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차의 명줄이 끊기지 않고 선암사 주지 지허스님을 통해 이어져온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백제가 전해 준 전통차 문화에 사무라이식 ‘형식미의 극치’를 얹은 일본 다도(茶道)가 우리 차문화로 둔갑하는 현실이지 않은가.
한국자생 덖음차의 다도는 모든 형식을 배제하고 차의 진정한 내용에 몰입해 각기 자기 성품에 따라 즐겁고 편안하게 차를 마시는 것이다. 일본이 대량생산 품종으로 개량한 야부기다종 녹차문화에 우리 전통차문화는 질식돼 왔다. 선암사 지허스님이 일제치하와 해방후 조계종-태고종 분쟁, 여순반란사건등 현대사의 아픔과 비극을 지혜롭게 이겨내고 한국 전통 사찰의 아름다움과 전통차의 맥을 고스란히 간직해왔기에 비로소 전통차문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4세에 선암사에 출가해 50여년동안 차에 관한 소임을 맡는 다각(茶角)으로 일한뒤 선원장(禪院長)이 된 스님은 이 책에서 ‘선다일여(禪茶一如·참선과 차의 경지는 하나)’의 진경을 펼쳐보인다.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다서(茶書)의 고전인 당나라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이나 차의 중흥조 초의선사의 ‘다신전(茶神傳)’ ‘동다송’의 오류도 걸러내고, 우리 차역사와 차문화에 대한 그릇된 상식을 이책은 바로잡아준다.
초의선사가 곡우 5일전에 딴 우전차가 상품이라고 한 것을 두고, 국내 녹차 생산자들이 그 지방의 기후와 그해의 절기는 고려치 않고 곡우 전에 우전차를 만들기 위해 차나무에 비닐을 씌우는 식으로 재배하는데 이런 식으로는 온전한 자생차의 향(香)·색(色)·미(味)를 얻기 힘들다고 스님은 질책한다. 자생차는 지축을 향해 뿌리가 깊숙이 내려가 암반층에 있는 담백한 수분과 무기질을 섭취하는 것이 생명이다.
그런데도 일본 야부기다 차나무는 차나무의 본성인, 이 ‘직근(直根)’성을 거세하고 옆으로 뿌리가 자라는 ‘횡근(橫根)’성으로 변질됐다. 비료와 농약 없이는 살수 없게 된 이 야부기다 녹차를 마시고 수전증환자가 증가해 일본에서조차 이 녹차는 양식있는 다인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자생차는 야부기다종이나 변종 자생차가 감히 흉내내기 힘든 세계적인 문화상품이다.
스님은 1980년대 일본차의 일인자라 자부하던 오가와 에이코 여사 일행이 8년동안이나 우리 전통 덖음차 제조법을 배우려고 했으나 결국 흉내만 냈을 뿐이란 일화까지 소개한다. 솥에서 손으로 덖고 멍석에 비비는 것을 9차례 넘게 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된장맛·김치맛·숭늉맛등 가장 한국적인 맛을 종합적으로 은은하고 담백하게 나타낸 것이 바로 우리 차의 맛이다.
이 책 제작에 관여한 면면도 예사롭지 않다. 선암사에서 ‘취화선’을 촬영한 임권택 감독이 그 인연으로 이 책의 제작총감독을 맡았고, 안상수씨가 표지디자인을 했으며 기획은 최성민 한겨레신문기자가 나서는 등 호화배역이 책의 배면에 깔려 있다. (작품성 ★★★★★ 대중성★★★★ 만점 5개)
정충신기자 csjung@munhwa.co.kr
‘마음 한잔 마시고 가게’…지허 스님의 茶
출처 : 경향신문
‘맑은 경쇠 소리에/다시 햇차를 딸아 난간에 기대니/묵은 비 겨우 개고 가볍게 바람 쐬어/묵은 비 겨우 개고 가볍게 바람 쐬어/ 빈 발의 낮기운 수정처럼 차갑네’(한용운의 중상사 난간에서 차 마시기).
한 잔의 차는 고요와 안정을 가져다준다. 차를 마시는 것은 곧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래서 당나라의 조주선사는 ‘끽다거’(喫茶去·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라는 화두를 던지지 않았던가.
나무(木)의 어린 싹(艸)을 사람(人)이 가공하여 마시는 차(茶)는 그 역사가 5,000년 가까이 된다. 인도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것은 2,000여년 전. 기록에 따르면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금관가야에 시집오면서 차나무와 차씨를 가져와 처음 소개했다. 이어 백제시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와 함께 차를 들여와 호남지방에 심었다. 본격적으로 차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전통차가 처한 현실은 참혹하다. 대부분 전통차라고 알고 있는 녹차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자란 차나무가 아니라 일본이 대량생산을 위해 품종을 개발한 야부기다 차나무의 잎으로 더욱더 새파란 색을 내기 위해 쪄서 만든 차다. 게다가 일본의 다도가 우리 고유의 다도로 둔갑해 알려져 있는가 하면, 기후나 풍토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곡우 전에 딴 차가 우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서 최상품 대우를 받으며 팔린다.
다맥의 전통이 16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선암사에서 차를 기르고 덖어온 지허스님이 말하는 우리 차의 현실이다. 스님은 지난 10년간 매달 일반인을 상대로 ‘지허스님의 산중다담’을 열어 차를 마시며 우리 차 이야기를 나눠왔다. 이를 바탕으로 이 책 ‘지허스님의 차-아무도 말하지 않은 한국 전통차의 참모습’을 펴냈다.
대자연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 차라고 예찬하는 저자는 자생 차나무의 특징을 몇가지로 요약한다. 우선 뿌리가 곧추 뻗어나가는 직근성으로, 예로부터 차나무가 지조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된 이유다. 또 꽃과 함께 전년에 맺은 열매를 함께 볼 수 있는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다. 풋내가 아니라 구수한 냄새가 나고 다갈색이 감도는 전통차는 낱낱의 새순이 아니라, 삼지창처럼 차순에서 세 장의 잎이 올라와 한 몸을 이룬 ‘1창2기’를 따서 만든다. 딴 찻잎은 솥에서 덖어 이를 멍석에 놓고 손으로 비비기를 아홉번 이상 되풀이해야 수분이 빠지고 차성분이 농축된다. 그래서 차를 만드는 일은 도를 깨우치는 일과 같다.
저자는 다도도 지적한다. 형식에 치우치는 것은 일본식. 일체의 형식을 배제하고 눈으로는 색을 보고, 코로는 향을 맡고 입으로 그 맛을 음미하면서 그저 각자 성품에 따라 차의 진정한 내용에 몰입하는 것이 우리 고유의 다도라는 설명이다. ‘차를 즐기되 알고나 즐기라’는 노스님의 꾸짖음이 가슴을 울린다.
책에는 이밖에도 다도와 다례, 선암사의 다맥 등이 엮어져 있으며 1954년 불교 분규 사건 등도 실렸다. 책 첫머리를 살펴보면 이름이 낯익은 문화 예술인들이 눈에 띈다. 영화감독 임권택씨가 책을 총감독했고, ‘취화선’에 장승업 대역으로 출연한 김선두 중앙대 한국화과 교수가 그림을 맡았으며, 표지 디자인은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안상수 교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