昌(창)은 日(일; 밝다)과 口(구)를 합(合)한 모양이며, 햇볕이 밝음과 똑똑히 말을 하는 것과의 두 가지 뜻으로 쓰였다. 나중에 다시 입 구(口)部를 붙여 唱(창)이라고 쓰고 먼저 노래하다, 앞에서서 말하다, 앞장서서 부르짖다의 뜻을 나타낸다. 먼저 노래하는 唱(창)에 맞추는 것을 和(화)라 한다. ❷회의문자로 唱자는 '노래를 부르다'나 '말을 꺼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唱자는 口(입 구)자와 昌(창성할 창)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昌자는 태양 아래에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전에는 '노래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昌자가 태양의 강렬함에 빗대어 '창성하다', '번성하다'의 뜻을 갖게 되자 여기에 口자를 더한 唱자가 '말을 꺼내다'나 '노래를 부르다'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唱(창)은 (1)가락을 맞추어 노래를 부름. 가창(歌唱) (2)가곡(歌曲) 곡조(曲調), 잡가조(雜歌調), 판소리로 등으로 노래나 소리를 함 (3)노창(濾唱) 등의 뜻으로 ①노래 부르다 ②먼저 부르다 ③말을 꺼내다, 앞장서서 주장하다 ④인도하다 ⑤노래, 가곡(歌曲)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부를 소(召), 읊을 음(吟), 부를 호(呼), 부를 환(喚), 부를 징(徵), 부를 초(招), 부를 빙(聘), 읊을 영(詠)이다. 용례로는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부름을 창가(唱歌), 노래하는 방법을 창법(唱法), 배역을 나누어 판소리를 연창하는 연극을 창극(唱劇), 앞장을 서서 솔선하여 부르짖음을 창도(唱道), 노래하기 위한 곡조를 창곡(唱曲), 판소리를 음악으로서 일컫는 이름을 창악(唱樂), 죽은 사람 앞에 그의 옷을 갖다 놓고 생전의 집착심을 떼는 일을 창의(唱衣), 부르짖어 사람을 인도함을 창도(唱導), 노래하면서 가야금 등을 탐을 창탄(唱彈), 죽은 사람의 혼을 부름을 창혼(唱魂),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 받고 함을 창수(唱酬), 많은 사람이 소리를 맞추어서 노래를 부름을 합창(合唱), 명령이나 지시하는 말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되풀이 함을 복창(復唱), 처음으로 주장함을 제창(提唱), 주의나 주장을 앞장 서서 부르짖음을 주창(主唱), 노래를 부름을 가창(歌唱), 맨 먼저 주창함을 선창(先唱), 혼자서 노래함을 독창(獨唱), 남편이 주장하고 아내가 이에 따름으로 가정에서의 부부 화합의 도리를 이르는 말을 부창부수(夫唱婦隨),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책망을 들을 사람이 도리어 큰소리를 침을 이르는 말을 아가사창(我歌査唱), 남자가 앞에 나서서 서두르고 여자는 따라만 함을 일컫는 말을 남창여수(男唱女隨), 여자가 먼저 나서서 서두르고 남자는 따라만 함을 일컫는 말을 여창남수(女唱男隨), 상관으로부터 명령과 임무를 받으면서 그 내용을 되풀이 말하며 틀림없이 그 일을 해내겠다는 뜻을 나타내는 일을 일컫는 말을 복명복창(復命復唱), 조용하고 알맞게 술을 마시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즐김을 일컫는 말을 천작저창(淺酌低唱), 새의 암컷과 수컷이 의좋게 서로 지저귄다는 뜻으로 서로 손이 맞아서 일함을 비유하는 말을 웅창자화(雄唱雌和) 등에 쓰인다.
▶️ 韻(운 운)은 ❶형성문자로 韵(운)은 간자(簡字), 勻(운), 匀(운)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소리 음(音; 소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돌다의 뜻을 갖는 員(원, 운)으로 이루어졌다. 옛 자형(字形)은 員(원)을 勺(작)으로 썼다. 목소리의 고른 울림의 뜻이다. ❷형성문자로 韻자는 '운치'나 '소리의 울림'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韻자는 音(소리 음)자와 員(수효 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員자는 솥 위에 둥근 원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원→운'으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韻자는 본래 소리의 흐름이 균일하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래서 소전 이전에는 音자와 勻(고를 균)자가 결합한 韵(운 운)자가 쓰였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韻자가 '소리의 울림'을 뜻하게 되었다. 韻자는 때로는 '정취'나 '운치'를 뜻하기도 한다. 음악 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지듯이 멋진 경치도 잔잔한 여운과 감동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韻(운)은 (1)운자(韻字) (2)운향(韻響) 등의 뜻으로 ①운(韻: 한자의 음절에서 성모(聲母)를 제외한 부분) ②운치(韻致) ③정취(情趣) ④소리, 음향(音響) ⑤소리의 울림, 여운(餘韻) ⑥운문(韻文) ⑦기품(氣品) ⑧기호(嗜好), 취향(趣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소리 성(聲), 소리 음(音)이다. 용례로는 고아한 품격을 갖춘 멋을 운치(韻致), 시문의 음성적 형식을 운율(韻律), 일정한 운자를 끝에 사용하여 성조를 고른 글을 운문(韻文), 시의 운율과 품격을 운격(韻格), 운치가 있는 사람을 운인(韻人), 시가詩歌의 높임말을 옥운(玉韻), 네 개의 운각韻脚으로 된 율시를 사운(四韻), 시를 지을 때 한시부의 일정한 곳에 운을 닮을 압운(押韻), 기나 글귀의 줄의 끝에 다는 운을 각운(脚韻), 남이 시운을 써서 시를 지음을 차운(次韻), 남아 있는 운치나 울림을 여운(餘韻), 고상한 운치를 고운(高韻), 말이나 노래 따위의 슬픈 가락을 애운(哀韻), 바람에 흔들리어 나는 소나무의 맑은 소리를 시의 운에 비유하여 일컫는 말을 송운(松韻), 예술 작품 따위에서 신비한 기운이 어렴풋이 피어 오름을 이르는 말을 신운표묘(神韻縹渺), 자연과 친하여 시가詩歌 따위를 지어서 즐김 또는 그 일을 풍류운사(風流韻事), 글씨나 그림 등의 기품이나 품격이나 정취가 생생하게 약동함을 이르는 말을 기운생동(氣韻生動) 등에 쓰인다.
▶️ 走(달릴 주)는 ❶회의문자로 赱(주)와 동자(同字)이다. 夭(요)는 사람을 나타내는 大(대)를 변형(變形)한 모양으로 사람이 뛸 때의 모습이고, 止(지)는 발자국의 모양으로 나아가는 일을, 走(주)는 사람이 뛰어가는 모습이다. 부수(部首)로서는 그 글자가 달리다의 뜻에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走자는 '달리다'나 '달아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走자는 土(흙 토)자와 止(발 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하지만 走자의 갑골문을 보면 양팔을 휘두르며 달리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후 금문에서는 발아래에 止자가 더해지면서 '달리다'라는 뜻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의 走자는 달리는 모습과 止자가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走자는 이렇게 달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달리다'나 '뛰다'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금문에서는 '세차게 달리다'라는 뜻을 위해 3개의 止자를 넣은 글자도 등장했다는 것이다. 바로 '급히 가다'라는 뜻의 奔(달릴 분)자이다. 그래서 走(주)는 달음질로 취재(取才)의 한 가지 깊이 8치 7푼, 직경(直徑) 4치 7푼의 8되 들이 구리 병의 아래에 물이 빠지는 직경(直徑) 2푼 되는 구멍의 귀가 있는 데, 윗 구멍은 병 아가리로부터 6치 7푼되는 곳에 있고 아랫 구멍은 그 아래 1치 3푼 거리에 있음 담은 물이 다빠지는 동안에 270보를 달리면 1주(走), 260보 달리면 2주, 250보를 달리면 3주라 함의 뜻으로 ①달리다 ②달아나다 ③걷다 ④가다 ⑤떠나가다 ⑥나아가다 ⑦길짐승 ⑧종, 노비(奴婢), 하인(下人) ⑨심부름꾼 ⑩종종걸음 ⑪저, 자신(自身)의 겸칭(謙稱) ⑫달리기의 등급(等級)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자동차 따위의 주로 동력으로 움직이는 탈것이 달려감을 주행(走行), 달리는 사람이나 선수를 주자(走者), 중도에서 꺾이지 않고 목적지까지 다 달림을 주파(走破),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감을 주루(走漏), 말이 몹시 달려서 생기는 병을 주상(走傷), 달리는 경기의 총칭을 주기(走技), 빨리 그리고 매우 빠르게 오랫동안 달리는 힘 달릴 수 있는 힘을 주력(走力), 도망쳐 달아나는 길 도로를 주로(走路), 말을 타고 달림 또는 닫는 말을 주마(走馬), 남의 심부름이나 하고 여기저기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주졸(走卒), 글이나 글씨를 흘려서 매우 빨리 씀을 주필(走筆), 빨리 달림을 질주(疾走), 피하거나 쫓겨서 달아남을 도주(逃走), 이리저리 바쁨을 비유하는 말을 분주(奔走), 도망쳐 달아남을 둔주(遁走), 싸움에 져 도망침을 패주(敗走), 싸움에 져서 흩어져 달아남을 궤주(潰走), 이어 달리기를 계주(繼走), 뒤로 물러나서 달아남을 각주(却走), 힘껏 달림을 역주(力走), 마지막까지 다 달림을 완주(完走), 있던 곳을 떠나서 달아남을 출주(出走), 단독으로 달림을 독주(獨走), 통쾌하도록 썩 빨리 뜀을 쾌주(快走), 정해진 통로 밖의 길로 달리는 일을 미주(迷走), 등산 용어로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 많은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등산 형식을 종주(縱走), 올바른 일을 버리고 바르지 못한 길로 감을 횡주(橫走), 미끄러져 내달음을 활주(滑走), 패배하여 달아남을 배주(北走), 알몸을 드러낸 채로 달린다는 뜻으로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는 모양을 이르는 말을 육주(肉走),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산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바빠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대강 보고 지나감을 일컫는 말을 주마간산(走馬看山),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형편이나 힘이 한창 좋을 때에 더욱 힘을 더한다는 말 또는 힘껏 하는 데도 자꾸 더 하라고 격려함을 일컫는 말을 주마가편(走馬加鞭), 사냥개를 삶아 죽인다는 뜻으로 전쟁이 끝나면 공신도 쓸모 없는 것으로 천대받음을 이르는 말을 주구팽(走狗烹), 달리는 말 위에서 꽃을 본다는 뜻으로 사물의 겉면만 훑어보고 그 깊은 속은 살펴보지 않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주마간화(走馬看花), 급한 산비탈로 내달리는 형세란 뜻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이 되어가는 형편대로 맡겨 둘 수 밖에 없는 형세를 비유하는 말을 주판지세(走坂之勢), 달리는 송장과 걸어가는 고깃덩어리라는 뜻으로 몸은 살아 있어도 정신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주시행육(走尸行肉), 달아나 숨을 곳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주복무지(走伏無地), 화를 피하려면 달아남이 상책임을 일컫는 말을 주위상책(走爲上策), 옳지 못한 일을 한 이상 앞서갔건 뒤따라갔건 다 마찬가지라는 말을 주축일반(走逐一般), 노루를 쫓는 데 생각지도 않은 토끼가 걸렸다는 뜻으로 뜻밖의 이익을 얻음을 이르는 말을 주장낙토(走獐落兔), 말을 타고 달리면서 비단을 스쳐 본다는 뜻으로 세밀하지 않게 대강대강 빨리 봄을 이르는 말을 주마간금(走馬看錦), 닫는 데 발 내민다는 뜻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해를 입힘을 이르는 말을 주전출족(走前出足), 문을 잠그고 몰래 도망함을 쇄문도주(鎻門逃走), 동쪽으로 뛰고 서쪽으로 뛴다는 뜻으로 사방으로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님을 일컫는 말을 동분서주(東奔西走), 한밤중에 몰래 도망함을 일컫는 말을 야반도주(夜半逃走) 등에 쓰인다.
▶️ 筆(붓 필)은 ❶회의문자로 손에 붓을 쥔 모양의 聿(율)과 자루가 대나무인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竹(죽)을 붙여서 쓴다. 즉 대나무로 만든 붓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筆자는 '붓'이나 '글씨', '필기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筆자는 竹(대나무 죽)자와 聿(붓 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聿자는 손에 붓을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붓'이라는 뜻은 聿자가 먼저 쓰였었다. 하지만 소전에서는 붓의 재질을 뜻하기 위해 竹자를 더해지면서 지금의 筆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筆(필)은 논, 밭, 임야(林野), 대지(垈地) 따위의 구획(區劃)된 전부를 하나치로 하여 세는 단위이다. 필지(筆地)의 뜻으로 ①붓 ②글씨 ③필기구(筆記具) ④필법(筆法) ⑤가필(加筆) ⑥획수(劃數) ⑦필획(筆劃) ⑧글자를 쓰다 ⑨글을 짓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붓을 꽂아 주는 통을 필통(筆筒), 손수 쓴 글씨의 형적이나 그 솜씨를 필적(筆跡), 글씨를 씀을 필기(筆記), 붓의 끝을 필두(筆頭), 글씨 쓰는 법을 필법(筆法), 글씨의 획에 드러난 힘을 필력(筆力), 글씨의 획에 드러난 기세를 필세(筆勢), 말이 통하지 아니할 때에 글을 써서 서로 묻고 대답하는 일을 필담(筆談), 글로 써서 대답함을 필답(筆答), 붓과 혀로 곧 글로 씀과 말로 말함을 이르는 말을 필설(筆舌), 붓과 먹을 필묵(筆墨), 글씨 특히 한자를 쓸 때에 붓을 놀리는 순서를 필순(筆順), 생각하는 바를 글로 나타냄을 필술(筆述), 옛 사람의 필적을 모아서 엮은 책을 필첩(筆帖), 글 또는 글씨를 쓴 사람을 필자(筆者), 베끼어 씀을 필사(筆寫), 어떤 양식에도 해당되지 아니하는 산문 문학의 한 부문을 수필(隨筆), 붓을 잡고 시가나 작품 등의 글을 씀을 집필(執筆), 뛰어나게 잘 쓴 글씨를 명필(名筆), 손수 쓴 글씨를 친필(親筆), 임금의 글씨를 어필(御筆), 자기가 직접 씀 또는 그 글씨를 자필(自筆),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림을 윤필(潤筆), 옛 사람의 필적을 고필(古筆), 남을 대신하여 글을 씀 또는 그 글씨를 대필(代筆), 붓을 휴대하는 것을 잠필(簪筆), 붓을 대어 글씨를 고침을 가필(加筆), 두드러진 일을 특별히 크게 적음 또는 그 글을 특필(特筆), 벼루를 밭으로 삼고 붓으로 간다는 뜻으로 문필로써 생활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필경연전(筆耕硯田), 붓과 먹으로 징벌한다는 뜻으로 남의 죄과를 신문이나 잡지 따위를 통해 글로써 공격함을 이르는 말을 필주묵벌(筆誅墨伐), 붓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뜻으로 문장을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필한여류(筆翰如流), 시문을 짓는 붓끝이 비바람이 지나가듯이 빠름을 일컫는 말을 필단풍우(筆端風雨), 확인하거나 또는 잊어버리지 아니하기 위하여 글로 써 둠을 일컫는 말을 필지어서(筆之於書), 문장을 자유자재로 잘 지음을 이르는 말을 필력종횡(筆力縱橫), 동호의 붓이란 뜻으로 역사를 기록함에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써서 남기는 일을 이르는 말을 동호지필(董狐之筆), 뚜렷이 드러나게 큰 글씨로 쓰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게 크게 여론화 함을 이르는 말을 대서특필(大書特筆), 한숨에 글씨나 그림을 줄기차게 쓰거나 그림을 일컫는 말을 일필휘지(一筆揮之), 남의 글이나 저술을 베껴 마치 제가 지은 것처럼 써먹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문필도적(文筆盜賊), 붓만 대면 문장이 된다는 뜻으로 글을 짓는 것이 빠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하필성장(下筆成章)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