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방언에 관하여 진짜냐 가짜냐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논란이 많습니다
개인체험을 앞세워 성경을 체험에 맞게 적용할것이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개인체험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판단해야 할것입니다
아래글을 현대방언이 성경적인지 아닌지 판단할수 있는 참고자료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http://www.reformanda.co.kr/theology/111313
최덕성 박사의 전체 글 보기
(아래는 일부만 발췌한것임)
4. 고린도전서 14장 2절
오순절주의 ‘방언’ 지지자들은 그것이 하늘의 언어이며,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라고 하면서, 그 근거를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찾는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런데 과연 이 구절이 ‘방언’의 정당성을 보장하는가?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인가? 신도들에게 적극 권장하여 체험하도록 권할만한 신비한 하늘의 언어인가?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활동이거나,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개념은 이 본문에 대한 미숙한 번역에서 빚어진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한글 번역문은 그리스어 본문에 있는 단어 4개를 빠뜨리고 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부터 5절을 코이네 그리스어에 충실하게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것을 사모하십시오. 특히 예언을 열망하십시오. 그 까닭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신(神)에게 하기 때문에 자기 영으로 비밀을 말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끼치며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세우고,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를 세웁니다. 나는 여러분이 다 방언들을 말하기를 바랍니다만, 예언할 수 있기를 더 원합니다. 방언들을 말하는 사람이 만일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사람만 못합니다”(고전 14:1-5).
위 본문은 예언을 강조하며 ‘방언’을 경계한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은 ‘방언’을 교정하는 메시지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다.
5. 방언은 비밀을 말하는 수단인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이 오순절주의 '방언'을 지칭한다면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모순들이 발생한다. 같은 장에서 여러 가지 상충되거나 모순이 생긴다.
첫째,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라면 왜 청중이 알아듣는 통역을 하라고 하는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라.”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면 이를 통역하라고 함은 모순이다. 남의 비밀을 청중에게 공개하라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바울은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라고 말한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라고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라”고 한다.
둘째,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 한다. 이 맥락의 방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일이면 그것은 통역해야 할 까닭이 없다.
셋째, 바울은 자신이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한다.
그는 고향 방언 길리기아어, 팔레스타인 방언 아람어, 국제어 헬라어, 유대인 방언 히브리어에 능통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군대 안에서 통용되던 라틴어 방언도 어느 정도 구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여러 가지 방언 구사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이 방언과 관련하여 “감사하다”고 한 것은 타인이 알아듣지 못하고 교회와 타인에게 덕을 세우지도 못하는 ‘방언’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종 방언들” 곧 여러 지역 방언들-외국어들을 말하거나 통역하는 은사(고전 12:10, 28)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넷째, 바울은 방언들-외국어들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행 14:39)고 하면서, 타인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부정적으로 서술한다.
외국어는 장려하고 의미 없는 ‘방언’ 곧 중얼거림은 경계한다. 국제도시 고린도에 모인 외국인들은 자기들의 방언으로 대화를 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방언을 금하지 말라,” “방언하기를 원한다”고 한 메시지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임에 틀림없다.
'방언'에 대한 부정적 서술을 뒷받침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구약성경의 율법서가 사도행전의 방언을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바울은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다”(고전 14:21-22)라고 한다.
다섯째, 바울은 교회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명료하게 이해되는 언어로 말함이 말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이 말하는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라면, 바울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까닭으로 이를 무익하다고 말할 까닭이 없다.
여섯째, 바울은 방언을 질서 없이 하면 "미쳤다"고 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한다.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외국어)으로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한다.
일곱째,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하라”고 한다.
전술했듯이,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면, 왜 한 사람이 통역을 해야 하고, 왜 두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회중을 향하여 방언으로 말을 해야 하는가? 바울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잘라 말한다. 바울이 권장하는 방언은 좁은 공간의 예배 실에서 한꺼번에 통성기도 하듯이 하는 중얼거림의 ‘방언’이 아니다.
여덟째, 바울은 방언을 무질서와 품위상실과 연관시킨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고, 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한다. 바울은 ‘방언’을 교회 안의 무질서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이상의 요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이 말하는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 아님을 시사한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다.
6. 방언기도
성경에 없는 ‘방언기도’가 없다. 성경은 ‘방언기도를 하라'고 하지 않는다.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라'고 하지 않는다. ‘방언’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방언’을 성령 받은 증거 또는 구원받은 증거라 하지 않는다.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하게 된다고 하지 않는다. 방언을 사모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파당, 음행, 송사, 결혼, 우상제물, 육체부활, 여성의 수건쓰기, 바울의 사도권 시비,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는 주장, 그리고 ‘방언’ 등 본받을 것이 없는 교회였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외국인들이 말하는 방언이고, 둘째는 오늘날의 ‘방언’이다. 후자는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을 받게 하고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 곧 거짓 사도들 곧 궤휼의 역군들이 몰고 온 마법적 기호 발음으로 보인다(고후 11:4).
하나님은 능력의 신이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 가이샤라, 에베소의 표적 방언을 일으킬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초자연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자에게 탁월한 외국어 능력을 주어 교회에 유익을 끼치게 할 수 있다.
전능한 하나님의 활동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알려진 바로는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 역사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초자연적 의사소통의 수단 곧 표적 방언은 나타나지 않는다.
종교개혁신학자 존 칼빈은 제네바교리문답 제247문에서 “그렇다면 방언으로(알지 못하는 말)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고 “이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입니다”고 답한다.
종교개혁운동 시대에도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방언' 현상에 집착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 ‘방언’은 대부분 몇 개의 단어들로 구성된 단순 음절의 반복이다. 유튜브에 경쟁적으로 올려져 있는 "한 시간 방언," "두 시간 방언"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의 소리를 들어보라.
선박용 모스 부호(Morse Code)를 소리로 발음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단조롭다. 성경이 긍정적으로 말하는 방언의 조건 곧 언어의 구성 요소를 갖추고 있지 않다.
첫댓글 http://www.reformanda.co.kr/theology/111313
최덕성 교수의 전체글 보기
최덕성교수는 방언은사를 체험하지 못해 본 분이로군요. 성경해석도 자의적이구요. 전형적인 고신측 장로교측의 편협한 해석입니다. 지금은 총신대학원 채플에서도 방언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이렇게 대적하는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잘못하면 성령 훼방죄를 범할 수도 있어요. 잘 모르면 침묵하는 게 차라리 낫지요.
최덕성교수는 은사중단론자 인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을 끝으로 모든 성령의 은사는 중단되었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이곳 까페 회원들 모두 미혹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네에.
저는 평신도이지만 유명한 교수 목사님이라해서 무조건 그들의 의견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미 이 세상에서 상급을 받았다고 조심스레 생각하고 있구요. 방언을 받았을 때 너무 기뻤구요.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는데 진짜 많은 영적 도움이 되는게 사실입니다.
방언을 조금이라도 더하려고 노력 중인 1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