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바둑 둘 줄 아는가?”
“예, 조금은 둘 줄 압니다만 내세울 정도는 아닙니다.”
경진은 바둑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다. 아마추어 바둑대회에
나가면 항상 입상을 했었고, 자주 다니는 유명 기원에서도
프로와의 접바둑에서 가끔 이길 때도 있었다.
“허허! 자네의 말투에서, 겸양이 지극하나 자신감도 엿보이는
것이 보통 실력이 아닌 듯싶으이! 나도 이제 고희가 한참 넘어 쉴
때가 지났건만, 상감마마의 치국에 애쓰심과 퇴직의 만류로
어쩌지 못하고 국정에 참여하고 있네. 몸이 안 따라줘서
피곤하구만. 자네도 하루 종일 마음고생 하느라 피곤 할게고...
나중에 시간이 많을 터이니, 그 때 한번 겨루어 보세! 하하하!”
“예, 영광이겠습니다.”
“허허! 자네가 기거하게 될 이집이 정승 집보다 화려하구먼.
껄껄껄!”
경진은 황희정승의 표정에서 인자한 할아버지와 자상한
아버지의 참모습을 보았다.
“그야, 황희 정승님께서는 후세 대대로, 청렴 검소하신
노장사상의 대학자로서 회자됨은 물론이려니와, 모든 공직자의
귀감이 되셨습니다.”
황희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경진에게 물었다.
“무려 600년이 지난 뒤에도 그런 말들이 회자되고 있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정승 댁에 행차하실 때 돗자리
하나 못 내주심과, 뚫린 천정을 고치지 않고 비오는 날 빗물
받으시며 백성을 생각하시는 마음, 그리고 겨울에 단벌옷으로
지내시는 등 일화가 많으옵니다.”
“허허!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세상의 이치를 조금만
이해하고 실천하면 수이 될 것을...”
경진이 본 황희정승의 표정에는 자신의 칭송에 대한 즐거움은
엿볼 수 없었고, 아쉬움만이 가득 배어있었다.
‘아! 황희 정승님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주신 선비구나’
경진은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나는 이만 감세! 자네는 두문불출 해야만 하네! 자네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온 나라의 민심이 흉흉해질 뿐 아니라, 상국인
명나라에서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니 조심하게! 나조차도 자네
만나러, 남의 옥교(屋轎,덮개 있는 가마)를 빌려 타고 왔다네.”
경진은 황희 정승이 대문에 나서는 것을 보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안에는 미자르가 이미 투명인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가
경진을 보며 무엇이 재미있는지 싱글거리며 말을 걸었다.
“경진씨, 겁쟁이죠? 정승님 앞에서 어쩔 줄 모르던걸요?”
“하하! 그건, 평소에 존경했던 나의 조상이기도 하고 훌륭하신
황희정승님의 현생을 생생하게 공감했기 때문이에요. 너무도
훌륭하신 분이어서 나도 모르게 감탄의 말이 튀어나올 뻔
했어요.”
경진의 말을 듣던 미자르가 그의 얼굴에서 고지식하고 단정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 조상의 그 자손이구나!’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뇨? 경진 씨가 사랑스러워서요.”
경진을 곱게 훔쳐보던 미자르가 얼굴이 빨개졌다.
그 역시 언제나 거침없고 당당한 그녀가 좋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고 예쁜 그녀에게 다가서기 미안한 마
음이 들어, 고개를 가볍게 떨구었다.
“경진 씨, 이제 우리 둘만의 시간이네요?”
“예, 그렇군요.
경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둘만의 시간에 대한 의미를 느끼자,
가슴이 설레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나왔다.
“미자르님은 결혼 했지요? 하긴, 나이가 마흔 셋이나 되니...”
“후후! 결혼이요?... 남편도, 가족관계도 궁금한 거죠?”
“하하!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미래의 가정생활도 궁금하고
요.”
“경진 씨 세대와 120년 뒤의 우리세대와는 많이 다를 거예요.
우리는 결혼이라는 것을 중요시 하지 않아요. 서로 간에 공감이
형성되고 조건만 맞으면, 상호 동의하에 권리와 의무 사항, 동거
사실과 주소를 정부에 등록하고 같이 살아요. 서로간의 사생활이
나 간섭이 없으니, 지금 여기처럼 가족 개념은 더욱 없지요. 살다
가 맞지 않으면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식으로 헤어져서 다른 사
람 만나고요. 철저한 동거개념이에요”
“그러면 자식은요? 부모형제는...?”
“그것도 그래요. 정부에 제출한 동거 계약서에 따라 자식의 양
육에 관한 조건대로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요.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은 어느 정도 남아있지만, 형제간의 정은 별로 없지요. 마치 사
파리 사자들의 가족 개념과 비슷해요. 단지, 일대 일 개념의 동거
만이 다를 뿐이지요.”
“어찌 보면, 편리한 것 같기도 하지만 삭막하게 느껴집니다.”
경진은 약간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정이란 것이 전혀 배
제된, 철저한 개인주의적 삶에 거부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미자르님은 정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데
요?”
“호호! 그렇게 보여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8
개월간 조선시대에서 투명인간으로 살다보니 많이 외로웠어요. 처
음에는 이들의 가족관이 생경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들의
삶 속에, 정이란 끈의 가치관을 축으로 가족 간의 깊은 신뢰와 희
생에 감동했거든요. 아마 우리시대에서 익숙해진 이기심에 의해
꼭꼭 감추어져 있던 본능적인 정이 밖으로 노출된 듯싶어요.”
“내가 어제까지 살고 온 2006년 역시, 조선시대 가족관의 끈에
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해서 미자르님의 시대로 가고 있어요.”
경진의 얘기를 듣고 있던 미자르의 눈이 웃음을 치며, 볼 살이
숨어들었다.
“경진씨, 자기야! 우린 어떤 끈을 만들까? 가족의 끈? 동거의
끈? 빨리 말해요. 나 급하단 말예요. 이런 얘기로 밤새우기 싫다
고... 후후!”
미자르가 얼쯤한 표정의 경진의 목을 잡으며 애교를 부렸다.
“그래요. 알았어요. 미자르가 원하는 대로 할게요.”
경진은 그녀가 다치기라도 할 듯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러자 기
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부드러운 혀가 그의 입속에 들어와 춤을 추
기 시작했다. 그도 그녀의 짙은 향기를 수백 개의 결을 만들며 하
나씩 음미하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의 결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서로의 입을 가득 메웠다.
“아!...숨이 막혀요”
그녀가 그의 입술을 살며시 밀쳐내며, 볼우물을 크게 만들고 의
미가 가득한 농염한 눈빛으로 그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조심스
레 진회색의 투명복을 벗기 시작했다. 조금씩 벗겨지는 회색의 껍
질 속에서 하얀 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경진은 하얀 살이 커져
감을 보며 감탄했다. 마흔 셋의 나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
이었다. 이십대 후반의 여자에게서 조차 보기 힘든 탄력 감이었
다.
“뭐를 그렇게 뚫어지게 봐욧! 창피하게! 후훗...!”
그녀가 싫지는 않은 듯 농염한 눈을 하고 자신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도 옷을 벗으며, 앉아있는 완벽한 비너
스 조각품을 감상했다. 가벼운 미적 욕심이 일어났다.
“미자르! 한번 일어나보세요! 살아있는 조각품을 감상하고 싶
어요.”
그녀가 백치미의 맑은 표정으로 일어서며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아!... 너무 완벽해요.”
하얀 조각품이 경진에게 쓰러지며, 눈부신 아침햇살로 안겨왔
다. 그 햇살이 흩어질까 조심스러워, 경진은 그녀를 가만히
가두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 아침 햇살은 살아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한동안 정지하더니, 흩어지며 정적을 깼다.
“뭐해요? 이렇게 안고만 있을 거예요?”
“흩어질까 보아서....”
갇혀있던 방안의 정지된 공기가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방안의 공기가 밀물과 썰물처럼 밀
려 가고 밀려왔다. 서로가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주며, 파
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잔잔한 파도가 점차 거친 파도로 일어나며
가득 메운 벽을 향해 커다란 물보라를 만들고 사라지곤 했다. 때
로는 자신들이 만든 고운 무지개 속에 갇혀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공간은 더 이상 고통과 고뇌가 담긴 판도라
상자가 아닌, 열락과 파라다이스의 꿈만이 존재하는 판도라상자를
만들어 스스로 갇히기를 갈구했다. 이윽고, 부서진 파도들이 만들
어 운무가 된 무수히 흩어진 편린들이 판도라상자 속으로 찾아 들
었다.
마침내 그들은 열락의 조각들을 전부 맞추어 가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 너무 좋았어요. 날아갈 것 같아요. 머리가 맑아요.”
“예, 나도요! 나는 미자르가 만든 파도에 떠다니는 작은 조각
배가 된 기분이었어요.”
“어머! 표현도 예쁘기도 해라! 그럼 내가 어떤 파도였어요?”
“메머드급 태풍의 파도!”
그녀가 그의 말에 가볍게 윙크하며 주변을 정리하고는 옷을 입
기 시작했다.
“올 사람도 없는데... 답답하게 옷은 왜 다 입어요?”
경진이 투명복을 입고 있는 미자르에게 물었다.
“이게 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왜죠?...”
“자기는 아직까지 이 시대의 위험인물이에요. 황희정승님과 대
화할 때, 나는 그분의 표정을 유심히 지켜봤어요. 아직 자기에 대
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 표정을 조금 보았거든요. 그 외에 다른 사
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된 자기를 어떤 사람들이 무슨 방법으로
해할지 모르거든요. 내가 투명인간으로 당신을 보호해야 되니까
요. 그리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투명복 입을 시간도 없이 내
가 노출되면 그 곤란함도 그렇고요”
경진은 자신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리고 사
랑스러웠다. 그녀에게 가만히 다가가 이마에 엷은 키스를 해주었
다.
“미자르가 옆에 있으니까 든든하고 좋아요”
“호호! 보호해줘서 좋다는 거죠? 다른 감정은?...“
그녀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의 눈을 보며, 야릇한 웃음을
보냈다. 답변이 궁색해진 경진은 농담거리가 생각이 났다.
“미자르.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동화 들어 봤지요?”
“아뇨, 동화가 뭔데요?”
“예에...? 동화라는 말도 몰라요?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 말
이에요?”
경진은 동화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미자르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런 말 처음 들어봐요. 우리시대에는 그런 말 없어요.”
그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딴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살던 서울 아이들도 동화책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어! 그것참!...그건 그렇고, 얘기해 줄게요. 재미있어요.
미자르하고 연관도 되고요.”
미자르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옛날에... 어쩌면 이 조선시대 보다 훨씬 더 옛날에, 금강산
아래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나무꾼이 있었는데, 하루는 산에
서 나무를 하다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숨겨주게 됩니다. 목
숨을 구한 사슴은 나무꾼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선녀가 목욕을 하
는 곳을 알려주고 그곳에서 날개옷을 훔치라고 일러줍니다. 그리
고 꼭,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 날개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얘기합
니다..... (중략) 나무꾼은 그 말대로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가 아이들과 선녀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죠. 그 뒤의 얘기도
있는데 슬프니까 생략하지요“.
“우아! 재미있다. 나무꾼이 횡재했네요? 그런데 그게 왜 나랑
연관이 있는 거지요?”
그녀는 그의 엷은 미소 속에서 개구쟁이 짓궂음을 느꼈다.
“하하! 그거야, 내가 미자르의 투명복을 감추면...”
“경진 씨, 심술쟁이! 피이!, 누가 투명복을 훔치게 둘 줄 알아
요?”
미자르가 경진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방안에는, 나란히 누워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기다란 등잔대 위에서 유기에 담겨진 등잔불이 자신 속의 기름을
태우며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경진 씨, 이제 그만 불 끄고 자요. 나는 투명인간으로 돌아갈
게요.”
경진이 등잔을 끄는 사이에 그녀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경진 씨, 난 항상 자기 옆에 있어요. 지금도 모습만 보이지
않을 뿐이에요.”
경진은 그녀를 더듬어 찾아내곤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피곤
에 지쳐, 잠이 기다리는 곳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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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샘터
콩다칸 팥다칸(장편소설) - 열락의 판도라 상자(7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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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2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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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진 미자르...너무 익숙한 이름 ..... ㅎㅎ... 여행님 쉬엄쉬엄 하세요 장편소설 한권내면 흰머리가 생길수도 ^^*... 즐감 했어요
ㅋㅋ 흰머리요? 잊고 삽니다. 꼬박꼬박 즐감해주셔서 감솨! 제주에서 뵈요.^^*
여행님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가 될겁니다.
세진나라님, 감사합니다. 좋다기 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편하게 썼습니다. 님께서도 즐겁고 의미있는 한 주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이치를 조금만 이해하고 실천하면 수이 될 것이라는..황희 정승의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존경받는 사람은 존경받을만한 이유가 분명 있는 듯 합니다..
욕심을 버리면 의외의 것이 많이 보입니다. 특히 물욕.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서요. 황희 정승께서는 그것을 실천하셨기에 후세에 두고두고 존경을 받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