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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Please, Save Him, Please
눈이 내리지도, 우리의 약속만큼 아름답지도 않았던 크리스마스의 밤, 나는 리반의 발끝에서 짓이겨지던 붉은 액체를 기억한다. 검고, 축축하고, 비린 냄새가 나는 우울한 액체였다.
그날 나는 오후가 다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농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크리스마스는 비워두고 싶었기 때문에 위촉받은 문건들을 그날 아침께 까지 처리하고 간신히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거실로 나오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날은 무척이나 맑았고, 리반은 어느 새 외출을 해버린 듯했다. 나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크리스마스였는데.
“고객님이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
몇 번 울리던 신호음은 곧바로 안내원의 목소리로 전환되었다. 안타깝게도 리반은 ‘통화 거절’이라는 기능을 습득한 모양이었다. 시계는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지점을 달리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 남아있는 야채들을 대충 갈아 마시고 있을 무렵, 전화가 울렸다. 그날 문학시상식에 참석한다며 ‘크리스마스에 홀로 둬서 미안’하다고 했던 리사에게서였다. 야채주스의 씁쓸한 세 모금 째를 마시던 도중이었다.
프리미엄 석에는 우·연·히 단 한자리의 공석이 났다고 했다. 나는 그 공석을 메운 채, 많은 사람들의 중심에서 시문학상을 수상한 리사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미모의 고독한 시인은 대중을, 늙탱이는 위원회를 군림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죽이 잘 맞는다는 사실은, 없는 공석도 창조해낼 만큼 사치스러워질 수 있음을 뜻했다.
“너무도 외로운 길이고, 깊은 고독입니다. 매일 밤 서느런 집의 천장 아래 홀로 누워 ‘죽음,’ 그 고요한 순수함을 갈망했었지요. 잠이 들면, 끝내 이대로 깨어나는 일이 없기를, 흘러가는 찰나의 마디마디마다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예, 끝내 나는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어둠 속에서 그 사람이 제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눈을 감을 하등의 이유가 없노라고, 세상을 마주해야 할 이유를 이 나라 법률의 조항 수만큼이나 알려주겠노라고. 우리 같은 사람의 감성과는 거리가 먼 그 흑백의 사람이, 세상 가장 진실 된 마음을 담아 그리 나를 잡아 놓았습니다. 4년을 함께 했음에도, 나의 모든 시간이 궁금하다 속삭이고 매일을 연모 한다 손 잡아주던, 그 분에게 감히 이 신성한 상을 바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그녀의 감색 드레스가 나를 향해 돌아 서 기쁘게 웃었다. 나는 수많은 함성 속에,
“혹시 보고 있다면, 리반, 저건 모두 거짓말이야.”
이 속삼임이 묻혀 사라지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시상식은 오후 9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리사는 꼰대들에게 시상식 내내 그녀의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나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에 정신이 나가있었다. 나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리반이 너무도 걱정되었다. 내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집에 들어와서 나를 맞이하는 짓은 하지 않는 녀석이었으므로.
식장의 주차장은 밝았고, 지나치게 깔끔했다. 나는 내 차가 세워진 가장 구석자리의 코너로 그녀를 몰았다. 그녀의 감색 드레스는 충분히 관능적이었고, 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잡아 물며 최대한 빨리 발기될 수 있도록 온갖 지저분한 망상들을 떠올렸다.
“유진, 누가 보겠어!”
“바라는 게 그거 아니에요?”
“… 뭐?”
그녀가 나를 밀쳐내었다.
“무슨 의미야?”
온 목소리가 자신이 상처받았노라고 외치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 사랑 놀음도 정도껏 해, 하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리반과 내가 한 약속에 완전하게 도취해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트리와 장갑과 우리의 발자국, 리반의 고양이와 눈사람, 크리스마스 노래. 아, 추위에 떨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리반, 눈사람의 팔을 달아줄 나뭇가지를 쥐고 있느라 손이 시리진 않을까, 혹여나 자신의 고양이가 도망갈까 노심초사하고 있지는 않을까, 또는 기다림에 지쳐 힘없이 토라져있지는 않을까.
“대답 해.”
―아니. 그가 기억이나 할까. 우리가 한 아름다운 약속들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이나 해봤을까. 나는 좀 더 객관적이 될 필요가 있다는 데까지 결론이 이르렀다. 약속에 취한 정신이 서서히 맑아져 왔고, 이제 그녀에게 말실수를 했다는 데에 대한 한심한 후회만이 맴돌았다.
“미안해요, 리사.”
“무슨 의미냐고 물었을 텐데.”
나는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진 그녀의 앞섶을 반듯하게 정돈해 주었다.
“오늘 수상 소감에서 나를 언급했기에,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어요. 아닌가요?”
“같은 마음?”
하고 그녀가 되물었다. 한심하리만치 구질구질한 변명. 그러나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상적인 시나리오 공식에 어긋나는 오류를 내가 범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녀의 뒷목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져주며 고혹적인 쇄골에 입을 맞추었다.
혹시 듣고 있다면, 리반,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죠. 나와 당신, 우리를.”
이건 모두 거짓말이야―.
집에 가니 리반은 아직 들어오지 않은 채였다. 방문은 잠겨 있었고, 나는 마감 직전의 대형 전문점에서 포장해 온 육중한 선물상자를 거실 카펫 위에 올려둔 채 소파에 몸을 뉘었다. 11시가 넘은 시간, 1시간도 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의 밤이었다. 곧 자신의 고양이를 품에 안은 리반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몸을 일으켜 짐짓 모르는 체하며 다정하게 그를 맞았다. 그 또한 별로 상관없어 보였다.
“리반, 이리 와서 내가 뭘 사왔는지 봐봐. 아주 깜짝 놀랄 거야.”
나는 카펫에 놓인 선물상자를 눈짓하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칭칭 감긴 목도리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곧 선물상자의 리본이 풀리고 마침내 상자를 열었을 때,
“공룡도 있고 상어끼리 서로 물어뜯는 것도 있어. 너 사자랑 호랑이랑 싸우면 누가 이기나 궁금하다고 했지? 넌 사자, 난 호랑이였잖아. 자, 이제 여기에 그 답이 들어있는 거야. 아, ‘아마존 습지’는 예전에 본거긴 한데, 너무 재밌던 거 같아서.”
나는 뿌듯한 마음에 재잘거리느라 그의 표정이 어떤 식으로 일그러져 가는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말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나는, 기억한다. 눈 대신 내린 햇살이 몹시도 포근하던 작년의 성탄절엔, 경박하게 깔깔거리던 내 앞에서 가엾게 무너져 내리던 리반이 있었다.
“이런 게 아닌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던 리반이 있었다. 뭐? 하고 내가 물을 새도 없이 기어코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정신을 차려보니 커다란 선물상자를 채웠던 101장의 자연 다큐멘터리 DVD는 거실 바닥에 산산조각이 난 채로 흩어져 있었다. 이따금씩 흥분을 가누지 못한 리반의 들숨이 경련하는 소리가, 반년이 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의 발에서 새어나오던 검붉은 피의 자국들, 플라스틱과 DVD의 파편. 이런 게 아니야, 그의 상처받은 목소리, 제기랄, 그저 아니라고만 하면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그날 나는 굳게 잠긴 리반의 방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 그의 발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얇은 집게로 조각들을 떼어내고, 소독을 해서 붕대를 감았다. 잠이 든 건지, 발의 고통보다 더 큰 어딘가의 염증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리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거실을 정리하고, 쓰레기가 된 것을 내다 버렸다. 비록 모양은 달라졌어도 왔을 때만큼이나 육중한, 한 때는 선물상자였을 종이박스였다. 쓰레기장에선 분리수거를 제대로 안 한다며 경비에게 욕도 들었다.
“깡통은 알루미늄 란에 버리시오.”
깡통은 아닙니다. DVD라는 건데, 아니, DVD조각들이라는 건데, 플라스틱도 섞여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플라스틱 조각들이죠. 표지를 장식하던 종이도 있고, 피도 조금 묻어 있습니다. 찔렸거든요…….
“… 많이 아팠을 겁니다.”
쯧쯧, 다 큰 사람이 말이야……. 다 큰 사람이 한심하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리반의 방문에 기댄 채 다리를 뻗고 앉았다. 오전 12시 39분, 크리스마스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리고 멍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던 나는 숨을 조이는 위화감을 느꼈다.
10분만이었다. 귀가한 우리 둘의 간격이란, 단 10분이었다.
나는 리반이 우리의 첫 만남을 잊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울 앞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샤워를 할 때, 혹은 종이에 손가락을 살짝 베이기라도 할 때. 우중충한 날이면 전기가 오르듯 저릿저릿할 것이고,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마다 그 고통과 저울질하며 자신의 사랑을 체감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단 한 번, 우리의 첫 만남에 대해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내가 그를 찔렀을 때보다 더욱 아프다고, 올해의 첫 일출 앞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였다.
크리스마스가 끝난 그 해의 마지막 날 아침, 리반과 나는 극동 지방 행 비행기에 올랐다. 크리스마스 이후에 부쩍 기운이 없어 보이는 리반에게 기분 전환을 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남는 비행기 표는 없었고,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해 사흘 밤을 꼬박 새며 표를 취소할 사람을 구해야했다. 싸구려 항공의 표 두 장은 시가의 11배가 넘는 금액을 지불한 결과물이었다. 한 해의 첫 태양을 리반과 함께 누리는 것에 대한 기회비용 치고는 썩 저렴한 값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생각보다 통이 작았다.
해안 지방은 말 못할 정도로 춥다는 영의 조언을 수용해서, 리반과 내 것의 파카 두 벌도 샀다. 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조금 다른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기운이 없는 리반의 파카 매무새를 매만져주며 우리 둘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을 때, 나는 마치 십대 후반의 열정적인 소년인 듯한 기분을 느꼈다. 새하얗게 정돈된 리반의 얼굴 옆으로 붉게 숨을 몰아쉬는 나의 얼굴, 같은 옷을 입은 두 사람.
이코노미 좌석은 정말이지 극도로 실망스러웠지만, 창가였기에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리반은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내식은 최악이었다. 그와의 일정을 낭만적이고 완벽한 시간들로 채우고 싶었던 나는 그 흠이 못내 불쾌했다. 내 계획대로라면 1등석에 앉아 꼬냑을 홀짝거리며 커다란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어야 했는데.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밤중이었지만,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도시의 광장은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열기가 흘렀다. 나는 일전에 리반이 지나가다가 보고 탄성을 내지르며 ‘끝내준다’고 했던 자동차를 렌트해, 그 지역 가장 호화스러운 호텔로 리반을 이끌었고, 여전히 그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조급한 마음을 다잡으며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죽어가는 아기 새 마냥 침대 이불에 틀어박혀서 다음 날까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실 반대쪽에 달린 작은 방에도 침대는 있었지만, 그와 멀리 떨어져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신경이 잔뜩 곤두선 리반의 옆에 누울 기분도, 자신도 없었다. 나는 침실과 중앙 홀 사이의 애매한 공간에 소파를 옮겨서, 그곳에서 잠을 청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리반 또한 그런 듯했지만 그의 침묵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단 한 번, 다친 그의 발에 붕대를 갈아줬을 뿐이다. 밤새도록 침실에서는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괜한 일을 벌인 건가 싶어 후회가 물 밀 듯이 밀려들어온 건, 일출이 시작되기 약 20분 전이었다. 쏟아내는 그의 입김마저 곧 얼어버릴 정도로 몹시 춥던 겨울의 새벽, 리반은 퀭한 눈으로 알 수 없는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 아주 팽팽하게 간신히 이어졌던 실 같은 것이 가슴 속에서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리반.”
그는 대답 없이 먼 수평선만을 응시했다. 나도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와 같은 지점을 바라보았다. 자판기에서 갓 뽑아낸 종이컵에선 싸구려 커피 향이 났다.
“그 해 첫 태양이 솟을 때 소원을 빌면 정말로 이루어진대.”
내 목소리는 볼썽사나울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울렸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리반이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마주보지 않았다.
“믿지 않아도 좋아. 근데 나는 소원을 빌 거야. 내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 거니까.”
주위에선 이제 10분, 10분 남았어!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달뜬 사람들의 소박한 웃음이었다. 앞으로 10분 뒤, 하고 나는 이제는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소망했다.
그때, 유진, 하고 간신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가 리반에게서 들려왔다.
“무슨 소원을 빌 거야?”
“그러는 넌?”
내가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소중한 목소리, 난 그가 뱉어내는 음절 하나하나를 귀에 담으려고 애를 썼다.
“난 이 사랑을 어서 끝내달라고 빌 거야.”
“…….”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말문이 막혔다.
“유진이 그랬지, 축하한다고. 내가 하고 있는 건 아주 멋있는 거라고.”
“…….”
“근데 가슴이 아파 나는, 유진. 그날 유진이 나를 찔렀을 때보다. 더욱.”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건 옳지 않은 건가봐. 심지어 그 사람은 나를 알지도 못해. 이런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그의 볼에 스치는 차가운 바닷바람과 그의 입김과 사람들의 아우성,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리반, 아, 사랑스러운 리반. 나는 한 번도 가슴에 물리적인 흉기가 꽂힌 적이 없지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이 그가 말한 그 통증이라면, 나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리반, 하고 부르며 나는 종이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네가 품은 마음에 옳거나 혹은 그른 일이라는 건 없어.”
그래, 이렇게나 고통스러워도 네가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정말로 바란다면 그렇게 믿으면 돼. 그럼 그게 바로 진실이야. 진실이라는 건, 정말로 ‘그렇다’는 거고, 아무리 왜곡돼도 결국 ‘그렇게 된다’는 거야.”
나는 리반을 바라볼 수 없었다.
“정말로 그만 두고 싶니? 네가 진짜로 바라는 건 뭐지?”
커피를 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아무렇게나 망가진 얼굴을 감출 수 있는 효과적인 소품이었던 것이다.
“고마워, 유진.”
그가 웃었다. 비로소, 웃었다. 리반의 기분이 나른해 질수록 나는 기뻐야했는데, 무엇인가 자꾸만 부서져 내렸다.
“유진의 여자는 분명 아름다울 거야. 나의 ‘아름다움’처럼.”
리반의 다정한 목소리, 손에 든 종이컵이 미세하게 떨렸다.
“글쎄,”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리반’을 바라보았다.
“나도 꽤나 고전 중이야.”
웃는다고 웃었는데,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그 때였다. 주위에서 하나 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어어, 시작한다! 오, 사, 삼, 이…….
“…….”
태양이 솟았다. 올해의 첫 태양이었다. 나는 태양 대신 리반을 바라보았다. 눈을 꼭 감은 채 양광을 누리고 있는 눈부신 생명체가 거기 있었다. 소원을 비는 것일까, 그리하여 너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그가 살며시, 천천히 눈을 떴다.
“… 유진, 무슨 소원 빌었어?”
햇살 속에서 리반이 말했다.
“아직.”
“그래. 정말로 믿음직스러운 태양이야.”
이제 같은 파카를 입었다는 것이 꼴사납게 느껴졌다. 내 십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이 났는데.
“나 이제 화가 풀렸어.”
―불쌍한 리반, 그건 ‘화’가 아니라 ‘슬프다’는 감정이었단다.
나는 싱긋 웃으며 태양을 향해 눈을 감았다. 이제 내가 소원을 빌 차례였다.
“그 후에, 오믈렛을 먹었어. 그, 알지? 삼류 영화에서 가끔 나오는 다 허물어진 집. 음식에서 바퀴벌레가 나온대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집. 남김없이 다 먹었어. 리반은 남기는 걸 싫어하거든. 후식은 됐다고 했는데, 리반이 돈지랄하지 말라면서 으름장 놓기에 ‘샤토긴죠’였던가, 불어도 일어도 아닌 이상한 와인을 마셨어. 오향장육보다 더 신비로운 향… 제기랄, 지금도 생각하면 속이 메스꺼워. 그리고 무슨 재래시장에 갔어. 쟝, 상상이 가? 재래시장이라고. 생선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고 스낵이 진열된 바로 앞으로 배달용 스쿠터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가는. 아, 결국 먹었어. 그릴 소시지. 유진도 줄까, 하기에 아니, 괜찮아, 라고 했더니 아니야, 한 입 줄게, 해서 먹어버리고 말았지. 휘발유 맛이었어. 장갑도 샀어. ‘아름다움’의 것을 고르라고 했더니, 됐다면서 내 것을 사주더라고, 하하. 보여줄까? 그래, 좀 유치하지? 나도 알아. 아, 리반은 빨간색. 그래도 나름 따뜻해. 계속 보니 나름 봐줄만하기도 하고. 참, 너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이라고 알아? 그걸 했는데, 내가 다 잃고 리반이 다시 벌었지. 알아, 걸리면 짤리겠지. 근데 휘발유 맛 소시지도 먹은 마당에 뭘 못 하겠어. 그래, 그날 리반이 다 지불했어. 내가 지갑을 슬며시 꺼내기라도 하면, 자기를 짜증나게 하지 말라며 온갖 성질을 내더라고. 무슨 소리야, 차는 당연히 일찌감치 반납했지. 우린 걷거나 전철을 타고 다녔는걸. 발이 많이 아팠을 텐데, 끝까지 자리에 한 번 안 앉아, 그 독한 녀석은. 뭐, 호텔? 지금 호텔이라고 그랬어? 아니, 게스트하우스라니, 우린 여인숙에서 잤어. 그 파카를 나란히 입고 말이야. 밤새 떠들었지. 이따금씩 내가 졸고, 리반도 졸고. 아, 웃기지도 않는 얘기에 웃어주느라 정말 고생했어. 그런 개그는 어디서 배워오는 거지, 단단히 혼을 냈어야 했는데. 응, 이코노미. 몰라, 불편이고 나발이고, 곧바로 잠 들어서 착륙 방송을 듣고 깼는걸. 그래, 리반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지. ……뭐? 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마음이 심란했다니, 내가 한 말은 다 코로 들었어? 정말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고, 내 생애 다시는 없을 정도로.”
“…….”
“그가 행복해 했으니까.”
부제 수정.. 선을 그으려다 모르고 밑에 더보기를 만들어 버렷는데 어떻게 지우는 지 몰르겟ㄴ에요
첫댓글 잘읽었어요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