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일 강론 모음
바람과 해님
어느 날, 바람과 해님이 누가 힘이 더 센가 하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내가 차가운 바람을 힘껏 불면 모두가 추워서 얼어붙고 말지.”하고 바람이 말하자 해님도 “내가 햇살을 힘껏 내리쬐면 모두들 더워서 타 죽고 말지.” 어느 쪽도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구 힘이 더 센지 겨루어 봅시다.” 하고 바람이 말하자, 해님도 찬성하였습니다. “저기서 걸어오는 나그네의 입은 옷을 벗기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합시다.” 그러자 바람이 뽐내며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긴 거나 다름없어. 저 정도 겉옷쯤이야 단번에 불어서 날려 버릴 거요.” 바람은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가 푸우하고 내뿜었습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쌩쌩 나그네에게 불어 갔습니다. “아니? 갑자기 추워지는데… 옷을 더 껴입어야겠군.” 나그네는 보따리에서 옷을 여러 벌 꺼내어 껴입었습니다. “이런? 다시 한 번 해보자. 푸우!” 바람은 다시 숨을 내뿜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옷을 벗기는커녕 더욱 단단하게 옷깃을 여미고 걸어갔습니다. “바람님, 안 되겠어요. 이번에는 내 차례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해님은 따뜻한 햇살을 나그네 쪽으로 보냈습니다. “아니, 무슨 날씨가 이래? 갑자기 따뜻해지는군.” 나 그네는 땀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님은 더욱 뜨거운햇살을 나그네에게 보냈습니다. “아이구, 더워! 옷을 전부 벗어 버려야겠군.” 나그네는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고 벌거숭이가 되어,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갔습니다. 바람은 해님의 힘에 감탄하여, “나처럼 힘만 가지고는 사람을 움직일 수가 없군요.”
프랑스의 라 퐁테느의 우화에 나오는 ‘바람과 해님’ 이야기입니다. 이 우화를 들려 드리는 까닭은, 자캐오라는 세관장을 사람들이 냉대하고 소외시켰을 때와 반대로 예수님께서 그를 따뜻하게 불러주고 식탁 공동체로 그를 받아들였을 때의 태도 차이가 그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돈은 많이 벌었지만 그 때문에 동족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와 같은 세리들을 친구처럼 받아주시는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을 꼭 만나 뵙고 싶어했으며, 역시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런 받아들임과 사랑을 체험한 자캐오는 그동안 그토록 모질게 모았던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자캐오라는 세관장이 사람들의 경멸과 비난의 찬 바람을 받아 점점 움츠러들었던 것에 반하여 예수님께서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며 받아주었을 때 모든 것을 나누는 사람으로 변하였음을 바라보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율법과 단죄가 아니라 믿음과 자비에 있음을 크게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힘으로 회개라는 큰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우리도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안성철 마조리노 신부 성바오로수도회 준관구장
출처 : 서울주보
눈으로 말해요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눈길에 담긴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말해요’ 어느 노래가사에도 있는 이 말은 참으로 공감을 자아내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은 입으로서만이 아니라 눈으로도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눈은 입보다 더 정직하게 말을 하지요. 그래서 때로는 눈으로 하는 말이 더 깊게 가슴에 남을 때가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의 일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가정 방문을 오셨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일을 나가셨고 어머니는 허리를 다치셔서 누워계셨지요.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못한 집에 신부님이 찾아오시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으나, 아직 어렸던 저와 제 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멍하니 있었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께서는 아프신 어머니 곁에 앉아 잠시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신부님께서는 수녀님께 눈치를 주시며 빨리 가자고 채근하셨습니다. 하지만 수녀님께서는 누워계신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어머니와 눈을 마주하며 잠시 무언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런 수녀님의 모습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시며 먼저 일어서서 나가시던 신부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어렸던 그 단순한 마음에도 서운함의 감정이 꽤 선명하게 남았던가 봅니다. 그때 보았던 신부님의 눈빛은 쌀쌀맞았고, 그 시선은 누워계셨던 어머니에게도, 제게도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으셨던 수녀님에게 느꼈던 따스함은 제 안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때 보았던 수녀님의 눈빛을 통해, 저는 자캐오를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빛을 조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고’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높은 나무에 올라 예수님을 ‘보려’했습니다. 하지만 그 ‘바라봄’은 그저 먼 발치에서 하는 ‘훔쳐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눈길이 마주 닿을 수 없었고, 마음이 오갈 수 없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가서셨습니다. 복음에도 나와있듯, ‘위를 쳐다보시며’자캐오의 집에서 머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훔쳐봄’에 불과했던 자캐오의 눈길이 ‘놀라움’과 ‘기쁨’을 담게 됩니다.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눈길에 담긴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의 눈길을 통해 얻은 사랑을 주위에 돌릴 것을 다짐합니다. 예수님의 눈길 앞에서 살아갈 것을 약속드리며 외칩니다.
“보십시오, 주님!”
어린 가슴에도 떠나려는 이와 함께하는 이의 서로 다른 모습은 서운함과 고마움의 흔적을 선명하게 남겨두었습니다. 비록 두 분 모두 말씀은 없으셨지만, 그 눈빛이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더 깊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아주 어린 꼬마 아이조차 눈빛의 언어를 마음으로 들을 줄 안다고 생각하니, 문득 저 자신의 ‘바라봄’에 대해 반성하게 됩니다.
지금 내 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무엇을 담고 있는가? 가족을 바라볼 때, 이웃을 만났을 때, 그리고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의 눈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요?
조영수 마태오 신부 일동본당 주임
출처 : 춘천주보
지금 우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종종 예상치 못한 시간에, 그것도 나병환자나 가난한 사람들, 혹은 세리와 같이 초대받지 못하던 사람들과 함께하셨다. 더군다나 오늘은 보통 세리도 아니고 세관‘장’이다. 당시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과한 세금을 징수하여 부를 축적하였기 때문에 온갖 모욕과 사회적 따돌림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캐오는 그러한 세리들 중에서도 으뜸인 세관‘장’이었으니, 그가 받았을 사회적 대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가 갖고 살았을 외로움과 증오, 그리고 응어리진 아픔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 자캐오가 오늘 나무에 올라간다. 다름 아닌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다. 물론 나무 위에 오르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군중 속을 파고 들어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는 것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멀리서는 사람들 어깨에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해도 이리저리 밀려다니기 일수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길가에 있던 돌무화과 나무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나무에 올랐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지나가실 때 즈음, 그분의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은 나무 위에 매달린 자캐오의 옹색한 모습을 비웃기 시작한다. 잘 차려입은 옷을 입고 나무에 올라간 자캐오의 모습은 그간의 부정했던 행실들과 그의 작고 나약한 모습을 한데 묶어 매달아 놓은 듯 초라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예수님의 선택은 단 한사람 자캐오였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을 방문하신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부끄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이걸 한다고 무엇이 바뀌겠는가...’, ‘내가 이러면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라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주저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주님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일생 일대의 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 때문에 부끄러워 긋지 못했던 성호경이, 어색해서 미뤄왔던 가족과의 기도시간이, 귀찮아서 피해왔던 작은 봉사의 노력이, 우리의 판단으로 볼 땐 최고의 방법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주님을 만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고 우리가 이를 행하고 있다면, 우리의 그 모습은 사랑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동자 위에 선명하게 맺혀질 것이다. 마치 나무 위에 오른 자캐오의 모습처럼...
양동혁 가브리엘 공세리 보좌
출처 : 대전주보
예수님처럼 살기
예수님 시대 예리코의 부유한 유다인 세관장. 당시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미움을 받았던 수많은 세리들을 관할하는 이 세관장의 이름은‘때 묻지 않은, 순진한’이란 의미의‘자캐오’. 그 이름과는 다른 삶을 선택해 살아가면서 소위 이름값 못하는 위인이라고 놀림과 지탄을 받아서였을까? 그가 예수님을 찾아 만나고 싶어한다.
사목활동 중에 많은 이들을 만난다. 하느님 백성 중에는 착하고 순수한 맘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아마 더 많을 것이다!), 사람을 죄인 취급하고 자기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이에게 배타적으로 구는 데는 열성적이면서도 정작 그들에게서 하느님(나라)을 보는데 차가운 이들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처사에 투덜대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흔히 우리는 신앙에 무관심하거나 등을 돌린 사람들을 일컬어 이른바 성당에 나오지 않는 교우라 해서‘냉담교우’란 용어를 쓴다. 그 증가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보니 최근에 교회 안에서는‘냉담교우 모셔오기’ 운동까지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냉담교우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면서 자칫, 나(우리)같은 사람만이 아니라‘키가 작다’하여 내(우리)가 소외시킨 저 사람,‘세리다’하여 내(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주는 것 없이 밉다’하여 보기 싫은 사람들도 하느님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을 일이다.
그렇다. 그렇게 우리는 나도 모르는 새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삶을 살 수 있으며, 마음이 식어버린‘진정한 냉담교우’일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신앙생활을 하고 미사에 참례하는 이유가 단지‘그리스도인’이기 때문 만은 아니다. 더욱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더욱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미사에 참례한다는 깨달음이 요구된다. 마치 오늘 복음의 자캐오처럼 자신의 모든 체면 다 버리고 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찾는 그 열성이 필요한 건 바로 우리가 아닐까?
비록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살아왔던 자캐오의 삶은 세리였기에 비난의 대상이었지만, 그 누구 못지않게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만나고자 갖은 애를 쓰고 또 예수님을 만난 후 그가 보였던 결단은 그의 본모습이 그의 이름 그대로‘때 묻지 않고 순수’하다는 것을 잘 드러내 준다. 그러고 보면 이 자캐오 또한 바로 우리가 아닌가? 자캐오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모든 이의 마음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이러한 좋은 마음과 결단 -지금보다 더 잘 해보고 싶은 마음,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마음, 다른 이와 함께 아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 을 예수님은 보신다.
이처럼 나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이면서 때론 냉담교우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삶 안에 녹아있는 좋은 마음과 사랑을 심어주시고 보아주시고 또한 꺼내주시는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단 희망을 품어본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기 위함이 아닌가? 자캐오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처럼 사는 방법을 배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고 현재의 우리를 마음으로 만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시지만 회개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만나고 계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 우리를 만나시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의 마음 안에, 또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만나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도 이렇게 살 수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김지훈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은행동 본당 주임
출처 : 인천주보
영원히 목마르지 않기 위하여
‘쓸쓸하게 텅 빔. 또는 실속 없이 헛됨.’ ‘공허(空虛)’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리거나 온 힘을 기울여 노력했는데도 원하는 성과를 이루지 못했을 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 여기며 최대의 목표를 잡고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실상 나를 다 채워주지 못할 때, 이런 경우 외에도 우리가 살면서 공허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 안에서 공허감을 느낀 적은 없을까요? 하느님께 대한 배신감이나 원망 섞인 감정이 아니라, 말씀으로 힘을 얻고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며 성체를 영하고, 본당에서 봉사나 이런저런 활동을 해보아도 늘 가슴 언저리에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지는 않은지, 혹여 내 자신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키가 작았던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여든 군중 속에서 홀로 나무 위에 있던 자캐오는 왜 그렇게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을까요? 복음서에 소개된 대로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루카 19,7)하고 투덜거렸듯이, 자캐오는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불리던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자캐오는 키는 남들보다 좀 작았을지 몰라도 물질적으로는 풍요했고, 남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나쁜 놈이라 손가락질해도 그저 외면하며 인간적인 쓸쓸함이야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서면,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죄인이라 단죄하고 있는 듯한 무거운 마음 때문에 나서기 떳떳하지 못해 부끄럽고, 그래서 주님께 기도를 하더라도 마음이 풍요로워지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한계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속에 주님 근처를 배회하는 삶을 살며 점점 작아져만 갔을 ‘키 작은’ 자캐오! 그가 이제 그 텅 빈 삶을 채워줄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을 보며, 또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의 변화를 묵상하며 우리는 깨닫습니다. 나의 구원은 오직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임을. 때문에 나의 신앙생활은 내가 주체가 되어 나 자신이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내가 ‘참여하고’ 그 이끄심에 따라 나를 ‘내어 맡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이 공허하다면, 아니 공허해지기 전에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주(主)고 누가 객(客)인지….
전능하신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 주십니다”(1독서. 지혜 11,23). 부족하지만 우리의 모든 신앙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셔서, 우리 모두를 통하여 그분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해 봅니다(2독서. 2테살 1,11-12참조).
상록수성당 보좌 김유곤(테오필로) 신부
출처 : 수원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