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오돈의 일상 스케치
40대 중반이었을 때니 20여 년 전이다. 현재도 그 잡지가 나오는 것으로 아는데 격월간 ‘한국문인’에서 시조 ‘산천재’로 추천받았다. 근래 고령으로 거동에 불편을 겪고 있지만 지역에서 존경받으며 맑은 영혼으로 시와 시조를 쓰는 분의 권유로 몇 편 작품을 보냈더랬다. 그 무렵 뿌리출판사에서 생활 속 남겨가는 글이 ‘그리움만으로도 행복합니다’라는 산문집으로 나온 바도 있다.
내가 습작기를 포함해 이런저런 글을 쓰기는 4,50년 되어가는 듯하다. 그러함에도 공식적으로 외부에 이름 석 자를 드러냄은 ‘한국문인’ 시조 추천과 ‘뿌리출판사’ 산문집 간행이다. 그 당시 ‘아이러브스쿨’ 웹사이트가 추억의 중년 세대들에게 인기 있었더랬다. 초등학교 동기회 총무가 내 이름의 글방을 만들어주어 내가 쓰는 글을 거기 올려두면 원격지 친구들과도 공유하게 되었다.
나는 석박사 학위를 붙여주는 유수의 대학원 과정은 한 곳도 이수할 깜냥이 되지 못했고 대학은 두 군데나 졸업했다. 그것도 나중 졸업한 대학까지도 편입학이 아닌 입시제도가 예비고사에서 학력고사로 바뀌어도 1학년 새내기부터 다시 시작했다. 먼저 마쳤던 2년제 교육대학 졸업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무슨 자료집에 내가 쓴 ‘사도(師道)’라는 시조가 권두시로 실리기도 했다.
교직 생활을 수행하면서 동기를 포함해 선후배들과 자연스러운 교류가 있게 마련이었다. 20대 초반부터 평생지기로 지내오는 울산의 한 친구는 오래도록 자기 블로그 ‘지음산방(知音山房)’에 내 이름의 글방을 만들어두고 방문자들에게 소개했다. 그 블로그는 무슨 사정으로 문을 닫고, 근래 ‘낙수(落穗) 이야기’로 대문을 바꾸어 다시 내 이름의 작은 방을 개설해 간간이 글을 올려둔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내가 잠시 속했던 어느 자생 연구단체에서 알게 된 한 후배는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내가 남기는 글을 올려 나와 인연이 닿지 않은 이들도 내 근황을 알게 되기도 했다. 논술 담당 교사 연수회에서 짧은 기간 만난 한 동료도 자신의 블로그에 내 이름의 글방을 만들어 내가 보낸 글을 차곡차곡 채워두었는데 흐르는 세월 속에 서로는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다.
올여름 교감으로 퇴직하게 되는 한 후배는 글쓰기 필력에서 대단한 내공을 갖춘 이다. 후배는 여태 작품집을 여러 권 펴내 꽤 알려졌다. 젊은 날 전교조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고 지금도 SNS로 진보 성향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지역을 벗어난 문사와도 대면 소통을 자주 하지 싶다. 이 후배도 오래도록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내 이름의 글방에다 내가 남겨가는 글을 올려두었더랬다.
마산과 진해를 아울러 통합 창원시로 출범하기 이전부터 성산아트홀을 운영하는 재단에서는 ‘문화누리’라는 월간지를 펴냈다. 거기 편집자는 내가 창원시청 누리집 ‘창원여행후기’ 칸에 올려두는 근교 답사기를 한 편씩 꺼내 여러 해 동안 매달 한 편 소개했다. 그때 편집자가 붙인 제목이 ‘발로 쓰는 산행기’였다. 창원시 누리집이 개편되면서 내가 다니는 발자국은 남기지 않는다.
내가 생활 속 남기는 글은 두 가지 영역이다. 일기처럼 써 가는 글은 30여 년이 되었다. 시작할 무렵에는 주말 이틀은 당연했고 주중에도 한두 편 남겼다. 언제부터인가 매일 빠짐없이 남기고 있다. 이 글은 내가 유일하게 속한 ‘가락문학회’ 카페에 올리고 몇몇 지기들에게 메일로 전송한다. 작년 봄부터 틀에 짜인 시조도 2연으로 엮어 사진과 함께 주변 지인에게 아침 인사로 나눈다.
지난 3월 초였다. 사학 재단에서 국어를 가르친 선배 시인이 내가 쓰는 글을 신문 지면으로 소개해도 되느냐고 여쭈어왔다. 교단에서 가르친 제자가 그 지방지 편집국장으로 문학 카페에 올려둔 내 글을 보게 된 모양이었다. 편집국장도, 문화부 기자도 면식이 없고 문자와 짧은 통화만 나누었다. 처음에는 ‘걸어서 동네 한 바퀴’로 나오더니 이제는 ‘주오돈의 일상 스케치’로 붙여졌다. 24.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