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아 빠진 66년형 볼보가 퇴근시간 러시아워때 도로 한복판에서 멈추었다. 기름이 떨어져 버린것인데 겨우
누군가의 도움으로 차를 3개 차로로 미는 동안 뒤의 다른 차들이 씨끄럽게 경적을 울렸다. 경찰이 와서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한참 설교한뒤에 약간의 기름을 넣어주었다. 다시 운전자는 길을 갔지만
러시아워 시간이라 또 다시 기름이 도로위에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아랫배 나온 중년의 흑인은 얼마전 집에서 직접 막힌 싱크대를 고치고
이번에 이런일을 당하면서 민간인 되기 힘들다고 투덜거렸다.
이 도로 한 복판의 엉성한 흑인은 한때 미국의 국방력이 최고에 달하던 시기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를 체포
하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때 약 50만에 달하는 다국적군을 지휘한 모든 미국 군대의 참모총장을 지휘한
미국 합참의장으로써 4성 장군이었던 콜린 파월이다
"나의 미국 여행"이라는 그의 자서전은 콜린 파월 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출판되었는데 지금은
텍사스 카우보이 조지 부시의 국가 운영 실패와 이라크전으로 인해 많이 그것도 상당히 많리 퇴색되기는
햇지만 오마바 대통령이 나오기 전가지 미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른 미국 흑인으로 한떄 미국 공화당
지지자들과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도 1996년도 대선후보로 나서라는 권유와 양 진영에서 자신의 런닝메이트로
삼기위해 꼬리를 살랑 됐던 사람이었다 .
이라크전으로인해 미국 네오콘이라는 신보수주의 인사의 한사람으로 인식되기는 했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때문에 아마도 부시와 사이가 나빠졌는지 제일먼저 백악관에서 나와버렸다.
어쩌면 그가 있었기에 오마바 대통령이 나올수있는 길을 터놓았을것이다.
콜린 파월은 1937년에 뉴욕 브롱스 할렘에서 자마이카 (쿨~ 러닝) 이민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특별히
잘하는 것 없는 뉴욕 흑인소년은 고교 성적도 평균 C 학점을 받았지만 운좋게도 뉴욕의 서민들의 칼리지에
들어가고 ROTC에 들어가 군인의 길에 들어선다. 그 당시 미국의 민간에서는 흑인이 차별받았지만 군은 이미
한국전쟁 전에 차별이 철폐되어 누구든지 장교가 될수있었다.
그리고 뉴욕은 다인간 사회라서 거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점은 파월이 평생 다른 흑인군인들이 상관에
반항하거나 할때 아무 문제없이 다른 백인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가 차별을 인식하게 된때는 오히려 소령때
였다 .
독일에서 소대장시 권총을 잃어버린것을 중대장이 찾아주고 전화에다 소리 지르지 말라고 주의를 듣던 보통 사람은
미군의 여러 교육기관에서 상위1-2등에 항상 들게 되면서 지1 지명자로 항상 명성이 높아갔다.
베트남에서 군사 고문단으로 베트남군과 그 유명한 어 샤우 계곡(영화 햄버거 힐의 그 곳)에서 활동하다 죽창
부비트랩에 발을 관통당해 미국으로 들어왔고 2번째에서 부대대장으로 갔다가 사단 G-3 참모장과 참모부관을
지낸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돌아와 국방부에서 일할때 이른바 백악관 회원이라는 미래의 미국 지도자들을 키우는
기관에 선발된다.
그 다음은 미2사단의 보병 대대장, 국방부참모 보좌관, 101공수사단 2여단장, 다시 국방부, 4보병사단
부사단장, 이번에 국방부장관 보좌관으로 2성장군이 혼자서 와인버거 장관의 뒤치닥거리를 하고 소대장때 일했던 독일의
5군단장을 하다가 레이건 대통령때 이른바 이란 콘트라 무기 거래 사건으로 풍지 박살난 국방부를 구해달라고
레이건이 직접 전화하는 통에 5개월만에 꿈같은 군단장을 집어치우고 미국으로 돌아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해군폭격기 조종사 출신의 키큰 부시가 대통령이 되자 4성장군이 되어 합참의장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보면 그가 줄잘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월남에서 명예훈장을 받은 것도 아닌 그가 그렇게 탄탄이
올라갈수있는 것도 하늘이 도운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그의 경력은 육군 대학이라던가 국방 대학원등의 교육기관에서 항상 1-2등을 하였으니 우수한 인재를 자기
밑에 두려는 상관들이 그를 제일 먼저 지명했던 것이고 개인적 비리도 없고 생긴것도 무난한데 성격도 무난한데
다가 일도 잘하니 계속 그를 임용한것이었을것이다. 거기다가 미국은 당시나 지금이나 어느 기관에 유색인이
일정 비율이상 없을 경우 언론에 알라져미녀 골치아프게 되었는데 일잘하지, 교육기관 성적 좋지, 성격 좋지
(이 글 쓰는 본인이야 성격이 모난 사람이지만 파월은 두리뭉실 한 모양이다) 거기다가 흑인인데 뽑아 놓으면
언론등에 욕먹을일 없는 더할 나워없는 장교이니 여기저기서 그를 요구한것일 것이다 .특히 국방부가 그랬으니
항상 부대 지휘관을 꿈꾸는 그를 좋은 자리 마련해주는 것도 쉬울것이고.
그의 책에서 그가 있게 한 여러 선배 장교들이 나오지만 특별히 살펴보아야 할 장군이 하나 있다.
콜린 파월이 중령일때 국방부에서 그가 대대장을 맡을 수 있는 부대를 찾다가 당시에는 매우 외딴곳이고
전쟁 위험지역이라 가족동반 근무도 안되는 한국이라는 곳의 미2사단 32보병 1대대로 가게되었다.
파월은 대대장 이취임식 나가니 연병장에 대대 기수 몇, 각 중대의 중대장과 그 기수 몇 대대 특수상사와 전임자
그리고 자신만이 나와있었던 것이다 .
??
전임자는 "건파이터는 땡볓에 전 부하들이 가만히 서있는체 중령 둘이서 서로 칭찬하는것을 좋아하지 않아"
한마디로 대대장 이취임식하는데 나중에 신임 대대장 얼굴 못볼것도 아니고 대대원 전부가 나와있을 필요가
있냐는것으로 이취임식은 30초만에 끝났고 파월은 건파이터라는 별명의 헨리 E 에머슨 장군을 좋아하게 된다.
에머슨은 참 특이한 장군이었던 것 같다 파월에 야전 지휘관으로 쓸만하다는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한 32 보병
1대대 당시 건파이터 에머슨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건파이터는 분명 콜트 피스메이커로 보이는
구식 리볼버 권총을 45구경 대신에 탄띠에 차고 다녀선 얻은 별명이다 .
거기다가 탄띠 버끌까지 리볼버를 새겨넣었다. = 나 장군인데 누가 뭐라 그려?=
henry E emerson ,The gunfighter
그의 자서전에서 뒤에도 종종 언급되는 건파이터는 1977년 전역했음에도 위키페디아에 검색이 되는데
분명 콜린 파월의 자서전에 언급된 내용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파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건파이터와 파월이 2사단에 있을 당시 미군은 월남전의 창피 이후 징집병들이 지원병으로 구식 시스탬이
신식으로 바뀌는 단계로 군내에 인종주의, 마약, 갱문제, 거기다가 2사단은 동두천에 살림을 차린 병사들
문제에 전시 가능지역이라 임시 막사뿐이어서 난방도 잘되지 않은 외지 였다.
파월이 대대장이 된지 2일만에 자기 대대 병사가 헌병대장을 암살 하려다 잡혔다. 분위기 살벌한 그런 부대였다.
이 때 건파이터는 병사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여러 일을 시행했다.
한때 (지금도?) 우리나라 특전사에서 시행하는 전투 축구....
끝나면 목발과 부목을 두른 부상자들이 넘치는 규칙이 뭐야? 하는 그 축구를 시행한 사람이 건파이터이다 .
이것도 미군꺼 보고 배운거라니....
병사들의 반이 고교 중퇴자 급인 부대를 "이제 부터 우리 사단은 모두 고교졸업자격자 이상이다!"
선생이 없어서 겨우 삼모님들 찾아 다녀서 시행하고는 대상자 85%가 참여 중입니다 .
@%@$%$% 나머지 15%는 왜 참여 안하는데?" ..-_- 예이~
밤새 록 페스티발 건스탁(우드스탁의 건파이터 버전)- 파월은 시끄러 잠을 못잤다.
전 대대장 새벽 구보- 연대 유일의 보병 대대장인 파월은 부하들과 같은 속도로 뛰어야 했다. 겨울에도 영하 10도이하
아니면 구보. 새벽 5시반. 굳모닝 캠프 케이시~ (쌍 오늘 온도는 얼마야? 구보 하기 싫어 ㅜㅜ 추워~)
동두천 시내에 흑 백간 갈등이 있자 전 헌병을 풀어버려 당일로 없애 버림
자신이 아끼는 부하장교가 니그로(깜둥이) 라고 말한 것을 보고 받자 마자 해고함
그럼에도 소령이상은 훈포상 한번도 안줌- 그런건 사병과 초급 장교 하사관이 받는 거지 너희들 것이 아녀.
전시 비축 탄약 몰래 사용하여 대대적인 실탄 사격훈련- 워싱턴이 모르게 하라~
장비 유지 검열 전미군 꼴찌- 장비 보다 사람이 먼저다
파월은 한번은 영원히 군대를 떠나야 할 사건- 항공대대 장교 전부와 자신의 대대 장교전부가 장교클럽이
박살 나도록 패싸움을 한것, 파월도 흠짓 두둘겨 맞음- 계급 떼고 덤벼!!
항공단이 먼저 시작했음에도 자신의 대대에서 돈을 모야 수리비 제공함
그러나 건파이터는 2개 대대 분량의 장교들이 아침에 상처투성이로 식장에서 돌아다녀도 아무런 소리 안함
만약 지금이라면 건파이터도 모가지 나갈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의 결과는?
탈영 50% 감소 (그 이하는 힘들듯, 동두천에 부인이 절 기다려요~)
재입대율 200% 증가.
나중에 101사단 예하 여단장으로 가서 파월은 건파이터와 똑같이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종 문제 처리해 중령--- ? 더이상 군대에 그런거 없는데요
고교 졸업장 따게 해 중령-- ? 대부분 고교졸업자입니다.
영어 못하는 병사를 위한 클래스 만들어 중령-- ?영어 못하면 안받습니다. 언제적 군대 말씀하시는지??
그런게 있으면 건파이터가 벌써 처리했을것이다 . 왜냐하면 18공수군단(101,82공수사단)의 군단장이 그사람
이다.
건파이터가 정말 어떤 지휘관인지 알수있는 마지막은 이것이엇다 .
건파이터의 퇴임식은 82공수사단에서 했는데 건파이터는 파월을 불러 82사단의 의장 지휘를 지시한다.
"82사단 일을 감히 101 사단 대령인 제가 할수가..... 파월 당장 와, 예이~ -_-"
건파이터는 퇴임식 연설에서 죽은 사람 이름 부르며 울고 불고 하다가 갑자기 이미 파월에게 지시한것을
실행하도록 했다.
파월; 장교들 장교들만 뒤로 돌아!
건파이터: 장교들, 너희 사병들에게 경례! -o-
파월은 이렇게 썻다
그것은 감동적인.순전히 건파이터 에머슨 다운 짓이었다. 그리고 이 단순한 상징속에서 군에 대해서, 결국 누가 가장
경례를 받을만 한가에 대해서 , 해야 할 말이 모두 담겨있었다.
콜린 파월 자서전
번역 류진, 샘터사 1997년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