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축물을 감상하는 기쁨은 단순히 건물을 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건축물에는 현시대를 관통하는 철학과 예술이 망라돼 있다.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1세대 건축가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의 철학과 세계관을 정립하고 방향을 제시한 두 거장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는 건 어떨까. 1992년부터 국토교통부가 주최하는 ‘한국건축문화대상’에 선정된 작품들도 함께 둘러보며 현대건축의 아름다움에 빠져보자. 글 길다래 기자 사진 고승범(사진가)
현대건축의 다채로운 매력 속으로
[김중업의 철학을 담은 그릇 - 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건축이란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로 불리는김중업(1922~1988년)이 한 말이다. 1950년대부터 한국 건축계에서 활동한 김중업은 세계적인 건축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파리 사무실에서 일하며 건축 및 도시 계획을 배웠다.
부산대학교 본관 건물, 주한프랑스대사관, 부산유엔묘지 채플, 서울 종로구 삼일빌딩·안국빌딩 등이 그의 작품이다. 경기 안양에 있는 옛 건물에서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이곳은 1959년 김중업이 설계한 유유제약의 공장 건물로옛 연구동과 작업장·수위실로 이루어졌다.
2006년 공장이 이전하면서 현재는 김중업건축박물관(옛 연구동)과 안양박물관(옛 작업장), 문화지킴소(옛 수위실)로 사용 중이다. 안양박물관의 모서리에는 조각가 박종배의 ‘모자상’이 놓여 있다. 또 대게 다리처럼 밖으로 돌출된 김중업건축박물관의 기둥들은 독특한 조형미를 드러낸다. 옆으로 길게 열을 유리창은 ‘가로로 긴 창’을 냈던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공장 건물이지만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려 한 그의 진심이 느껴진다. 김중업은 건축이란 “일생 자화상을 그리는 작업”이라고 토로했다.그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권의 눈 밖에 나 ‘강제 출국’ 되어 무국적자로 떠돌기도 했다. 다시 그의 작품을 바라본다. 가을 햇살이 반복되는 기둥 열을 타고 내리며 그림자 빗금을 그린다. 마음속에도 잔잔한 물결이 드리운다.
[김수근의 빛과 벽돌로 지은 시(詩) - 서울 대학로 붉은 벽돌 건물]
햇살 좋은 날 대학로만큼 낭만적인 산책 코스도 없다. 이곳에는 또 한 명의 1세대 건축 거장, 김수근(1931~1986년)의 대표작인 붉은 벽돌 건물 시리즈가 있다. 1979년부터 1981년에 그가 작업한 마로니에공원의 공공그라운드(구샘터사옥)와 아르코예술극장·아르코미술관 등이다.
김수근은 1960년대부터 워커힐 힐탑바(현 피자힐)를 시작으로 국내의 굵직굵직한 건물과 도시개발 등을 도맡았다. 서울의 자유센타·정동빌딩·세운상가·경동교회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지하 2층, 지상 4층(이후 증축되어 현재는 지상 6층) 건물로 준공된공공그라운드는 1~2층이 필로티구조(르코르뷔에가 제창한 근대건축기법의 하나로 1층은 기둥만 세우고 2층 이상에 방을 짓는 방식)다. 가장 임대료가 높은 1층을 비워 보행자에게 내준 점이 인상적이다. 공공그라운드에 미감을 더하는 것은 외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이다.
담쟁이덩굴은 계절마다 빛깔을 달리하며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아르코미술관과 아르코예술극장은 웅장한 붉은 벽체로 마로니에공원을 감싼다. 붉은 벽돌만 이용했지만 벽돌을 4개·6개·8개씩 튀어나오게 쌓아 변주를 꾀했다. 빛과 그림자가 건물 깊숙이 파고들며 벽면에 심도를 더한다.
실내로 들어가 보면 계단의 난간이 또 걸작이다. 보통 철제 등으로 난간을 만드는 데 반해 이곳은 묵직한 벽돌로 단차를 주며 쌓았다. 김수근은 건축을 “빛과 벽돌이 지은 시(詩)”라고 표현했다. 빛과 그림자,그리고 붉은 벽돌이 주조한 그의 건물은 과연 깊은 성찰을 품은 시다.
[순교 터에 세운 장엄한 사유의 공간 서울 서소문역사공원(한국건축문화대상 2019 사회공공부문 본상)]
서소문역사공원은 19세기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비극적인 장소다. 근대에는 쓰레기 소각장 등으로 쓰이다가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서소문역사공원(,223;면적 2만 4526㎡)은 지상 공원과 지하 1~3층의 역사박물관으로 이뤄졌다.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 붉은 벽돌의 박물관으로 진입한다. 내부는 전시실과‘성 정하상 기념경당’ 등으로 이어진다. 백미는 지하3층의 콘솔레이션 홀이다. 깊고 무거운 어둠을 배치하고 절제된 빛을 들여 경건하면서도 평온한 공간을 완성했다.
주소 서울 중구 칠패로 5
[어린이의 상상력이 뻗어가는 틈새 - 전주 덕진공원 맘껏하우스(2022 사회공공부문 우수상)]
전북 전주 시민들의 휴식 공간인 덕진공원 내에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수 있는 놀이터가 마련됐다. 맘껏하우스는 아이들이 사방팔방 뛰어 나가고 소통할 수 있는 ‘틈’을 모티프로 지어졌다. 삼각 지붕의 2층건물(178㎡)은 목재와 유리를 소재로 수많은 틈의 향연을 구현했다. 틈을 통해 아이들의 시선과 상상력은 건물 너머까지 뻗어나간다. 지붕의 나무 프레임들이 만들어내는 미려한 곡선은 공원의 자연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주소 전북 전주시 덕진구 창포길 70
[미술을 읽고 배우는 ‘미술적 공간’ - 의정부미술도서관(2020 우수상)]
경기 의정부의 랜드마크로 떠오른 의정부미술도서관은 지하1층, 지상3층으로 연면적 약 6565㎡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비정형의 곡면과 유리, 콘크리트가 공존하는 외벽이 다양한 표정을 연출한다. 어린아이의 서툰 가위질을 연상시키는 창문의 배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1층부터 3층까지 과감하게 비워둔 공간은 압도적인 개방감을 선사하고, 계단과 2~3층의 난간은 굴곡이 아름답다. 열람실과 미술 전시관, 작가들의 작업실, 교육 공간 등이 있다.
주소 경기 의정부시 민락로 248
[논의 기억을 복원한 공간 - 이천 논스페이스(2022 민간부문 본상)]
경기 이천은 쌀이 유명한 곳이다. 호법면의 논스페이스(428㎡)는 논을 담은 건축물이다. 상자 모양의 노출콘크리트 구조물이 바둑판처럼 교차하는 형태로, 교차된 공간 사이에 주변의 논밭 등 자연 풍경이 들어찬다. 건물에 들어서면 닫힌 공간과 열린 공간이 이어지며 즐거운 자극을 선사한다. 논스페이스는 전시와 북콘서트, 리버마켓 등을 통해 소통하는 자유로운 공간(nonspace)을 지향한다.
주소 경기 이천시 호법면 동산로395번길 139-12
[찬란했던 고대국가의 기상 형상화 - 고령 대가야문화누리(2016 우수상)]
경북 고령군의 대가야문화누리는 1~6세기 번성한 고대국가 대가야의 기상을 담은 종합 문화·체육·복지 시설이다. 고령은 520년동안 대가야의 도읍이었고, 가야 최대의 고분군인 지산동고분군이 남아 있다. 지산동고분군을 마주한 대가야문화누리는 지상 4층으로 된 거대한 ㄷ 자 모양의 건물(1만 8950㎡)이다. ㄷ 자의 한 면은 땅에서 시작해 건물 지붕을 따라 잔디 언덕이 조성되었다. 언덕의 부드러운 굴곡은 대가야의 고분을 연상시킨다.
주소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왕릉로 30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문화 창고 - 서울 중림창고(2020 우수상)]
중림창고는 서점·전시실·커뮤니티센터 등이 있는 주민들의 쉼터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본래 중림창고는 1980년대까지 중림시장의 상인들이 언덕배기에 물건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시장이 쇠락하면서 창고 역시 오래 버려져 있다가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좁은 언덕길을따라 1~2층의 나지막한 건물 여러 개가 꼬리에 꼬리를 문 형태(267㎡)로 완성됐다. 골목에 면한 1층은 유리로 마감돼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주소 서울 중구 서소문로6길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