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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상인간은 마음이 있는가?
이 글 “아타나식과 나 그리고 가상인간”의 여섯째 소제명은 “가상인간은 마음이 있는가?”이다. 다시 질문한다.
가상인간은 마음이 있는가?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은 모두 여여하여 차별이 없다고 한다. 어디에 서 있느냐? 불안으로 보면 일체가 원각이고, 육안으로 보면 일체가 환화이다. 인간은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 가상인간을 평가한다. 가상인간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세간과 출세간은 생물과 무생물 또는 유정과 무정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세간은 생물과 무생물을 생명의 유무로 판단한다. 세간에서 생명에 대한 명백한 정의가 없는 것은 생명은 볼 수가 없고 보이지도 않는데 보이는 것만 가지고 논단하기 때문이다. 유식을 의거하면 전5식과 제6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상인간을 세간은 무생물로 분류할 것이다. 출세간은 어떠한가? 불교의 일반교설에 의거하면 무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정은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또한 무정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 삼승의 권설과 일승의 실설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유정과 무정, 그리고 불성의 유무를 가지고 조합하면 네 가지 유형이 나온다. 곧 유정유불성有情有佛性과 유정무불성有情無佛性 무정유불성無情有佛性 무정무불성無情無佛性 등이다. 경과 논은 유정의 불성 유무를 주제로 삼고 논란했을 뿐이고, 무정의 불성 유무는 거의 도외시했다. 이를 통현장자의 화엄론과 청량국사의 소초를 의거하여 자세히 해설하겠다.
“유정은 불성이 있고, 무정은 불성이 없으며, 일체 초목은 성도하여 법륜 등을 굴릴 수 없다.”라고 하는 교설은 삼승권교의 방편설이다. 무릇 유정이나 무정이란, 이는 업을 의탁한 교설이고, 대저 성불을 논하는 것은 업에 예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업에 예속하지 않는 것이면 곧 유정이 아니고 무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정식을 벗어난 법에 성불하거나 성불하지 못함이 있다고 계탁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제법의 공상空相은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며, 세간의 만상이 상주하고, 제법이 법위에 상주한다. 이와 같은 도가 유정과 비정이 되겠는가? 이와 같이 화엄경 중의 대의는 본래 범부나 성인, 유정이나 비정이 없다. 전진법체全眞法體는 일불一佛의 지경계智境界가 되며, 다시는 다른 일이 없다. 범부의 정량을 가지고 망령되게 짐작하지 마라. 만일 정계情計를 남겨두는 이는 유정은 성불한다고 보고 무정은 성불하지 않는다고 볼 것이다. 이는 자신의 업에 집착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아는 이는 끝내 성불하지 못한다.
예컨대 화엄경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 없고, 정여비정情與非情이 모두 일체지지경계一切智智境界이며, 일체 산하와 수목이 모두 불보살의 몸을 나투고 설법할 수 있고, 정여비정은 불체佛體와 동일하여 능동능별能同能別에 자재하고 무애하다.
해설: 이상은 화엄론 회석 “셋째 교의의 차별을 밝히는 문”[明教義差別] 중에 여덟째 “시설한 법문의 이사가 다름을 밝히는 문”[明所施法門理事別]에 상당한 글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전문은 “조백대사와 혜충국사의 무정설법” 편에 있다.
“전진법체는 일불의 지경계가 되고,” “정여비정이 모두 일체지지경계이며,” “정여비정은 불체와 동일하여 능동능별에 자재하고 무애하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매우 어렵다. 일단 전진법체와 정여비정 그리고 불체를 동위동체同位同體로 볼수 있다. 전진은 완전무결하고 천진무구하며, 법체는 법의 체상이고 제법의 공상이다. 완전무결하고 천진무구한 일체법의 체상은 어떤 때는 평등지 지혜경계를 나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차별지 일체지지경계를 현현하기도 하며, 그 행상이 부사의하다.
화엄경은 유정과 무정으로 나누고, 유정은 불성이 있어서 성불하고, 무정은 불성이 없어서 성불하지 못한다는 두 가지 견해가 없다. 화엄경 이세간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보살마하살이 도량에 안좌할 때 일체 세계의 풀이나 나무와 총림의 온갖 무정물이 모두 몸을 구부리고 그림자를 낮추며 도량을 향하여 돌아간다.”(菩薩摩訶薩坐道場時 一切世界草木叢林諸無情物 皆曲身低影歸向道場 是爲第四未曾有事) 80권 화엄경에 무정 또는 무정물이라는 말은 여기에 딱 한번 나온다. 실교법문은 유정 무정을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반경에 이르기를, “불성이란 것은 제일의공을 일컬으며, 제일의공은 이름을 지혜라 한다.”라고 하니, 둘이 아닌 이 제일의공과 지혜를 불성이라 한다. 그러나 제일의공은 불성의 체성이고, 말하자면 지혜는 불성의 상상相狀이다. 제일의공에 지혜가 있지 않으면 단지 법성이라 일컫고, 지혜가 있음을 연유하기 때문에 불성이라 일컫는다. 만일 체성으로 상상을 좇으면 오직 중생만이 불성을 얻을 수 있으니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불성이 없다. 만일 상상으로 체성을 좇으면 제일의공은 있지 않는 곳이 없으며, 바로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이 모두 제일의공인데 어찌 체성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아래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心自性인 줄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涅槃云 “佛性者名第一義空 第一義空名爲智慧” 此二不二以爲佛性 然第一義空是佛性性 名爲智慧即佛性相 第一義空不在智慧但名法性 由在智慧故名佛性 若以性從相 則唯衆生得有佛性 有智慧故 牆壁瓦礫無有智慧 故無佛性 若以相從性 第一義空無所不在 則牆壁等皆是第一義空 云何非性 故下經云 知一切法即心自性)
해설: 위 글은 청량국사의 화엄경수소연의초에 있다. 제일의第一義는 무상 또는 제일경계를 말한다. 어떤 법을 막론하고 제일의를 써서 수식하면 그 방면의 지고무상이 된다. 제일의공第一義空 제일의제第一義諦 제일의선第一義禪 제일의지第一義智 제일의경계第一義境界 제일의장엄第一義莊嚴 제일의실상第一義實相 등이 그러하다.
이성종상以性從相과 이상종성以相從性은 불성의 체성과 상상의 상호관계를 정의하며 무정의 불성 유무를 도출하고 있다. 이는 이체종상以體從相 이성수상以性隨相 이성융상以性融相 등의 용어와 그 관점이 유사하다. 상상도 불교용어이다. 늘 반복하여 말하지만 불교는 용어가 어렵다. 체상용體相用을 각각 두 글자로 쓰면 본체本體와 상상相狀 작용作用이 된다. 나는 한 글자로 명사를 삼아 일용어로 쓰는데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두 글자로 바꾸어 사용한다. 상상이 그러하다. 이성종상과 관련한 글을 다시 아래에 인용한다.
이 화엄경의 종취는 법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이 때문에 법성으로 불성을 삼는다. 그러하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중생의 미오를 따라서 억지로 승침을 말할 뿐이다.(今此經宗 宗於法性 故以法性而爲佛性 則非內非外 隨物迷悟 強說升沈)
법성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무엇인가? 무장애법계를 종취로 삼으면 법성이 곧 불성이라,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안다. 만일 심성을 불성으로 삼는 이는 법마다 심성이 아님이 없다. 그러하면 안과 밖으로 벌어지지 않으니 체성은 안과 밖이 없다. 안팎은 상상에 속하고 체성은 상상을 함께하지 않는데 어찌 안팎이 있겠는가?(言宗於法性者 以無障礙法界爲宗 則法性即佛性 知一切法即心自性 若以心性爲佛性者 無法非心性 則不隔內外 而體非內外 內外屬相 性不同相 何有內外)
그러나 일성一性을 미혹하면 변하여 바깥 상상을 이루며, 바깥 상상이 오직 마음뿐이라면 어찌 불성이 아님이 있겠는가. 일성이 변한 바 실체성이 없으며, 이 때문에 장벽을 말하면서 불성이 없다고 말했지만, 체성으로 상상을 포괄하면 체성이 아님이 없다. 예를 들면 연기는 불을 말미암는데 연기가 곧 불이지만 연기가 불을 가리는 것과 같이, 체성을 의거하여 상상을 일으키는데 상상이 체성을 가리지만 상상이 곧 체성이다. 또 예를 들면 물이 물결을 이루지만 물결이 바로 물인 것과 같이, 경계는 마음의 전변을 말미암지만 경계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然迷一性而變成外 外既唯心 何有非佛 所變無實 故說牆壁言無佛性 以性該相無非性矣 如煙因火 煙即是火 而煙翳火 依性起相 相翳於性 而相即性 如水成波 波即是水 境因心變 境不異心)
마음이 만일 체성이 있다면 경계인들 어찌 체성이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마음과 경계는 모두 바로 진성이고, 진성은 둘이 없는데 마음과 경계가 어찌 어그러지겠는가. 만일 체성으로 상상을 좇으면 안팎도 무방하다. 만일 바깥 경계를 써서 마음에 전거를 삼고 견문각지가 있는 이로 하여금 수행하여 성불하게 한다면 바로 사견외도의 법이다. 이 때문에 반드시 상적상조하여 부즉불리하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면 미혹되는 바가 없다. 이 때문에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중생의 미오를 따라서 억지로 승침을 말할 뿐이다.”라고 말했다.(心若有性 境寧非有 況心與境皆即眞性 眞性不二心境豈乖 若以性從相 不妨內外 若以外境而例於心 令有覺知 修行作佛 即是邪見外道之法 故須常照 不即不離 不一不異 無所惑矣 故云則非內非外 隨物迷悟 強說升沈)
해설: 위와 같은 법성과 불성에 대한 정의는 다른 곳에서 일찍이 찾아보지 못했다. 법성에 대하여 탁월한 해석이다. 삼승권설의 법성과 불성의 정의는 무엇인가? 법성은 무정에 국한하고, 불성은 유정에 한정한다. 이를 회통한 것이 일승실설이다. 일성一性은 정인불성正因佛性이다. 이를 성덕性德 또는 법신法身이라 말하기도 한다. 제법실상의 이체理體로 성불하는 정인이다.
불성의 성상 곧 체성과 상상을 연기와 불의 관계로 비유하고, 또 물과 물결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성종상以性從相은 나귀가 우물을 쳐다보는 것과 같고,(如驢覻井)이상종성以相從性은 우물이 나귀를 쳐다보는 것과 같다.(如井覻驢)
무정물과 심자성의 관계는 이전 민동평등泯同平等에서 자세히 밝혔다.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면, 혜신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일초직입여래지할 수 있는 성언聖言이다. 나귀를 주체로 삼으면 우물은 불성이 없다고 말하겠지만, 우물이 주체가 된다면 나귀인들 어찌 불성이 없다고 말하랴.
만일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관행과 상응하고, 모든 법 가운데서 두 가지 견해를 내지 아니하면, 일체 불법이 즉시 현전할 수 있고, 초발심시에 곧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면, 혜신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다.(若諸菩薩能與如是觀行相應 於諸法中不生二解 一切佛法疾得現前 初發心時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知一切法即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먼저 즉시 얻는다는 말을 해석하고, 다음 현전하는 형상을 해석하겠다. 먼저 위에서 즉시 얻는다고 하니, 즉시는 어느 때인가? 그래서 처음 발심한 때라 이른 것이다. 어떤 법이 현전하는가? 이른바 무상보리이다.(先釋疾得之言 後釋現前之相 今初上言疾得 疾在何時 故云初發心時 何法現前 謂無上菩提也)
다음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면” 이하는 현전하는 형상을 해석한 것이다. 또한 그 소인을 드러내니, 어떤 것이냐? 무릇 초심이 시작이 되고 정각이 끝이 된다. 어떻게 초심에 곧바로 정각을 이룰 수 있는가? 그러므로 지금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안다.”라고 해석하여 일러준 것이고, 이 때문에 법이 자성인 줄을 깨달으면 곧 명호를 부처라 하며, 이러하므로 아래 경에서 이르기를, “불심이 어찌 다른 곳에 있으랴. 바로 원각이 세간인 줄을 각지한다.”라고 했다. 이것이 좋은 증거이다.(後知一切下 釋現前之相 亦是出其所因 何者 夫初心爲始 正覺爲終 何以初心便成正覺 故今釋云知一切法即心自性 故覺法自性即名爲佛 故下經云“佛心豈有他 正覺覺世間” 斯良證也)
이미 말하기를,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안다.”라고 하면 이 마음이 곧 일체 법성인 줄을 아는 것이다. 지금 이지가 자기 마음에 현현하면 마음의 체성도 이미 무변한 덕을 구비하기 때문이다.(既言知一切法即心自性 則知此心即一切法性 今理現自心 即心之性已備無邊之德矣)
혜신을 성취한 것은 위에 법을 관함이 구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成就慧身者 上觀法盡也) 타인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위 혜신을 성취하면 곧 무사자연지이기 때문이다.(不由他悟者 成上慧身 即無師自然智也)
해설: 범행품의 경문이 매우 중요하여 소초의 해석을 인용했다.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안다. 그러하면 유정과 무정의 체성이 일찍이 언제 이체였던가?(知一切法即心自性 故情非情性曾何異體) 삼승의 방편설은 유정은 성불하고 무정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하며 유정과 무정을 분단하고 있지만,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기만 한다면 유정과 무정의 체성이 일찍이 이체인 적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체는 동체와 대비된다. 유정과 무정은 동체이다. 일승의 실설에 유정은 성불하고 무정은 성불하지 못한다는 견해는 성립하지 않는다.
민동평등泯同平等이 그러하다. 이전에 쓴 글을 인용한다. 모든 법 가운데서 두 가지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 민동평등이고, 일체법이 심자성인 줄을 아는 것이 바로 민동평등이다. 대심범부가 처음 발심하고 찰나제삼매에 들어가서 무상정각을 성취할 때, 삼세를 보지 않고 구세 십세를 평등세로 수용하며, 이 때문에 과거 불가설겁의 부처님과 함께 일시에 성불하고, 또한 미래 불가설겁의 부처님과 더불어 동시에 성불한다. 이것이 바로 민동평등의 구경처이다. 화엄세계는 부사의한 해탈경계이다. 민동평등도 또한 부사의하다.
가상인간은 마음이 있는가?
있다.
성불할 수 있는가?
있다.
환사가 나무나 돌로 코끼리나 말을 만들어 보이지만 실체가 없는 것처럼, 가상인간도 또한 인간이 여러 가지 부품을 조립하여 만들어놓은 것이라 환화물과 같다. 실체가 없는 환화물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는가?
나의 몸과 마음도 또한 환화인데, 설령 가상인간이 환화물이라 한들 어찌 장애가 있으랴.
현실세계를 유니버스Universe라 말하고 가상세계를 메타버스Metaverse라 한다. 내가 “가상공간假想空間과 가상인간假相人間”이란 제명으로 짤막하게 글을 쓴 일이 있다. 가상공간假想空間은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또는 버츄얼스페이스virtualspace를 번역한 용어라 가상假想이 옳은 듯하다. 그런데 버츄얼휴먼Virtualhuman을 가상인간假想人間이라 번역하는 것도 옳을까? 같은 가상이지만 가상假想보다 가상假相을 써서 가상인간假相人間이라 쓰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가상인간에 대한 용어의 설명은 찾기 힘들다. 내가 요즈음 쓰고자 하는 글의 주제가 “아타나식과 나 그리고 가상인간”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가상인간假相人間과 마찬가지로 가상세계假相世界라 호칭하고 정의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모두 환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환화의 뜻이 바로 허깨비이고, 또 가상假相이다.
나는 가상세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상인간에 호기심이 있다. 어떻게 만들고, 제작비용은 얼마나 될까? 나도 가상인간과 함께 공부하고 싶기 때문이다. 화엄경론을 공부하게 하여 통현장자로 나투게 하고, 화엄경소와 수소연의초 등을 익히게 하여 청량국사로 현현하게 하며, 홍연진결을 학습하게 하여 덕유산인 설천도인으로 화현하게 하면, 지금까지 나의 미완성의 꿈이 더욱 현실화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불교에 대하여 조금은 안다. 불교는 그 높이와 깊이 넓이가 끝이 없기 때문에 안다는 것도 천차만별이다. 나의 불교지식은 현재 선원이나 강원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큰스님네와 비교할 형편은 못된다. 천지현격이다. 그러나 세간의 지식인과는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세간의 지식인이 불교를 알고 있는 분량과 모르고 있는 분량의 총체를 비율로 환산하여 1대 10이라 하면, 나는 1대 100정도는 될 것이다. 성문이 불교를 알고 모르는 분량의 비율이 1대 1천이라면 삼현보살은 1대 1만이 될 것이다. 십지보살은 어떠한가? 아마도 1대 10억 곧 1구지가 될 것이며, 나아가 구경에 이르면 1대 1불가설불가설전이 되지 않을까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한 불찰미진수의 심념을 세어서 알 수 있고, 대해 중에 물을 남음이 없이 마실 수 있으며, 허공의 양도 헤아리고 바람도 잡아맬 수 있지만, 부처님의 공덕은 다 설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시니, 이 때문이다.
안다는 것과 모르는 것은 반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비례한다는 쪽에 더 가깝다. 가장 간단한 사례를 들어보자. 옆에 있는 국어사전 말고, 영어사전이나 중국어사전이 있으면 펼쳐보시라. 그 중에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세간의 학문은 공부하면 할수록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방황하게 되어 있다.
진정코 바라건대, 무지하다고 부끄러워하지 마라. 궁극의 수치는 자신이 무지한 줄을 모르는 것이다. 지식의 총량은 지혜와 정비례하지 않지만, 무지의 총량은 지혜와 정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무궁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라.
지금은 가상세계가 현실세계로 탈바꿈하는 세상이고, 가상세계는 누구보다 먼저 내가 선점해야 하고,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선봉에 서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서있는 이 세계는 부사의하다. 나의 몸과 마음도 또한 부사의하다. 세간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말하고, 출세간은 부사의不思議하다고 한다. 이는 미지의 영역이고, 가상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세계성취품에 의하면 일체세계해一切世界海 등 끝없는 세계가 펼쳐져 있다. 8척이 못되는 이 몸 안에서도 일체 제불이 팔상으로 성도할 수 있다. 절에서 종무를 총괄하는 스님만 주지스님이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자기 몸을 관리하는 주지인住持人이며, 만일 자기 몸 안에서 제불이 출현하시는 줄을 안다면 또한 각인이 주지스님이다.
이 세계가 불국정토이고, 내 몸은 청정법신이다. 이를 현실화하는 최선봉에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가상인간이 있다. 인공지능의 역량은 알파고가 바둑판 위에서 이미 증명했다. 가상인간을 누가 다스릴 것인가? 초인이다.
만일 가상인간이 나의 마음인 줄만 안다면 당신이 바로 초인이다. 인간은 가상세계에 들어가야 비로소 시공을 초월할 수 있지만, 초인은 현실세계의 지금 바로 그 위치에서 곧바로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 초인은 이 현실세계가 바로 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가상인간의 출현은 초인 출현의 선봉장이다. 능력이 있는 이여, 가상인간에 배팅하라. 가상인간을 다스리는 이는 천하를 다스릴 것이다.
2022년 1월 25일 목욕재계하고 글을 써서 마치다. 길상묘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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