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손님!....손님?”
잠귀 밝은 미자르가 정신없이 잠에 취해 있는 경진을 흔들어 깨
웠다. 경진이 눈을 뜨자, 창문의 문살을 피해 창호지를 여과해 들
어온 수많은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요?”
“손님, 진시(辰時,오전7시-9시)가 시작되었아옵니다. 조반 드
실 시간이옵니다.”
경진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미자르에게 찾았다.
“한식경 후에 가져오라고 하세요?
경진의 코앞에 나타난 미자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반은 한식경(30분, 밥 한끼 먹을 시간) 후에나 가져오시
오.”
“예, 알겠사옵니다. 세수 물은 어떻게 할깝쇼?”
하인이 공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청마루에 두고 가시게”
방안에 들여놓은 세숫물로 경진과 미자르가 머리를 맞대고 씼
었다.
“미자르 이 사람들이 한 사람 분 식사만 가져 올 텐데 어쩌지
요?”
“호호! 그야 나만 먹고, 자기는 굶으면 되지요.”
“에구, 욕심장이구만. 알았어요.”
경진이 그녀의 볼을 살짝 쥐며 말했다.
“자기, 이렇게 하면 안 될까요. 밥을 많이 먹으니까, 두 사람
분을 가져오라고 하세요.”
“그렇군요. 그럼, 수저와 젓가락은요.”
“후훗! 자기가 내게 떠 먹여주면 되지요. 아니면 자기는 수저
잡고, 나는 젓가락 잡던지요.”
그들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마치 다정한 연인과도 같은 장난
을 쳤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후에 가져온 조반을 그렇게 소꿉장난
하듯이 사이좋게 먹었다.
“나리! 한성부(漢城府:현, 서울시청) 관원이 방문 했사옵니
다.”
경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미자르 얼굴을 보았다.
“글쎄요, 무슨 일일까요?...나는 투명인간으로 변해 있을게요.
왜 왔냐고 물어 보세요”
“무슨 일로 왔는지, 관원에게 물어 보시오!”
“예, 저는 한성부에서 나리께서 입으실 의복을 가지고 왔습니
다.”
경진은 그 소리를 듣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들어오시오”
“아닙니다. 전달만 하고 오라는 판윤(서울시장) 어른의 엄명이
계셨사옵니다. 의복을 다방 별감에게 맡기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밖이 잠시 조용하는 듯하더니 별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리, 의복 착용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들어오시오”
궁중 다방별감이 문을 열고 들어와, 두툼한 보자기를 공손이
내려놓더니, 경진의 이상한 차림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그것을 풀
기 시작했다.
“외출복 2벌, 평상복 2벌, 궁중예복 1벌, 갓과 망건 1개씩, 태
사혜(남자 가죽신) 1족, 목화(목이긴 관복용 가죽신) 1족 이옵니
다”
“알겠소. 필요할 때, 그때 부르겠소. 그리고 별감을 비롯해서
하인들에게 사랑채에는 오지 못하게 하시오. 내가 신경이 날카로
워져 있소. 내일 주상께 알현할 생각을 정리해야 합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경진의 단호한 말에 별감이 긴장하며 문을 나서려할 때, 경진이
그를 다시 불렀다.
“참! 내가 머리가 짧은데, 머리에 덧씌우는 머리는 없소?”
“아, 예! 가채(가발)라고 하옵니다”
“그러면 그것도 준비 해줄 수 있겠소? 그리고 턱에 붙이는 것
도 있소?”
“예! 가채는 준비할 수 있는데...”
“그러면 가채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수염을 만들어 주시
오!‘
“예, 말씀대로 준비 하겠사옵니다.”
경진은 궁중에서 파견 나온 다방별감에게 냉담한 어투를 사용했
다. 미자르가 그들이 안채를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선을 그으라는
당부에서였다.
다방별감이 나가자, 미자르가 경진의 코앞에 나타났다. 두 사
람은 방에 놓여있는 3가지 종류의 옷을 만지며 신기해했다. 옷 구
경을 끝내고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잠시 그
들의 공간에 적막이 흘렀다.
“미자르! 심심하지요? 밖에 나갈 수도 없고...”
“그렇죠? 후후! 재미있는 것 가르쳐 줄까요?”
그녀가 그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냈다.
“또요?”
“싫어요? 어때서요?...”
“하하! 아니에요.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아서...청춘도 아니
고...”
미자르의 새침한 표정에 경진이 미안해하며 그녀의 기분을 거들
었다.
두 사람은 또다시 짙은 안개 같은 사랑의 운무를 만들기 시작했
다. 방안에는 옅은 무지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쌍
무지개가 펼쳐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운무가 서서히 걷
히었다.
“호호! 자기 이러다가 뼈만 남겠다. 크크...”
“그러게요. 내년 한가위 보름달 볼 때까지 살 수나 있을까 모
르겠어요. 하하! 나 죽으면, 당신도 조선시대에서 계속 살아야 할
텐데요?”
그녀가 열락의 언덕 끝에서 가쁜 숨을 쉬고 있는 그에게, 미안
해하며 옷을 입었다.
“미자르, 궁금한 것이 있어요.”
“뭐죠?”
“나도 당신처럼 젊어질 수 있을까요?”
“후훗! 그건 힘들어요. 우리 인체는 약 60조개의 세포로 구성
되어 있어요. 그리고 세포의 수명은 몸의 부위별로 다르지요. 가
장 수명이 짧은 여자의 난자(1일)부터, 20일간 살면서 계속 분열
하는 피부세포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다 하는 날까지 같이하는 신
경세포와 근육세포가 있어요. 그러한 세포들이 끊임없이 생성, 마
모, 교체의 사이클을 만들며 인간의 수명을 한정지어요. 그런데,
게놈지도의 세부내용이 완성 되면서, 각각의 유전자 정보의 비밀
이 풀렸고, 세포가 좋아하는 양분 공급, 분열지연과 소멸되는 것
을 억제 시키는 물질들을 개발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것을 보름에
한 알씩 먹으면, 수명이 두 배로 늘어나게 돼요.”
“그렇다면 당신이 살던 2126년의 수명은 어느 정도지요?”
“보통이 120살까지 사는데, 더 늘어날 거예요. 2102년에 이약
이 시판되기 시작했고, 그 당시에는 보통사람의 수명이 100세가
조금 넘었어요. 내가 2083년생이고 19살부터 이 약을 계속 복용했
으니까 24년을 복용했네요.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약효가 더
좋은 것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인간의 수명을
300살까지 예상하고 있어요. 놀랍죠?“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네요.”
“맞아요. 이 약이 개발된 해, 19살부터 먹기 시작한 제가 혜택
을 가장 많이 받은 편이지요. 그 약은 보통 자연성장이 끝난
18살부터 먹거든요. 우리시대에는 나이에 대한 혼선이 많아요. 그
약을 아무나 먹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전체 인구의 10%도 안돼
요. 상당히 고가거든요. 그러다보니 시간의 나이와 신체의 나이가
뒤죽박죽이어서 혼란이 커졌어요. 지금처럼 내가 경진 씨 보다 시
간 나이는 4살 많은 43살이지만, 내가 훨씬 젊어 보이는 그런 혼
선이지요. 그러다보니 차차 나이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기 시작했
어요. 다행히 숨겨놓은 내 타임머신에, 최근에 개발된 최고의 약
이500캡슐정도 있어요. 40년분은 될 거예요. 이번에 것은 1달에
한번만 먹어도 되는 것이에요.”
그녀의 계속되는 놀라운 얘기에 경진은 할 말을 잃었다.
조물주에 대한 도전이었다. 대자연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생명
의 수명을 늘리고, 생명을 조작하고,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 창조
신에 대한 도전이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 카인의 저주가 연장
되는 것인가? 경진은 짧게 지나는 호기심과 함께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이거예요! 드세요! 세포의 수명이 3배로 늘어날 거예요. 신체
나이가 1년에 4개월만 진행돼요. 더디게요.”
미자르가 미색 반투명의 껍질을 까서 캡슐 1개를 그의 입술에
갖다 댔다. 원형으로 된 동전보다 약간 작은 캡슐이었다.
“이것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갑작스러
워서...”
“바보, 아저씨!”
미자르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하며, 강제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경진 씨, 답답하죠? 방안에만 있기만 답답하니, 내가 집 구조
와 하인들의 동정을 보고 올 테니 조금만 혼자 있어요.”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경진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투명인간화 되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하하! 성질도 참 급하기도 하지...’
경진은 혼잣말을 하며 하루 반나절동안 자신에게 쏟아져 온 무
수한 일들에 넋이 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미자르가 먹여준 약
의 떨떠름한 뒷맛만을 느끼고 있었다.
‘아! 어머니!...’
약의 뒷맛을 느끼던 경진에게 2년 전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오로지 자식들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
하셨던 어머니가 암으로 고통스럽게 돌아가셔도, 병원만 믿고 속
수 무책으로 스러지던 어머니의 고통어린 얼굴이 생각난 것이다.
‘이 약만 있었으면 정상세포의 활성화로 암이 치료되어 돌아가
시지 않았을 텐데...’
경진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회한 뒤에,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
지의 모습과 서울의 가족들의 모습이 천천히 들어왔다.
‘서울 집은 지금쯤 난리법석이 났을 텐데...’
추석날 한 집의 가장이 소리 소문 없이 증발되었으니, 나머지
식구들이 황당해하고 혼란스러운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이라
도 집에 늦게 들어오면 휴대폰으로 수십 통의 전화를 해대던 성질
급한 와이프의 얼굴과 중학교 2학년인 큰 애의 발랄한 모습, 얼굴
에 줄줄 흐르는 애교로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로 우뚝 선 6학년짜
리 막내딸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운 좋게 1년 뒤에 돌아간다 해도 나 없이 그동안 잘 살고 있
으려나?...’
그는 마음이 에이는 듯,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
고 힘없이 벽에 기대었다.
그때, 미자르가 형체도 없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돌아보고 왔어요... 어머! 경진 씨 어디 아파요?...”
“아뇨, 그냥 생각할 일이 있어서요.”
미자르가 경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살며시 안아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당신 마음 다 알아요.”
두 사람은 가볍게 안은 상태로 잠시 동안 서로에게 무언의 말을
했다.
“자기! 나, 이 집 구석구석 다 둘러보고 왔어요. 집이 생각보
다 넓어요. 조그만 연못도 있고요.”
“아, 그래요? 잘됐군요. 그럼 기분이나 전환할 겸, 조금 후에
나가죠.”
“예, 그래요. 집 구조는, 우리가 기거하는 사랑채에서 나가면
조금 떨어져서 양 옆으로 행랑채 두 채가 있고, 거기에 다방 별감
과 하인들이 따로 사용하고 있어요. 우리 방 뒤쪽에는 인공연못을
통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도 있어요. 그런데 문고리가 채워져 있
어서 그냥 왔어요. 이따가 거기도 함께 가 봐요.”
미자르가 그의 코앞에서 그의 침울한 표정을 풀어주려는 듯, 수
다형식의 애교스런 얼굴을 하며 얘기했다.
“그럼 지금 나가죠?”
경진 역시 어색한 침묵을 지키기가 어려운 듯 그녀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방안에서 나와 아담한 연못을 다정히 거닐었으나, 한
사람만이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그림자는 두
개였다.
“경진씨. 내가 이끄는 대로 다녀야 되요. 나는 지금 투명인간
화 되어 있지만, 그림자는 생기거든요. 그래서 햇빛 받는 반대 방
향에 내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만 그림자가 하나가 되어서 사람
눈에 뜨이지 않거든요. 후후! 투명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뭔
줄 알아요?”
“글쎄요?...”
“바보!... 좀 전에 말했잖아요. 자신의 그림자하고, 개나 후각
이 발달한 맹수가 가장 무서워요.
햇빛에는 그림자가 노출되고, 개는 냄새를 귀신같이 맡거든요.”
“하하하! 투명인간이라고 완전하지는 않군요. 그리고 우리세
대에는 적외선 카메라나 열 감지 카메라가 있거든요. 거기에도 다
걸릴 걸요?”
경진이 짓궂은 표정으로 그녀를 놀렸다.
“예에!... 그 시대에도 그런 게 있었나요?”
“하하! 그럼 내가 사는 곳이 미개한 줄 알았던 모양이죠?”
“호호! 미안해요”
두 사람은 하나의 모습으로 다정하게 연못과 중문을 지나서 안채,
그리고 별채며 사당까지 사이좋게 둘러보고 있었다.
카페 게시글
━━━━○ 이야기 샘터
콩다칸 팥다칸(장편소설) - 인간 수명, 300살까지의 神藥 (8회차)
시간여행&
추천 0
조회 101
07.04.30 17:12
댓글 3
다음검색
첫댓글 오래 사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네요..투명인간이 무서워하는게 그림자군요.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으니...
ㅎㅎ 글 쓰다보니, 투명인간도 그림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투명인간도 그림자가 있습니다. 단지, 빛만 차단할 뿐이지요. ^^*
여행님의 생각주머니는 신기함으로 기득차 있는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