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 강가로 나가
오월 초순 사흘 연휴가 끝난 화요일이다. 새벽에 잠을 깨 전날 다녀온 창원천 산책을 소재로 일상 스케치와 시조를 남겼다. “창원천 천변 따라 하류에 다다르니 / 길섶에 나온 칠게 발자국 딛는 소리 / 잽싸게 옆걸음으로 몸 숨기기 바쁘다 // 썰물에 드러나는 모래톱 가장자리 / 도요새 암수 한 쌍 정답게 머리 맞대 / 먹잇감 찾아내느라 부리 콕콕 찍는다” ‘오월 봉암갯벌’ 전문.
연휴 중 이틀은 날이 궂었는데 새날이 밝아와도 하늘엔 구름이 끼어 있었다. 아침 식후 배낭에 우산을 챙겨 넣고 산책 차림으로 현관을 나섰다. 소답동으로 나가 창원역을 출발해 대산 강가로 가는 1번 마을버스를 탔다. 도중에 근교 회사로 나가는 직장인과 사립재단 고등학교로 다니는 학생들이 함께 타 붐볐다. 들녘 비닐하우스 일을 가는 부녀들은 앞서 떠나 덜 혼잡한 편이었다.
주남저수지를 비켜 들녘을 거쳐 대산 산업단지를 지난 가술에 이르자 승객은 모두 내렸다. 잠시 국도를 달려 모산을 지난 제1 수산교에 이르러 내가 마지막 승객이었다. 하차 시 기사와 인사를 나눴는데 중년 사내가 다리목에 무슨 용무로 내렸을까 궁금했지 싶다. 민가가 없고 평소 손님이 승하차하는 정류소가 아니어서다. 드물게 걸어서 수산교를 건너려거나 산책객인 경우가 있다.
이번은 후자의 경우로 4대강 사업 자전거길을 걸으려 가끔 이용하는 정류소다. 둑에서 제1 수산교 교각 밑으로 가 대산 문화체육공원으로 향해 걸었다. 갯버들은 신록이 싱그럽고 물억새와 갈대는 새 움이 돋으면서 초록으로 덮여가는 둔치였다. 25호 국도에서 낙동강 강심에 가로놓인 수산교는 낡고 폭이 좁은 옛 다리이고, 그 곁으로 새로운 수산대교가 놓여 ‘제1 수산교’로 불렀다.
젊은 날 밀양에서 교직 출발과 신혼기를 보냈기에 마산을 거쳐 고향 의령으로 오갈 때 제1 수산교로 시외버스가 다녔다. 그즈음 유치원 다니기 이전 큰 녀석이 차창 밖 높은 송전철탑이 연이어 세워져 있음을 보고 ‘아빠! 저긴 미사일이 왜 저렇게 많은 거야?’라고 물어왔다. 그때가 중동에서 석유파동과 함께 미국과 이라크 간 전쟁이 외신을 타고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다시피 했다.
수산 읍내를 비켜 밀양으로 가는 우회 25국도 수산대교와 또 다른 추억이 떠올랐다. 당시 서울에서 성수대교 붕괴 이후 대형 교량에서 안전을 최우선시한 철저한 시공으로 건설된 기억이 남았다. 수산대교로는 좁긴 하지만 보도가 확보되어 4대강 사업으로 자전거 통행도 가능하게 되었다. 1번 마을버스로 모산에서 내려 수산대교를 걸어서 건너 수산이나 명례 둑길로 여러 번 걸었다.
대산 문화체육공원은 꽃동산을 잘 가꿔 탐방객이 더러 찾는다. 유채꽃은 저물었고 장미가 화사하게 피고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십여 명 인부들이 베고니아 모종을 심느라 손길이 분주했다. 잔디 보호 기간이 끝난 파크골프장에는 차를 몰아온 동호인들이 운집했다. 중년 남녀들은 삼삼오오 팀을 이뤄 잔디밭을 거닐며 작은 공을 겨눠 맞춰 굴러가게 했지만 내 관심은 끌지 못했다.
연전 방송 드라마에서 ‘우영우 팽나무’로 더 알려진 북부리 언덕 당산나무 아래로 갔다. 인근 국도 신설공사 현장 재해 안전 담당관이 잠시 산책 나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시공사가 아닌 발주처가 토목 건설 공사 현장으로 파견한 감독관인 듯했다. 사내가 먼저 떠난 언덕에서 드넓게 펼쳐진 둔치와 들판을 바라봤다. 동부마을에서 들길을 걸어 비닐하우스단지를 지나 가술로 향했다.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감자와 당근 수확을 마친 곳은 모내기를 준비했다. 연중 특용작물을 가꾸는 시설단지는 풋고추나 가지가 자라고 있었다. 국도변 초등학교 울타리와 접한 묵혀둔 빈집 고샅에 삼잎국화가 높은 키로 자라 잎이 쇠어가고 있었다. 그냥 두기는 아까워 끄트머리 보드라운 잎사귀만 골라 채집해 봉지에 채웠다. 좋은 나물이 될 삼잎국화는 마을도서관 사서에게 건넸다. 2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