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삶2-8. 인정투쟁에서 벗어나는 삶
동창 녀석 중에 2년에 한 번 꼴로 차를 바꾸는 친구가 있었다. 그것도 1억을 호가하는 고급 수입차만 취급한다. 2년 정도 타다 기존 것을 팔고 신차를 사는 것을 되풀이하는데, 단순 계산해도 한 번 갈아탈 때마다 4~5천만 원을 쓴다는 얘기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가정 경제에 타격이 갈 게 뻔했다. 그 손해를 감내할 정도로 차가 좋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한 번 물어본 적도 있었다.
“승차감이 중요해서 그래? 왜 그렇게 자주 바꾸는 거야?”
친구는 별 순진한 질문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누가 외제차를 승차감 때문에 타냐? 중요한 건 하차감이야.”
평소에도 남의 시선을 꽤나 의식하며 산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친구의 말인 즉, 주차장에 발을 딛는 그 순간 다른 사람들이 ‘와아’ 하고 내지르는 5초간의 함성을 듣기 위해 그 큰돈을 쓴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얼마 전에도 어김없이 차를 바꿨고 동시에 코로나가 터졌다.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진심으로 자동차를 좋아했다면 문제가 없었을지 모른다. 한적한 새벽, 신선한 엔진 소리를 들으며 드라이브하는 것만으로도 최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동창회에서 받을 감탄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고 모든 모임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취소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1년 내내 도장이 벗겨질 정도로 차만 닦고 있다고 한다.
인정투쟁에 매몰된 친구 녀석을 볼 때마다 코로나 이후의 변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인정투쟁이란 용어는 청년 헤겔 철학에서 시작된 말로,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싸움을 뜻한다. 부러움 어린 시선, 좋은 평판 등 타인의 평가를 통해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삶이다. 한 주체는 다른 주체에게 인정받을 때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며 새롭게 획득한 정체성은 더 높은 인정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어려운 이론을 놀라울 정도로 명쾌한 언어로 꼬집어 준 이가 있으니, 바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가까우면서도 존경하는 선배님이신 그는 인정투쟁에 빠져 있는 우리 사회를 이렇게 정의했다.
‘남의 감탄에 목말라 하는 사회’
그 한 줄의 문장 앞에서 나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언어는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핵심을 꿰뚫는다. 남의 감탄에 목마른 삶을 살게 되면 결코 적정한 만족을 느낄 수 없다. 40평대 집에 사는 사람은 50평대 집과 비교하며 초라해질 것이고, 반에서 1등하는 학생은 전교 1등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수입차를 좋아하는 내 동창이 1억 원짜리 차를 주차장에 대고 나왔는데 그 옆에 2억 원짜리 차가 세워져 있다면 절대 으쓱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우리는 인정투쟁에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신경 쓸 사람과 거리적으로 멀어지니 남의 시선이나 감탄 받을 기회가 자연스럽게 적어졌다. 그러다 보니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다. 전문가들은 바이러스가 사라진 뒤에도 이전보다는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 것으로 예측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점차 인정투쟁에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아니,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무한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 인류는 적정한 자원을 두고 삶을 영위해야 한다. 예전처럼 한탕 시원하게 버는 건 불가능하며 재산, 옷차림, 자동차 등 보이는 것으로 나를 드러내는 문화도 한계에 다다랐다. 그렇다면 바뀌어 나갈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다시 김정운 선배의 멋진 말을 응용하려 한다.
‘그 감탄을 내가 하는 감탄으로 바꿔야 한다.’
역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말이다. 남이 하는 감탄을 내가 하는 감탄으로 돌리려면 일단 나에게 충실해야 한다. 그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문화심리학에서는 딱 짚어서 ‘미학적 경험’, ‘예술적 경험’이라고 알려 주니 고마운 일이다. 내 몸을 움직여서 아름다움을 창조하라는 얘기다.
100만원 짜리 오케스트라 연주를 즐겨 듣는 사람이 있다. 들인 비용만큼 특별한 문화적 경험이었으리라. 그런데 그 사람이 생전 손도 안 대 본 악기를 배워 연습하기 시작한다. 전문 연주자에 비하면 초라한 실력이지만 하나하나 노력하여 작은 소품곡 하나를 완주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자신은 감탄할 것이다. 작품이라 불릴 만한 것을 몸소 만들어 본 사람은 안다. 같은 돈을 들여도 훨씬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그 순간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물결은 문화적 ‘경험’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문화적 ‘체험’이 된다. 내가 직접 써 보고, 직접 그려 보고, 직접 연주해 보는 예술 체험. 앞으로 펼쳐질 삶에서 이런 체험은 아주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내가 하는 문화적 체험이 내 감탄의 원천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자원으로도 훨씬 더 나를 풍부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삶의 안전장치이자 행복의 지향점이다.
김정운 선배는 인정투쟁에서 벗어난 삶을 몸소 실천 중이다. 지금은 전라남도 여수에서 낚시 중이시다. 종종 사진을 보내 주는데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한참 쳐다봤다. 깔끔한 정장 수트에 나비넥타이, 다른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던 선배의 스타일은 온데간데없고 거친 바닷바람에 머리는 산발인 데다가 검게 탄 거지꼴의 웬 아저씨가(선배님 정말 죄송합니다.) 자랑스럽게 직접 잡은 물고기를 들고 있다.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들어 내지도 않았는데 사진 너머 행복감이 바다향기처럼 밀려온다. 선배는 그 먼데까지 자꾸 놀러오라고 하시는데 정말이지 너무 뵙고 싶다. 날 앞에 앉혀 두고 얼마나 신나게 낚시 얘길 하실까. 선배가 풀어낼 재미난 이야기에 벌써부터 웃음이 난다.
*위 글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에 심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아트 마크먼 교수의 지도하에 인간의 판단, 의사결정, 문제해결 그리고 창의성에 관해 연구하였고, 현재는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아주대학교 창의력연구센터장을 지냈고 게임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대학교 각종 교육기관, 기업에서 왕성하게 강연하고 있고, ‘어쩌다 어른’, ‘세바시’, ‘책 읽어 드립니다’, ‘나의 첫 사회생활’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게 있는 “김경일”교수의 저서 ‘적정한 삶’ 제2장 ‘비대면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들’ 중 일부를 옮겨본 것입니다. 그 외 저자의 저서로는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어쩌면 우리가 거꾸로 해왔던 것들”, “십 대를 위한 공부사전” 등이 있고, 역서로는 “혁신의 도구”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