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312182717i
뜨겁고 열정적인
하지만 뮤지컬 <마리 퀴리>의 마리는 좀 낯설다. 마리는 뜨겁고 열정적이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태운다. 마리가 초록빛의 라듐을 발견하는 과정은 철저히 고독하고 몰입된 시간을 요구했다. 그 사이에 마리는 남성의 영역을 욕망하는 존재로 낙인 찍혔으며, 딸은 ‘허튼 연구’를 위해 버려졌다는 평가를 받았고, 아버지는 운명을 달리했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사진_라이브(주) 제공
하지만 마리는 엄청난 육체노동을 감내하며 결국 라듐을 얻는다. 라듐이 암 치료제로 쓰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듐에 손상된 샘플 조직이 필요한 나머지 마리는 자신의 팔을 라듐에 감염시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임상실험에 박차를 가한다. 그 뜨거움은 오로지 한 길로 향한다.
어둡고 독선적인
그러나 마리의 진짜 얼굴은 그 이면에 있다. 마리의 열정은 어둡고 독선적인 얼굴의 쌍생아다. 사실 공연 초반, 마리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파리행 기차 안에서의 활기도 마냥 밝지만은 않다. 마리의 비주류성 때문이다. 마리는 차고 어두운 곳에 이름 없이 존재했던, ‘이상한 괴짜’, ‘뻣뻣한 여성’, ‘부유하는 이방인’ ‘설쳐대는 폴란드인’이었다. 고국 폴란드에서 가난한 여성 마리의 역량과 능력은 기성의 질서 안으로 흡수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마리는 언제나 이름 없는 타자였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사진_라이브(주) 제공
이런 이유로 마리는 ‘이름 없는 곳에 이름을 놓는’ 삶을 살기 원했다. 최종적으로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되어 견고한 기성의 질서 안에 파고들기 원했다. 하지만 마리는 힘들게 입학한 소르본 대학에 들어가서도, 프랑스 과학계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살기 어려웠다. 언제나 과학자 이전에 여성이 되기를 요구 받았다. 마리의 월등함은 기성의 질서를 불안하게 했기 때문이다.
마리가 잡은 것은 라듐이었다. 라듐은 마리가 발견한 직후 ‘잡은 것’이었다. 드디어 이름을 붙인, 스스로 빛을 내는 라듐은 세상에 존재했지만 그동안 미지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곧 마리 자신이었다. 너무나 월등해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자신의 자리였다. 그래서 마리는 라듐을 지켜야 했다. 심지어 냉정한 사업가 루벤과 손잡고 라듐의 치료제로서의 가능성을 입증함으로써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해악을 가리려 했다. 욕망에 눈이 먼 ‘미친 과학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사진_라이브(주) 제공
속죄하듯, 마리
그러나 마리는 생의 맨 마지막을 단 세 줄의 부고로만 남기 원한다. 라듐의 해악을 방조했다는 자의식 때문이었다. 마리는 후반부의 삶을 마치 속죄하듯 살았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소르본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어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되었고, 퀴리 연구소를 열어 모든 사람에게 ‘과학 연구’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심지어 엑스레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계를 들고 직접 1차 세계 대전의 전쟁터를 누비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방사능 수치 단위를 만들어 라듐 제품 제작의 가이드 라인을 공표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끝까지 자신을 객관화했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이렇게 ‘낯선 마리’를 세상에 내놓는다. 타자성을 극복하기 위해 욕망을 분출했던 마리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아내를 죽인 스위니 토드를 연상시키며, 라듐의 이중성을 알게 된 마리의 ‘난처함’에서 삶은 여전히 미지의 것이라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마리는 이렇게 위인으로 기념되기보다 끝까지 고집스러웠던 자의식 강한 여성으로 남는다. 그러니 어찌 보면 마리에게 뮤지컬이 선물하는 위로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마리의 진짜 결말은 방사능 차단을 위해 납판으로 봉인된 채 팡테옹에서 빛나고 있는 아이러니한 죽음이니까 말이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공연 사진_라이브(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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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나도 그때봤엌ㅋㅋㅋ 라듐~~~
그댄 나의 별 하나🧪⭐️
내일 보러 가지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