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삶2-6.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인간의 언어는 나라와 민족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비슷한 문법 체계를 사용한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주어를 지칭할 때 1인칭과 2인칭, 3인칭을 사용한다. 그리고 1인칭은 다시 단수와 복수 두 가지로 나뉜다. 일인칭 단수 ‘나’는 진짜 자아다. 일인칭 복수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자아다. ‘우리’를 명확하게 자아라고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보통 자아와 일치하기 보다는 자아를 둘러싼 환경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를 ‘나’와 동일시하는 민족이 있으니, 바로 한국인이다. 외국 심리학자들이 한국어를 분석할 때마다 이렇게 신기한 나라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두르곤 한다. 도대체 뭐가 그리 놀라운지 한국인이 자주 쓰는 표현 한 가지를 예로 들어 보겠다.
“우리 와이프가….”
일단 여기까지만 말해도 외국인들은 까무러친다. 어떻게 당신 아내가 내 아내도 되느냐, 그게 어떻게 우리 것으로 볼 수 있냐는 거다. 모르는 사람 입장에선 놀랄 만도 하다. 배우자를 공동체와 공유하는 건 사상 초유의 엽기적인 문화 아닌가.
이뿐이 아니다. 혼자 사는 사람도 자기 집에 친구를 초대할 때 흔히 “우리 집에 놀러 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외국인들은 생각이 많아진다. ‘뭐? 혼자가 아니라 다른 멤버가 있다는 뜻인가?’ ‘잠깐, 그럼 와인을 몇 병 준비해야 되지?’ 한국인에게는 당연한 표현도 외부에서 봤을 땐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무남독녀 외동딸도 자기 아빠를 부를 때 ‘우리 아빠’라고 한다. 외국인들이 놀랄 수도 있으니 이제부터는 ‘내 아빠’라고 부르려다 보니 어쩐지 버르장머리가 없어 보인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와 같은 서양의 언어 체계뿐 아니라 아시아 언어권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엄연히 my school이라고 하고, 내가 다니는 회사는 my company, 내가 사는 나라는 my country라고 부르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이여.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우리말로 ‘내 나라’라는 말을 해 본 적 있는가? 없다면 한 번 해 보시라. 친구들과 소주 한잔할 때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어휴, 요즘 내 나라가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몰라.”
아마 누군가 뒤통수를 때리며 “야, 네가 이 나라 샀냐?”라고 따질 것이다. 국정농단의 실체라도 된 듯 엄청난 구박을 받고 싶다면 당장 써 먹길 바란다.
‘나’와 ‘우리’를 혼동해서 쓰는 건 언어적 표현뿐이 아니다. 한국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엔 관계주의 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다. 글로벌 기업에서 외국인 채용 담당자가 받아 보는 한국인의 자기소개서는 조금 특이하다고 한다. 자기소개서에 정작 ‘자기’ 소개는 안 쓰기 때문이다. ‘자기’가 빠진 소개의 자리에는 ‘관계’가 들어간다.
저는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아래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반장을 했고, 대학교 때는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으며 여러 단체와 공동체에서 역할과 책임을 다했습니다.
우리에겐 그럭저럭 평범한 자기소개서다. 여러 집단을 거치며 내가 했던 일과 주변 관계에 대한 에피소드를 20개 정도 풀면 전형적이지만 딱히 틀린 것 없는 자기소개서가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글을 읽는 외국 기업에서는 ‘도대체 언제 자기소개가 시작되지?’라는 반응이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최근 집단주의가 강하기로 잘 알려진 일본인들의 자기소개서를 분석할 일이 있었다. 20~30대의 평범한 일본인들이 작성한 자기소개서 수십 장을 읽고 평준화시켜 보면 첫 문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저는 32세의 활발한 성격에, 운동을 좋아하며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이 뛰어난 나카무라라고 합니다.
다른 게 느껴지는가? 한 번은 나카무라의 자기소개서를 한국 기업의 채용담당자들에게 보여 주고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분들은 첫 문장부터 대단히 불편한 심기를 보이셨다. 이유를 묻자 어느 한 실장님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셨다.
“허허허, 이 친구 자기소개서에서 순 자기 얘기만 하고 있네요.”
자기소개서에서 자기 얘기를 하면 안 되는 문화가 바로 우리의 문화다.
한국인은 집단의 목표와 가치에 놀랄 정도로 충성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 덕에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공동체의 힘을 보여 주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그 많은 인파가 광장에 나와 한 목소리로 응원하고도 쓰레기 한 점 남기지 않아 전 세계의 박수를 받았다. 코로나 집단 감염 초기에도 마찬가지. 다른 나라 국민들이 마트에서 사재기를 하느라 급급할 때 도움이 필요한 장소에 손을 내밀어 문제를 함께 해결했다. 마스크가 아무리 답답해도 남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코끝까지 올려 쓰고, 놀러 나가고 싶어도 공동체의 분위기를 봐서 참는 민족이다.
뭘 해도 잘 뭉치는 우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동일한 취향 또한 자랑한다. 〈사랑이 뭐길래〉,〈아들과 딸〉,〈허준〉,〈첫사랑〉,〈모래시계〉…. 45% 이상의 역사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들이다.〈사랑이 뭐길래〉는 무려 59.6%가 나왔으니, 단일 채널을 가진 북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만화 영화인〈날아라 슈퍼보드〉또한 40%를 넘었다. 이 정도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봤다는 얘기다. 물론 나도 보았다. 아직도 가만히 있노라면 ‘치키치키 차카차카 초코초코촉’하는 주제가가 귓가에 맴돌 때가 있다. 만화 영화도 챙겨보는 만큼 당연히 위에 적힌 다른 드라마들도 모두 보았다. 왜 그토록 기를 쓰고 봤을까? 훌륭한 작품을 즐기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드라마〈모래시계〉의 별명은 ‘귀가시계’였다. 너도 나도 드라마를 보러 집으로 들어가 버리니 방영 시간엔 길가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같이 술 마셔 줄 친구도 없으니 전 국민이 애청하는 드라마를 함께 보는 수밖에 없다. 일단 오늘 밤 드라마를 시청해야 다음날 사람들을 만날 때 할 얘기가 생기니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해 왔다. ‘우리’가 좋아하는 게 곧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믿어 왔다.
이제 누굴 만나 드라마 얘기로 떠드는 게 아련한 과거의 일처럼 되어 버렸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 사람을 만나는 시간보다 나 홀로 머무는 시간이 커지고 있다. 외롭고 불안한 나날이 계속된다. 이 사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내 일과 나라 경제는 어떻게 바뀔지, 참으로 초조하고 막막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이처럼 불안하고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문득 문득 달콤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여기서 ‘문득 문득’이 포인트다. 사람이 24시간 내내 달콤하다면 정상은 아닐 테니까. 그런데 사업도 안 되고 건강도 걱정되는 판국에 느껴지는 오묘한 달콤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공동체성이 가려져 진짜 개인을 잊은 한국인들, 늘 정신적으로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온 한국인들, 혼자 있는 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적다는 한국인들이 처음 느껴 본 고독의 달콤함이 아니었을까?
비대면 시대, 이제부터 남들 생각 않고 진짜 달콤함을 누려볼 때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입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참 어렵다. 그게 뭔지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혼란스러운 내면에 대고 빠른 비트로 외쳐 볼 시간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위 글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에 심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아트 마크먼 교수의 지도하에 인간의 판단, 의사결정, 문제해결 그리고 창의성에 관해 연구하였고, 현재는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아주대학교 창의력연구센터장을 지냈고 ㄱ임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대학교 각종 교육기관, 기업에서 왕성하게 강연하고 있고, ‘어쩌다 어른’, ‘세바시’, ‘책 읽어 드립니다’, ‘나의 첫 사회생활’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게 있는 “김경일”교수의 저서 ‘적정한 삶’ 제2장 ‘비대면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들’ 중 일부를 옮겨본 것입니다. 그 외 저자의 저서로는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어쩌면 우리가 거꾸로 해왔던 것들”, “십 대를 위한 공부사전” 등이 있고, 역서로는 “혁신의 도구”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