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다시 타오르다
서울과 인천 사이 작은 도시였던 경기 부천은 1995년 중동 신도시 개발이 끝나며 인구가 급증했다. 통계에 따르면 1985년부터1995년까지 부천은 인구가 30만 명이나 늘었다. 그만큼 급증한생활 쓰레기에 대처하려 부천시는 삼정동에 소각장을 만들었다.
그 후 15년간 이곳에서 매일 200t의 쓰레기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하지만 삼정동 소각장은 1997년 ‘다이옥신 파동’을 겪으며 지역문제로 떠올랐다. 다이옥신은 제초제에 들어 있는 독성물질로암을 유발한다. 당시 쓰레기 소각장에서 다량의 다이옥신이 나
온다는 주장이 제기됐는데, 실제 삼정동 소각장에서 기준치 20배의 다이옥신이 배출되고 있었다. 이에 시민들은 소각장의 폐쇄를 요구했고 2010년 삼정동 소각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부천시는 건축면적만 약 1000평(약 3300㎡)에 달하는 이 공간을 다시 활용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러다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산업단지 및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돼 리모델링에 들어갔고, 2018년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부천 아트벙커 B39(이하 B39)가 탄생했다.
다시 문을 연 B39는 도심 속 쓰레기 소각장이라는 이색적인 역사를 보존해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촬영지로 주목받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건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이곳에서 찍은 한 명품 브랜드의 화보로, 촬영을 위해 무려 한달이나 B39를 임대했다고 한다. 또 3층과 미개방 구역인 4~5층에선 넷플릭스 드라마 <길복순> <승리호>가 촬영됐다.
[혐오시설에서 ‘힙한’ 공간으로 소생하다]
B39는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이뤄져 있다. 1층은 전시장과 카페테리아, 2·3층은 사무실 및 관람 시설로 쓰인다. 4층부턴 미개방 구역이다.로비에 들어서면 깔끔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누가 이곳을 소각장이었다고 생각할까.
로비 앞엔 다용도 야외공간인 ‘에어 갤러리(Air Gallery)’가 있다. 이곳은 옛 소각로 자리로 리모델링 전엔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에어 갤러리는 소각로의 한쪽 벽을 완전히 허물고 철제 골조를 붙여 만들었다. 소각로 왼편의 쓰레기투입구와 오른편 재 배출구, 벽에 붙은 그을음을 보존해 옛 흔적을 남겼다. 에어 갤러리에 서면 햇빛이 환하게 들어와 따뜻한 느낌이 든다. 하얀 대리석 타일로 만든 바닥은 포토존으로 안성맞춤이다. 마침 바닥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의자가 놓였다.
로비 서쪽에는 B39의 백미인 ‘벙커(Bunker)’가 있다. 지하부터천장까지 높이 39m에 달하는 콘크리트 벽이 사방을 감싸 압도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곳은 과거 쓰레기 저장고였다. 하루 수백 t의 쓰레기를 수용해야 했기에 저장고 역시 크게 만들었다.텅 빈 벙커 가운데 서면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만드는 거대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웅장함을 이용한 전시도 종종 열린다.
“B39라는 이름은 벙커의 높이에서 땄다고 해요. 공교롭게도 이앞을 지나는 도로도 39번 국도라고 하니 재밌는 우연이죠.”
이명숙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B39의 B는 벙커와 ‘무경계’를 뜻하는 ‘Borderless’의 앞 글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혐오시설
이란 굴레를 넘어 명소로 탈바꿈한 B39와 어울리는 이름이다.
“쓰레기는 이곳에서 4일 정도 보관됐다가 소각장으로 옮겨졌어요. 더럽고 냄새가 나던 이곳이 최고 인기 장소라니 신기하죠?”
벙커 옆은 과거 쓰레기 반입실이었던 ‘멀티미디어 홀’이다. 지역예술가들의 공연장으로 활용하는 곳으로 벽면에 쓰레기를 벙커로 쏟아붓던 투입구가 남아 있다. 지하 1층은 편백힐링실·공유주방·녹음실 등 편의시설이 마련돼 있다.
[소각장의 흔적과 의미 살린 재생 건축]
로비 동쪽에는 관람객을 위한 카페테리아가 있다. 그 앞마당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잔디가 깔렸고, 놀이기구와 조형물이있다. 카페테리아 옆은 소각장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인송풍실’로 부천시에서 지정한 보존 구역이다. 유인송풍실은 소각·정화를 거친 가스를 굴뚝으로 내보내는 시설이다. 공간곳곳에 긴 네온사인이 설치돼 있어 이색적인 분위기가 난다.
2층에선 과거 소각장 시설을 볼 수 있다. ‘재벙커’는 소각로에서 태워진 쓰레기가 재가 돼서 모이는 곳이다. 소각장 직원들은 재벙커 옆 크레인 조종실에서 기계를 조작해 재벙커에 쌓인 재를 퍼올리고 매립장으로 보냈다. 크레인 조종실로 들어가는 길쭉한 복도는 옛 모습 그대로인데 빈티지한 느낌이 든다. 바로 옆의 ‘전기실’은 미디어아트와 공연이 진행되는 아트홀로 사용 중이다.3층은 공간을 빽빽이 채운 기계설비로 어두컴컴하다. 쓰레기 소각 시 나온 가스를 처리하던 배기가스 처리 및 펌프 시설들이다. 설비 곳곳에 녹이 슬고 재가 들러붙어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3층 한편엔 B39의 역사를 압축해놓은 전시실이 있다. 당시 근로자들의 유니폼과 안전 장비, 관련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4~6층은 미개방 구역이다. 이 해설사는 “4층 이상 오르려면 3층에서 철제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미디어 로케이션 장소로만 제한적으로 출입을 허용한다”고 말했다. B39 관계자는 “9월 하순부터 매달 다양한 미디어아트 전시와공간예술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라며 “지역 예술 거점으로서 시민들에 한 발짝 더 다가설 것”이라고 밝혔다.
B39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월요일 휴관). 또주말마다 관람객을 위한 시설 투어를 운영하는데, 토·일요일에 3회(오전 10시 30분, 오후 1시 30분, 2시 30분)씩 진행한다.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약 30분간 B39 곳곳을 돌아볼 수 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삼정동 소각장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이제 가족끼리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B39가 남았다. 막대한 쓰레기를 태우며 하늘로 공해를 뿌리던 굴뚝에서 연기 대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버려진 건물에 문화와 예술이 깃든 재생 건축 4곳]
흉물로 방치됐던 공간을 새롭게 탈바꿈한 사례는 곳곳에 있다. 각지의 명물로 자리 잡아 가볼 만한 재생 건축들을 소개한다.
<인천 코스모40>
인천 서구 가좌동 일대는‘코스모화학단지’로 불릴 만큼 대규모 공장지대였다. 이곳엔 1970년대부터 2016년까지 코스모화학의 45개 공장이있었다. 그중 건물 하나를 지역 재생거점으로 만든 것이 코스모40이다. 과거 코스모화학의 40번째 공장이었음을 의미한다. 2018년 문을 연 코스모40은 복합문화공간으로, ‘2019 인천광역시건축상’ 대상을 받았다. 1층 로비 옆 보이드 홀과 2층 전체가 전시 및 세미나를 진행하는 곳이다. 3층은 대형 카페로 공간 곳곳에 과거 공장에서 사용하던 설비와 가구가 보존돼 있다. 버려졌던 자재는 지역예술가의 손길을 거쳐 리사이클 공예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운영 오전 10시~오후 8시(연중 무휴)
<청주 동부창고>
충북 청주시 청원구의 동부창고는과거 담뱃잎 보관창고로 쓰이던 공간이다. 한때 연간 100억 개비의 담배를 생산했던 청주연초제조창의 부속시설이었다. 동부창고는 2014년부터 리모델링 사업을 시작해 문화예술 거점 공간으로다시 태어났다. 현재는 건물7개 동(6·8·34·35·36·37·38동)모두를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34·35·36동은 예술가들과 학생들의 창작 공간으로 쓰인다. 공연이나 세미나를 위한 다목적홀과 요리 수업을 위한 푸드랩실 등으로 꾸며졌다. 이 중 34동에선 10월 15일까지 ‘동부창고 목공 예술 놀이터’ 행사가 열리는데, 캠핑과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캠프닉 세트를 대여한다. 6·8동과 야외광장은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소통공간, 37·38동은 예술가들의 창작실이다.
운영 오전 10시~오후 10시(월요일·공휴일 휴관)
<울산 장생포문화창고>
어류 냉동창고가 문화예술 전시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울산 남구 장생포동 장생포문화창고는 1973년부터 어민들의 창고로 쓰이다가 2000년부터 방치됐다. 울산시는 이를 개조해 2021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장생포문화창고는 6개 층과 옥상층으로 구분된다. 1층은 푸드 코트, 2층은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이다. 산업화 시대 울산의 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다. 3층과 4층은 미디어아트전시관과 갤러리다. 10월 15일까지 초청 전시로 <구스타프 클림트, 황금빛으로 물들이다>가 진행 중이다. 5층은 작업실, 6층은 북카페와 소극장이 자리 잡았다. 소극장에서는 인형극<끼리>와 서커스 <해피해프닝> 등이 상설로 열린다. 옥상에선 장생포 문화마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운영 오전 10시~오후 9시(월요일, 명절 당일 휴관)
<전주 팔복예술공장>
전북 전주시 팔복동의 팔복예술공장은 1979년부터1992년까지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던 곳이다. 한때 500명이 넘는 직원이 일했으나, 산업이 침체하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 20년 넘게 방치됐다가 2018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팔복예술공장은 A동과 B동으로 나뉜다. A동 1층은 입주예술가의 공간, 2층은 예술 교육 및 전시 공간이다. B동은 전시·공연·창작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는 다목적 공간이다. 팔복예술공장은 국내외 예술가를 대상으로 입주프로그램을 지원한다. 1년간 전주에 머물면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정기 입주 프로그램과, 해외 거주 작가를 초청해 3개월간 지원하는 국외 입주 프로그램이 있다. 현재는 지역 예술가가 참여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등의 전시를 진행 중이다.
운영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 명절 당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