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교사단체를 중심으로 학교폭력을 학생폭력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왜 그런 주장이 나왔을까.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뜬금없이 이런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니, 속내가 궁금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추측해볼만한 내용을 찾았다. 학교폭력은 학생들 간에 발생하는 폭력이기 때문에 학교폭력이 아닌 ‘학생폭력’으로 불러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현실을 비켜가려는 면피용 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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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병선
문학박사·교육평론가 |
학교폭력이면 어떻고 학생폭력이면 어떨까. 하지만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매우 위험한 방어기제가 숨어있다. 면피(免避), 바로 면피다.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고도의 면피용 꼼수로 등장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학교폭력을 학생폭력으로 둔갑시킴으로서 학교는 제3자의 입장으로 전환되어 어느 정도 발을 뺄 수 있다는 비교육적 계산이 깔려있다. 이런 생각은 학교폭력이 발생할 때마다 학교가 적극적으로 문제에 대한 예방과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은폐하는데 급급해 왔다는 지적과도 정확히 일통한다. 이쯤 되면 학교폭력을 보는 교사들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것이다. 체제에 안착한 교사들은 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지 관념적인 차원에서만 학교폭력의 예방과 해결을 외친다. 이들은 학교폭력이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학교 내에서 실천적인 활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단지 학교폭력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정도까지일 뿐이다. 노암 촘스키와 같이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을 쓴 교육평론가 도날도 마세도(Donaldo Macedo)에 의하면 이들이 바로 촘스키가 언급한 ‘통제위원’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통제위원들이란 자신들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학교 내에만 머물며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그대로 재생산 하는 사람들이다.
진보적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하워드 진(Howard Zinn)의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그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사회에 진보적인 전망을 견지하고 심지어 그것을 강의하는 사람들이 사회투쟁이 벌어지는 외부현실과는 단절되어 있다. 만일 교실이 봉인된 그 자체로만 존재한다면 지식인들은 학생들에게 그 같은 교실 진보주의만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치게 될 것이다. 이는 바깥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영구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들의 표현을 빌리면 ‘딜레땅티즘(dilettantism)’, 즉 행동과 비판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다.
학교폭력을 학생폭력으로 바꿔 부르면 빈발하는 학교폭력이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상황이 달라지는가. 역시 그렇지 않다. 학교폭력을 학생폭력으로 바꿔 불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바꿔 불러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학교폭력을 학생폭력으로 호도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애도(哀悼) 없는 학교라는 외부의 비판도 이런 태도에서 비롯된다. 특히 교직사회의 대표적인 단체인 교총이 앞장서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말로는 학교폭력을 언급하지만 적극적인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딜레땅티즘의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지금까지 학교가 폭력을 은폐하기에 급급해왔다는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학교의 은폐시도와 교사들의 면피적인 태도를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적하지 않던가. 이런 점에서 학교와 교사들이 말만이 아닌 행동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며 문제해결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교사들은 학교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이런 주문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생각해보자. 학교폭력이 문제라는 식의 담론을 즐길 수는 있지만 정작 실제적인 문제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지 않았던가. 학교폭력을 학생폭력으로 바꿔 불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