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리의 나이 51세 곰골교 건립 당시 부락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식 구조물 이자 곰골 부락에 존재 하는 역사다.
그런데 이 다리가 농로 개설 포장 공사로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롭게 다리가 놓여지게 되었다.
이 다리가 가설 준공된 시기는 1971년 4월 말이다. 곰골 부락으로 들어 오는 길은 폭이 넙지 않아 겨우 승용차 한대가 지나 갈 수 있는 좁은 길로 교량의 폭 또한 기껏해야 5m전후이니
옛날의 경우 제법 굵은 통나무를 몇개 걸치고 그 위에 소나무 가지를 얽기섥기 걸치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은 섶다리 였다
섶다리의 경우는 주기적으로 보수를 해야 하고 몇년이 지나면 통나무를 교환 하기도 해야 하고 또 비가 오고 나면 다리 상판에 구멍이 나기도 하어 풀편함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그런데 70년대초 새마을 운동이 시작 되면서 초가를 걷어 내고 스레이트로 바꾸는 지붕 개량과 길을 넓히거나 다리를 놓는등의 운동을 주로 추진을 하였는데 이 다리를 놓는데 정부 지원으로 시멘트가 나왔단다
워낙에 국가 제정이 부족하고 가난하다 보니 다를 놓는데 시멘트 지원이 전부 이고 나머지는 마을 자체적으로 조달을 해서 다리를 놓아야 했단다
그러니 철근 모래 자갈등을 동네 가구마다 얼마씩 갹출해서 구입하고 다리를 놓는 노동력은 곰골부락 거주하는 각 가구마다 부역으로 대신해서 다리를 완공 했다고 한다.
그렇게 완공한 이 다리는 얼마나 견고하게 잘 놓아졌는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상판이나 교대에 실금하나 생기지 않은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데
그때 당시 공사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 다리가 지금껏 완벽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배우고 익힌 공병 기술자의 빈틈 없는 공사 관리와 공정의 진행 덕분이라고 한다.
小處不渗漏(소처불삼루) 작은 일도 빈틈없이 처리하고, 暗中不欺隱 (암중불기은) 어둠 속에서도 속이거나 숨기지 않으며 末路不怠荒 (말로불태황) 실패하고서도 낙심하지 않는다면, 纔是個眞正英雄 (재시개진정영웅) 그는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라 할 것이다. - 菜根譚-
당시 같은 시기에 놓은 다리들의 경우 대부분이 10년을 못넘기고 떠내려 가거나 다리가 내려 앉기도 해서 다시 공사를 하거나 새로이 다리를 놓기도 했는데 이 다리의 경우 아직까지 건재하다.
그때만 해도 어디 건설 회사나 업자가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공사의 전부를 정부로 부터 시멘트만 지원 받고 나머지는 주민의 손으로 해야 했으니 기술이 없는 동네의 경우 부실공사로 다리의 수명이 그리 길지 못했다고 한다
이 다리의 건설을 총괄 하신분이 故김일득 어르신 이신데 6.25 첨전 용사로 미군 공병대에 근무를 하시면서 배운 지식으로 정확한 철근 및 시멘트 모래 자갈의 배합 비율 그리고 양생 기간 준수등 철저한 공사 관리와 진행 덕분에 50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온전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여담 이지만 어르신께서는 적어도 공사나 무슨 구조물을 건립 하는데 있었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더하여 공사에 필요한 정량의 재료를 산출해 내고 또 빈틈 없는 수치 관리와 완벽한 공사기간 산출 등등
요즘 처럼 토목이나 건설 시공에 대한 기술이 보편화 되지 않은 시절 어르신이 존재는 우리 동네 각종 공사 현장의 부실을 방지함은 물론 완벽한 공사 현장의 공정 관리를 통해 동네 발전에 기여하신 공로는 실로 엄청났다 할 것이다.
일전에 이 다리의 철거를 이야기 하면서 어르신의 아드님 되시는 용현 형이 이 다리 공사기간 중의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며 한참을 웃었는데
내용인즉 이 형이 초등학교를 졸업 하던 해로 도량형에 관한 이야기 였는데 상판에 들어 가는 철근의 갯수를 산출 해야 하는 과정에서 어르신은 자로 이야기 하시니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이 형은 cm나 m에 대한 이해는 있었지만 자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터라 그 것은 안배워 모른다고 했다가 이노무자쓱 그것도 모르나? 학교 헛 댕겼네 하면서 크게 혼이 나고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 인데
그러고 나서 "ㄱ"자 모양의 철자흘 주시면서 여기서 여기 까지 짚어 주시며 이게 한자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알고 보니 한자가 30cm 였다며 다리 공사 과정을 이야기 하시는데 그 날의 생생했던 기억이 벌써 50년을 넘어 세월이 되었단다.
참 애환이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다리로 우리네 생활 가까이에 있었건만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구구절절 참 사연도 많아았던 다리다.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쫒아 도회로 떠나가는 이사짐을 실은 삼륜차 와의 이별도 이다리였고 또 새신랑 새색시의 신행길도 이 다리였으며 이승을 떠나는 망자의 꽃 상여가 나가는 길도 이 다리였다.
그리고 우리네 일상에서 수없이 많은 발 걸음들이 이 다리를 스쳐 지나길 반복 했으며 가을이면 소달구지 바리바리 오곡의 곡식을 실어 나르기도 했고 또 무안 장날이면 막걸리 한잔의 기대도 아이들의 기대도 이 다리를 통해 실어 나르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다리 이제 얼마있지 않으면 농로개설및 포장 공사로 해체되고 새로운 다리가 건설될 것이다.
物于天地之間 未有不化者也 (물우천지지간 미유불화자야) 천지 사이에 있는 존재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 張維 / 谿谷集-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시간 지나가 버리면 묻혀버릴 이야기 이지만 그 시절을 살아 내셨던 우리네 부모님들 손수 등짐으로 자갈과 모래를 지어다 나르며 한마음으로 참여해 만들어 낸 새마을 운동의 상징이라 그런지 못나 아쉬운 마음 가시지 않는다.
그 세월 이제 50년 당시 공사에 참여하신 대부분의 어르신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그 어르신들의 얼굴이 주마등 처럼 공사 현장의 모습과 겹쳐 지나간다.
※ 곰골교는 밀양시 무안면 웅동리 곰골부락 초입에 있는 다리다(웅동의 순 우리말 이름이 곰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