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으로삽시다 을 읽었다. 30년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 읽기로는 그저그런 책이다. 게다가 미국유학을 다녀왔다고 서구는 우리보다 어떤 것이 좋다고 하는데 미국과 서구는 다르다. 서구는 서유럽선진국을 뜻하고 미국은 최근 독립한 나라기 때문이다. 미국보다는 캐나다가 서구에 문화적으로 가깝고 서구와 미국은 선진국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사회주의와 시장주의가 자본주의중에서도 다르게 발현하는 곳이기에 선진국중에서는 극과극인 셈이다. 서평에 사대주의가 있다는 말이 있었는데 나도 동의하며 여기에 미국은 모두 착하고 한국은 모두 나쁘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눈에 거슬린다. 그런 경향은 있겠지만 흑백논리는 지나치다. 23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은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대표적인 작전이다. 핵심은 북한군의 후방을 기습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을 앞뒤에서 압박하는 것이었다. 국가기록원도 이를 전쟁 초기의 수세를 공세로 전환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당시 인천은 상륙작전 장소로는 상당히 위험했다.
*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큼 * 수로가 좁고 복잡함 * 상륙 가능한 시간이 제한적 * 인천 시내와 월미도 등에 북한군 방어시설이 존재
그래서 군 내부에서도 인천상륙에 대해 강한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오히려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북한군이 대규모 상륙을 예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유엔군 상륙부대가 인천에 상륙했다. 대략적인 작전 흐름은: 인천 상륙 → 인천 확보 → 김포비행장 확보 → 한강 진출 → 서울 공격 → 서울 탈환이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상륙 다음 날인 9월 16일 경인가도로 진출, 9월 18일 김포를 점령하고, 9월 19일 한강선에 도달해 서울 탈환작전을 전개했다.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도 미 제8군이 총반격을 시작했다. 결국 북한군은 앞에서는 낙동강 전선의 유엔군에게 공격받고, 뒤에서는 인천상륙부대에게 공격받는 상황에 놓였다. 맥아더가 노린 것은 '서울'만이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진짜 의미는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끊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군 주력은 낙동강까지 내려와 부산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면 북한군의 병력·탄약·식량 보급선이 끊기고, 후방이 위협받게 된다. 즉, 낙동강에서 정면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북한군 뒤를 잘라서 전체 전선을 붕괴시키겠다는 작전이었다. 실제로 국가기록원은 인천상륙을 유엔군의 성공적인 우회기동으로 북한군의 전·후방을 단절한 작전으로 설명한다. 흔히 “맥아더 혼자 인천상륙작전을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연합작전이었다. 국군도 참여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편성된 국군 상륙부대는 약 7,000명에 달했고, 유엔군은 국군을 포함해 약 7만 명 규모의 제10군단을 편성했다. 또한 인천상륙과 함께 장사상륙작전이 양동작전으로 전개되어 북한군 후방을 교란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 9월 15일 인천상륙 * 9월 16일 낙동강 전선 총반격 * 9월 18일 김포 확보 * 9월 19일 한강 도달 * 9월 28일 서울 수복
결국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고, 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갔다. 이 작전이 성공한 뒤 왜 맥아더가 38선을 넘어 북진했고, 결국 중국군 개입과 1·4후퇴로 이어졌는지까지 연결해서 보면 6·25전쟁의 전체 흐름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점은 참모는 상륙작전의 성공을 우리 환경만을 고려하여 인천이 아닌 다른 지점이 좋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상대의 환경을 고려한 것이다. 상륙에 어렵기에 방어자원도 적게 배정하고 그 자원도 방심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결과는 확률이고 그 확률이 적어도 효과가 크다면 책임자로서 밀고나가야 한다. 어차피 어느쪽이든 책임지는 사람은 책임자이므로 판단도 책임자가 하는 것이 주도적인 삶이다. 1944년 아이젠하워의 노르망디와 1950년 맥아더의 인천은 비슷했지만 최종 결과는 달랐다. 하나는 종전을 이끌어냈지만 우리는 여전히 휴전중이기 때문이다. 172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2018)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특히 대규모 공개 전도집회인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Billy Graham Crusade)’를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그의 설교는 상당히 단순하고 직접적이었다. “성경이 말하기를…”이라는 식으로 성경 구절을 중심에 놓고 죄, 회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구원을 강조했다. 또한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했다. 라디오와 TV, 영화, 위성방송 등을 이용해 전 세계에 설교를 전달하면서 현대적인 대중 전도운동의 모델을 만들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설교가 큰 호소력을 가졌던 것은 단순히 말을 잘해서라기보다 내용·전달 방식·시대적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 메시지가 아주 단순; 복잡한 신학적 논증을 길게 설명하기보다 핵심을 반복했다.
인간은 죄인이다 →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라. 청중이 종교에 익숙하지 않아도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분명했다. 특히 설교 마지막에 결단을 촉구하는 방식이 강력했다. 집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청중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권하는 이른바 초청(altar call)을 사용했다.
2. 어려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영어는 매우 평이했다.
화려한 수사나 복잡한 철학적 표현보다는 짧고 알아듣기 쉬운 문장을 사용했다. 그리고 반복했다. 죄 → 십자가 → 예수 → 회개 → 구원. 이 핵심 메시지를 여러 방식으로 반복하기 때문에 수만 명이 모인 대형 집회에서도 메시지가 명확하게 전달됐다.
3. 목소리와 침묵을 매우 잘 사용; 빌리 그레이엄의 유명한 특징 중 하나가 목소리의 강약 조절.
처음부터 큰 소리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중요한 부분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다시 낮췄다. 그리고 의외로 침묵을 많이 활용했다. 예를 들어 청중에게 질문을 던진 뒤 잠시 멈추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당신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같은 질문이 수만 명에게 던져지면, 집단 속에 있으면서도 개인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효과가 생긴다.
4. '너희'보다 '당신'에게 이야기; 이것이 상당히 중요.
그의 설교는 사회 전체나 교회의 문제를 분석하는 것보다 청중 개인의 삶을 건드렸다. * 당신은 외롭지 않은가?* 당신에게 죄책감이 있지 않은가?* 돈이나 성공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죽음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과 화해했는가?
이런 질문은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상당히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5. 그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이 부분이 빌리 그레이엄의 큰 장점으로 평가.
그는 자신을 중심에 놓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중심에 놓으려고 했다. 그의 유명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내 이름을 잊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라.”라는 취지의 태도였다. 대형 스타 설교자가 되기 쉬운 환경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메시지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6.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 빌리 그레이엄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의 회고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이 “진심으로 믿고 말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는 점.
그는 전문적인 웅변가처럼 현란하게 말하기보다, 상당히 진지하고 확신에 찬 태도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분석하면 재미있는 역설이 있다. 내용은 단순하고, 문장도 쉽고, 논리도 복잡하지 않은데 설득력은 강했다. 그 이유는 단순한 메시지 + 반복 + 강력한 전달력 + 개인에게 던지는 질문 + 시대적 불안 + 설교자의 확신이 결합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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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제1장. 체면 _ 옷을 벗어라
제2장. 추진력_ 몸은 바로 마음이다
제3장. 결단력_ 뛰고 나서 생각하라
제4장. 소심증_ 플러스 발상
제5장. 소신_ 소신 있는 거물
제6장. 미안 과잉증_ ‘안돼’라고 말하는 용기
제7장. 열등감_ 남과 달라지는 연습
제8장. 대인불안_ 눈치작전의 대가들
제9장. 조급증_ 미래의식을 가져라
해설;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