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왕들이 묻힌 왕릉 가는 길을 만들고, <왕릉 가는 길>을 쓰고서 곧바로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서 가지 못하다가 가을의 절정에서 찾아간 장릉은 한가롭고 아름답기만 했다. “아름다운 사람의 가을은 아름답다“ 에우리피데스의 말을 읊조리며 찾아간 장릉, 한글 이름이 좋아서 그런지 세 개나 있다.
단종의 능인 영월 장릉이 있고, 인조가 잠든 파주 장릉이 있으며, 김포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이 잠든 장릉이 있다. 김포 지역에 있는 유일한 왕릉인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 1580∼1619)과 그의 부인 부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1578∼1626)의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2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516,955㎡이다. 인조(仁祖)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은 조선 선조(宣祖)의 5번째 아들로, 선조 13년인 1580년 6월 22일에 태어났다. 이름이 부垺인 정원군은 1604년에 임진왜란 당시 왕을 호종할 때 평안도 영변으로 가 왜적을 피하도록 당부했다. 영변에 도착한 정원군이 울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살기 위함이 아니고 부왕의 명령 때문이었다. 지금 왜적의 형세다 날로 성학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는가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선조는 정원군의 마음을 가상히 여겨서 다시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전란이 끝날 때까지 선조를 보필했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선조는 그 공을 높이 사서 호성공신 2등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선조가 승하한 뒤 이복형인 광해군이 임금에 올랐다.
그의 친형인 임해군을 유배 보냈다가 죽였다. 그 뒤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폐하여 강화로 유배를 보냈다가 그 역시 죽인 뒤 161년에는 신경의 등이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일 때문에 강화 교동으로 보내 사사하였다. 살얼음판 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우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는 1619년 12월 28일 마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1619년 광해 11년 12월 29일 <광해군일기.중초본.> 에 <원종 대왕 정원군의 졸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원종 대왕(元宗大王)이 (정원군(定遠君)을 추존한 칭호이다.) 훙(薨)하였다. 대왕은 어려서부터 기표(奇表)가 있었고 천성이 우애가 있어 특별히 선조(宣祖)의 사랑을 받아 전후로 선물을 내려준 것이 왕자에 비할 수 없이 많았다. 왕이 왕위에 올라 골육을 해치고는 더욱 대왕을 꺼렸다. 능창대군(綾昌大君)을 죽이고는 그 집을 빼앗아 궁으로 만들고, 인빈(仁嬪)의 장지(葬地)가 매우 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늘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해서 죄에 얽어 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왕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훙할 때의 나이가 40세였다. 상이 그 장기(葬期)를 재촉하고 사람을 시켜 조객을 기찰하게 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임금에 오른 뒤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大院君으로 봉하고 추승하였다. 원종의 무덤은 원래 양주군에 있었는데, 그 때 지금의 김포 성산(현재 장릉산)에 천장하고서 흥경원興慶園이라는 원호(園號)를 받았다. 그 뒤 인조 10년인 1632년 인조반정의 주역 이귀李貴등의 주청에 따라 왕으로 추존하고서 묘호는 원종, 능호를 장릉章陵이라고 하였다.
김포시청사 앞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금세 장릉에 이른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을 천히 걸어가면 홍살문이 보이고, 아늑하다. 양옆으로 학이 날개를 편 듯 펼쳐진 그 가운데에 모셔진 장릉, 정자각에서 본 쌍릉이 더없이 아름다워서 한 폭의 그림이다. 정자각을 지나 능으로 오르는 길 참도 양옆에 두 그루의 뽕나무가 마치 일주문처럼 서 있는데, 이곳 참도는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서 그런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왕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이 두 능 앞에 상석이 각각 하나씩 놓여 있고 상석 좌우로 망주석 1쌍이 있다. 능 위에서 볼 때 오른쪽이 원종, 왼쪽이 인헌왕후의 능인데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이다. 봉분 아래로 얕은 호석(護石)만 두른 것은 추봉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라 만들어서 그렇다. 두 능 앞에 팔각 장명등이 서 있고, 양옆에 망주석이 서 있으며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둘렀고, 봉분 주위로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으며 능 앞에 시립하고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은 그리고 석마(石馬) 각 1쌍이 서 있다. 그 아랫단에도 무인석과 석마 각 1쌍이 서 있고, 능 아래에 다른 능과 같은 형태로 정자각과 비각· 그리고 복방(守僕房)과 홍살문을 비롯 재실이 있다.
한편 인헌왕후가 세상을 뜨자 김포 성산 언덕에 장사지내고 원호를 육경원毓慶園 이라고 했는데, 육경원 조성 당시의 비석 받침돌이 출토되어 보존되고 있다.
좌청룡 우백호가 펼쳐진 능 뒤에서 바라보면 새로 짓는 아파트 너머로 인천의 계양산이 한눈에 보인다. 저 산에 ‘장명이고개’라고도 부르는 천명이고개가 있지, 도둑이 많아서 천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는 고개, 옛날에는 도둑이 고개 마루에 서서 백성들을 기다렸는데, 현대식 도둑들은 인터넷을 비롯한 신기한 도구로 사람들을 등쳐 먹고 있으니, 옛날 도둑의 대명사였던 홍길동이나 임거정, 일지매가 이런 사실을 목격한다면 얼마나 억울해 할까?(...)
행복은 여기 있다. 자연과 더불어 거닐며, 번잡한 삶의 흉한 모습과 너무 일찍 접촉하지 않은 것에........ 워즈워스의 시 한 소절을 읊조리며 걸으면 좋은 숲길이 김포의 장릉 숲이다.
아늑한 산자락에 잔대와 도라지, 그리고 야생마가 지천으로 자라는 장릉에는 가을이면 빨갛고, 푸른 꽃이 무리 지어 피는 고마리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장방형 연지에는 연잎이 꽃을 피우기 위해 소담하게 그 잎을 펼치고, 몇 마리 새들이 물이 흐르듯 물결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신정일의 <왕릉 가는 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