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를 만나다
홍정미
겨울 강가를 걷고 있었다 닫히지 않는 서랍 속, 밀려든 하루들이 서로를 밀치고 손잡이를 안쪽에서 흔들고 있었다 그때 한 카페에서 바흐가 흘러나왔다 문 닫아도 닿을 만큼 낮고 단정한 음이었다 아, 그랬지 아주 옛날 내가 얼마나 바흐를 좋아했는지 삶이 아직 나를 몰아세우기 전 시절을 기억했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바흐와 재회했다
바흐의 음악은 흐르지 않는다
밟혔던 발자국 위에 다음 발자국이 조용히 겹칠 뿐
바흐는 나를 묻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지쳤는지 다만 겹친 음들 사이에 내 삶 하나를 조용히 놓아주었다 창밖으로 석양이 누릿누릿 무거운 색으로 지고 있었다
석양은 내 어깨에 남은 삶의 무게로 내려앉고 바흐는 그 무게가 부서지지 않도록 침묵의 박자로 받쳐주다가 늦게 도착한 나를 조심스럽게 배웅했다
바흐는 울지 않는 음악으로 가장 깊이 운다 그의 선율은 계절이 기능을 잃는 세계에서도 시간을 다시 걷는다 이 음악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뉴에트는 단지 내가 산책길에서 오연히 들은 한 구간일 뿐이다
바흐를 다시 만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지만
마침내 도착했다
나 자신에게로
-홍정미 시집 {가방 속 보르헤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