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씨의 시조 5
거제옥씨(巨濟玉氏) 거제옥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5가구 1,08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의령옥씨(宜寧玉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옥씨(玉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우리나라 옥씨(玉氏)의 연원(淵源)은 고구려(高句麗)의 요청에 의해 당(唐) 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 중의 한사람인 옥진서(玉眞瑞)가 신라(新羅)에서 국학 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고, 의춘(宜春 : 의령의 별칭)군(君)에 봉해져 의령(宜寧)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후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후손들이 고려(高麗) 때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옥 여(玉 汝)를 일세조로 하는 계통과 갈라져서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옥씨(玉氏)의 본관(本貫)은 17본으로 전하나 이는 세거지명(世居地名)을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며, 현재는 의령(宜寧) 단본(單本)으로 전한다.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규(珪)가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학문이 깊고 청렴결백했던 고(沽)는 조선(朝鮮) 정종(定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정언(正言)․교리(校理) 등을 역임했으며 청렴결백하여 사림(士林)에서 명망이 높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 옥씨(宜寧玉氏)는 남한(南韓)에 총 4,622가구, 18,9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구온씨(金溝溫氏) 금구온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45가구 2,14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봉성온씨(鳳城溫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온씨(溫氏)는 중국(中國)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아우로 당(唐)에 봉해진 숙우(叔虞)의 12세손 소후(昭候)가 그의 아우 사(師)를 온(溫)에 봉하고 평원(平原)에 도읍을 정하게 하니 온씨의 성(姓)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온씨(溫氏)의 본관(本貫)은 서원(西原)․온양(溫陽)․전주(全州)․이성(伊城)․나주(羅州)․평호(平호)․금구(金溝)․거야(巨野)․경주(慶州)․진주(晋州) 등 11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일혈족(同一血族)이므로 봉성(鳳城)으로 단일화(單一化)하고 있다. 봉성 온씨(鳳城溫氏)는 멀리 삼국시대(三國時代)에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구려(高句麗) 때 평강공주(平岡公主)와 혼인하여 평원왕(平原王)의 부마(駙馬)가 된 온 달(溫 達)로부터 온씨의 혈통(血統)이 시작되어,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온군해(溫君解),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회양 부사(淮陽府使)를 지낸 온 수(溫 粹)로 이어져 왔다. 수(粹)의 아들 형제 중 맏아들 선(善)은 예의판사(禮儀判事)를 지냈고, 둘째 신(信)은 우부시랑(右部侍郞)으로서 공민왕(恭愍王) 때 이존오(李存吾)․정 추(鄭 樞)와 함께 신 돈(辛 旽)의 전횡(專橫)을 탄핵하다가 왕(王)의 노여움을 사서 거야(巨野 : 금구의 옛 지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거(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신(信)을 일세조(一世祖)로 삼고, 관향(貫鄕)을 봉성(鳳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신(信)의 아들 임(琳)과 손자 윤(潤)이 좌랑(佐郞)을 지냈고, 윤의 아들 후(厚)는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훤(喧)․순흥(舜興), 공조 참의(工曹參議) 수점(壽點), 병조 참판(兵曹參判) 정화(鼎和) 등이 유명했고, 한말(韓末)에 와서는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주택(鑄澤)과, 숭조애족(崇祖愛族)의 정신이 투철하여 사현서원(四賢書院)을 창건하고 또한 금구 저수지를 설치한 사회사업가 성사(聖河)가 봉성 온씨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성 온씨(鳳城溫氏)는 남한(南韓)에 총 1,045가구, 4,3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릉왕씨(江陵王氏) 강릉왕씨 시조는 원보(元甫) 왕유(王裕)이다. 고려 태조의 아들로 강릉으로 분적하였다. 인물로 손자 왕총지(王寵之)는 시중이었으며 시호는 경숙공(敬肅公)으로 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왕예(王乂)는 시중(侍中)으로 한 파를 이룬다. 본래 김씨였는데 고려 태조가 왕씨를 사성(賜姓)하였다. 아버지는 대광(大匡) 김선희(金善希)이다. 현손(玄孫) 왕국모(王國髦)는 좌복사이었고 시호는 경(景)렬(烈)공(公)이고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왕예의 13세손 왕탄지는 벼슬이 군사로 비로서 김성으로 복성(復姓)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49가구 1,52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개성왕씨(開城王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누대(累代)에 걸쳐 송악(松嶽) 지방(地方)에 세거(世居)해 온 호족(豪族)의 집안으로서, 고려(高麗)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된 국조(國祖)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의 증손(曾孫)으로서 후삼국(後三國)을 평정하고, 500년 고려왕조(高麗王朝)의 문호(門戶)를 연 태조(太祖) 왕 건(王 建)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資質)이 비범하였다. 그는 스무살 때 태봉국왕(泰封國王)인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정벌(征伐)한 지방의 구휼(救恤)에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왕 건은 궁예(弓裔)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어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는데, 궁예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져 민심(民心)이 어지러워지자 918년(고려 태조 1) 신숭겸(申崇謙)․홍 유(洪 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 중신(重臣)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후 34대 왕조(王朝)에 걸쳐 4백 75년동안 왕씨(王氏)의 찬란한 문화는 꽃을 피웠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왕업(王業)이 무너지면서 잔인한 정치적인 보복에 멸족(滅族)의 참변을 당하여 전(全)․옥(玉)․금(琴)․전(田)씨 등으로 변성(變姓)하고 혈맥(血脈)을 유지하였으며, 조선 정조(正祖) 때 와서 왕씨(王氏)로 환성(還姓)하고 송악(松嶽)의 옛 지명인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이렇게 뼈져린 수난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왕씨(王氏)는 교서감(校書監)을 지낸 미(亹)를 시작으로 하여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흥(興)은 선비(善妃 : 우왕의 비)의 아버지로 우왕(禑王) 초에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이르렀다. 강원도 영월(江原道寧越)까지 호송하고 돌아왔으며, 인조(仁祖) 때 부제학(副提學)에 오른 희걸(希傑)은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의성(義成)은 선조(宣祖)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주(淸州)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그밖에 한말(韓末)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재일(在一)은 광주고보(光州高普)에 다니면서 비밀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남한(南韓)에 총 4,456가구, 18,7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천 용씨(洪川龍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홍천 용씨(洪川龍氏)의 시조(始祖) 용득의(龍得義)는 고려(高麗) 때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1241년(고종 28)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만드는 불사(佛事)를 총 지휘 하였으며, 강원도(江原道) 홍천군(洪川郡) 북방면(北方面)에 용수사(龍遂寺)를 창건하여 불전(佛典) 전수와 불교(佛敎) 전파에 여생을 바쳤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홍천(洪川)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홍천(洪川)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 나타난 용씨(龍氏)의 본관(本貫)은 홍천(洪川)․경주(慶州)․양근(楊根)․용인(龍仁) 등을 비롯하여 20여 본(本)이 있으나, 이는 모두가 홍천 용씨(洪川龍氏)의 분파세거지(分派世居地)에 불과한 것이며, 현재는 홍천(洪川) 단일본(單一本)으로 전한다. 용씨(龍氏)의 득성유래(得姓由來)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상고(上古)시대의 부족사회가 동물의 이름을 따서 부족의 명칭으로 불렀다고 전해 내려온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득의(得義)의 6세손 희수(希壽)가 이태조(李太祖) 잠저시(潛邸時)에 오랫동안 시종한 공으로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고 공조(工曹)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천기(天奇) 역시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정종(定宗)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판서(判書)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또한 진충호종공신(盡忠扈從功臣)으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서연(瑞衍)과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를 지낸 맹손(孟孫),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역전의 무공(武功)을 세운 협(協),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에 책록된 운(雲)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홍천 용씨(洪川龍氏)는 남한(南韓)에 총 2,748가구, 11,7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목천우씨(木川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목천(木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천원군(天原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우씨(于씨)는 중국(中國) 하남(河南)에서 계출된 성씨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 우(于) 땅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땅이름을 성(性)으로 삼았다가 후에 우(于)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 나라 우씨(于氏)는 목천(木川) 단본(單本)이며, 고려(高麗) 중엽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우방녕(于邦寧)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후 그의 아들 학유(學儒)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로부터 난을 일으키고 거사에 가담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무신(武臣)이 전권(全權)을 잡아 잘 된 일이 없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거절했다. 정중부가 집권한 후 그는 신상이 매우 위태로웠으나 집권층인 이의방(李義方)의 누이와 결혼한 연척 관계로 무사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술유(述儒)가 명종(明宗) 때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판형부사(判刑部事)를 거쳐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 한편 희종(熙宗)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던 승경(承慶)은 권신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다 되말려 유배당했으며, 필흥(必興)은 공민왕(恭愍王) 때「옥룡기(玉龍記)」의 도참설을 인용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의관과 여자들의 옷을 검은 색으로 입게 하고, 산에 나무를 심게 하여 풍토(風土)를 순응케 하라는 소(疏)를 올려 이를 시행케 하여 명망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천 우씨(木川于氏)는 남한(南韓)에 총 282가구, 1,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주(영천)우씨(剛州(永川)禹氏) 강주는 영천의 별칭이다. 강주(영천)우씨 시조는 예빈시 승(禮賓寺丞) 우윤성(禹允成)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21가구 2,24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경주우씨(慶州禹氏) 경주우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94가구 3,1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남양우씨(南陽禹氏) 남양우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24가구 1,60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단양우씨(丹陽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우씨(禹氏)는 중국(中國) 계통(系統)으로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후예(後裔)라 전한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우리 나라 우씨(禹氏)의 연원(淵原)은 우 현(禹 玄)이 고려(高麗) 초 중국(中國)에서 건너와 단양(丹陽)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현(玄)은 정조 호장(正朝戶長)을 지냈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그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현(玄)의 10세손 현보(玄寶)가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현(玄)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는 단양(丹陽) 외에도 예안(禮安)․영천(榮川)․강주(剛州) 등 4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세거지(世居地)에 불과하며 현재는 단양 우씨(丹陽禹氏) 단일본으로 전해진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현(玄)의 6세손인 중대(仲大)가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중대(仲大)의 맏아들 천규(天珪)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둘째 아들 천계(天啓)가 판서(判書), 셋째 천석(天錫)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는 등 모두 현달하여 가문을 빛냈다. 고려(高麗)말의 석학(碩學)이며 우리 나라 최초의 역학(易學)을 개척한 중대(仲大)의 손자 탁(倬)은 서릿발 같은 기개로 충선왕의 패륜(悖倫)을 극간하였던 당대의 명신이다. 그의 호(號) 역동(易東)은「동방에 역학을 처음 들여온 인물」이라는 뜻으로 세인(世人)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탁(倬)의 손자 현보(玄寶)는 1355년(공민왕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이 되었으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단양 우씨(丹陽禹氏)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병조 판서(兵曹判書) 등을 지내고 명종(明宗) 때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오른 맹선(孟善)과 선조(宣祖) 때 남인(南人)의 거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전공을 세워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어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성전(性傳),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창적(昌積) 등이 유명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관서(關西) 지방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한 의병장 동선(東鮮), 안중근(安重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던 덕순(德淳),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만주(滿洲)에 군사학교(軍事學校)를 설립하여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재룡(在龍) 그리고 세계적인 육종학자(育種學者)로 이름을 날인 장 춘(長 春)은 단양 우씨(丹陽禹氏)를 빛낸 인물들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남한(南韓)에 총 36,704가구, 152,2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달성우씨(達城禹氏) 달성은 대구의 별칭이다. 달성우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9가구 1,03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안동우씨(安東禹氏) 안동우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85가구 1,27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강원원씨(江原元氏) 강원원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77가구 2,68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경주원씨(慶州元氏) 경주원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08가구 2,25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원주 원씨(原州元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원씨(元氏)는 중국(中國) 하남(河南)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양왕(襄王:제18대 왕, 재위기간 : 기원전651~619)때 위대부(衛大夫)에 봉해진 원훤(元咺)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 나라 원씨(元氏)의 시조(始祖)는 643년(고구려 보장왕 2) 당(唐)나라 태종(太宗 : 제2대 왕, 재위기간 : 627~649)이 고구려(高句麗)에 문화사절로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사람인 원 경(元 鏡)이다. 원주(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는 원씨(元氏)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운곡공계(耘谷公系 : 원경을 시조로 함)․원성백계(原成伯系 : 원성백 원극유를 시조로 함)․시중공계(侍中公系 : 시중 원익겸을 시조로 함) 등 크게 세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繼代)하고 있으며,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원충갑(原沖甲)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계(忠肅公系)가 있었으나 최근에 그가 원성백계(原城伯系) 극유(克猷)의 11세손임이 밝혀져 합보(合譜)가 되었다. 각 계통별(系統別)로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운곡공계(耘谷公系)에서는 호장(戶長) 극부(克富)의 7세손 천석(天錫)이 유명했다. 그는 고려(高麗) 말에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득세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고향인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이름을 감추고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했다.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이 당세에 유명하여 방원(芳遠 :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신조(新朝)에 불사(不仕)하고 절의(節義)를 지켰던 고려의 충신이었다. 「여사제강(麗史提綱)」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여러번 요직에 등용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태종이 그를 만나러 치악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치악산 계곡으로 피신하여 끝내 태종을 만나지 않았다. 태종이 계곡의 석대(石臺)에 내려와서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下賜)하고 돌아와서 천식의 아들 형(泂)을 풍기 감무(豊基監務)로 삼았으며, 태종이 앉았던 바위는 <태종대(太宗臺)>로 불렀다고 한다. 운곡(耘谷) 천석은 치악산에 묻혀 살며 망국(亡國) 고려(高麗)를 회고하는 야사(野史) 6권과 시사(詩史) 2권을 저술하여 운명할 때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가묘(家廟)에다 감추어 놓고 조심조심 지켜라, 그리고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면 열어 보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증손 때에 이르러 불에 태웠다고 한다. 운곡(耘谷)의 증손 보륜(甫崙)은 세종(世宗) 때 지평(持平)과 교리(校理)를 역임했고, 6세손 황(鎤)은 선조(宣祖) 때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진해(振海)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에 뛰어나 필명(筆名)을 떨쳤다. 고려 개국공신(考慮開國功臣)으로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던 극유(克猷)의 후손에서는 좌복야(左僕射) 진(瑨 : 극유의 9세손)의 아들 부(傅)가 고려 원종(元宗)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長事)를 지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는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고금록(古今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다. 한편 첨의평리(沾衣評理) 선지(善之 : 부의 손자)의 아들 송수(松壽)는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왕(王)을 호종하여 피난한 공(功)으로 일등공신에 올랐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신 돈(辛 旽)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그 울분으로 병사했다. 특히 시문(詩文)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송수의 아들 상(庠)은 고려말에 김 저(金 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 색(李 穡)과 함께 혹형을 당한 끝에 정몽주(鄭夢周)의 구제소(救濟疏)로 광주(光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장단(長湍)의 대덕산(大德山)에 은거(隱居)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소문났었던 창명(昌命 : 상의 아들)은 세종(世宗) 때 조견례(朝견見禮)르 올리려 궁전에 들었을 때 난간에 중(憎) 옷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임금에게 배알하여 “상감께서는 신 돈(辛 旽)이 나라 망친 일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 금중(禁中)에 승니(僧尼)의 자취가 있으니 전철을 밟을까 저어합니다”라고 말하여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시중공계(侍中公系)의 인맥(人脈)으로는 별장(別將) 헌(憲)의 아들 호(昊)가 유명했다. 1423년(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王位) 찬탈 음모가 무르익어 가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있다가 병을 핑계하고 벼슬을 버린 후 원주(原州) 남송촌(南松村)에 은거(隱居)하였다.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내쫓기자 호(昊)는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조석(朝夕)으로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예(禮)를 다했으며, 단종이 사사(賜死)당하자 3년 상을 치르고 원주 옛 집으로 돌아와 이웃 사람들이 수년이 지나도록 얼굴 한번 볼 수 없었을 만큼 폐문 불출하였다. 세조(世祖)의 좌익 공신인 조카 효연(孝然 : 원산군 황의 아들)이 하인을 거느리지 않고 찾아와 문 앞에서 뵙자고 간청했으나 그는 방 안에서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으며, 세조가 호조 참의(戶曹參議)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내가 죽거든, 업어다 앉히라”고 과격하게 불응했다. 어느날 강원도 관찰사가 도사처럼 평복차림으로 호를 찾아 갔을 때 야인 인줄로만 알고 나가 맞았다가 보니 관찰사라 손을 내두르며 도망쳐 방안에 들어가서 고리를 잠그고 자기 마음에 때가 묻었다고 통곡해 울었다고 하며, 앉은나 누우나 반드시 장릉(莊陵 : 단종 묘)이 있는 동(東)쪽으로 머리를 향했고, 그가 사는 남송촌도 관부(官府)에 가까워 그 오예(汚穢)의 기운이 젖어 든다는 이유로 보다 골짜기가 진 주천현(酒泉縣) 산골로 들어가 평생을 마치었다. 임진왜란 때 아들 유남(裕男)과 함께 무명(武名)을 떨쳤던 호(豪)는 김덕수(金德壽)의 문인(門人)으로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1567년(명종 22) 무과(武科)로 진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미포(龜尾浦)․마탄(馬灘)․운무(雲霧) 등지의 작전에서 전공을 올려 적진(敵陣)을 여주에서 완전히 봉쇄했던 지장(知將)이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겸 경기․강원도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북로(北路)의 왜군 토벌 임무를 맡고 김화(金化)로 진군 도중 적의 복병을 만나 포위되어 깊은 산 낭떠러지 끝으로 몰리게 되자 투신하여 살신(殺身)하였다. 적군은 호(豪)의 머리를 잘라 김화(金化) 고을 성문(城門)에 매어 달고 <조선 군사와 백성이 모두 귀순했는데 원 호만이 우리에게 항거하였기로 이같이 벌을 준다>라는 글귀를 써붙여 놓았다. 특히 호는 청백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은(銀)의 고장인 단천(端川)의 군수(郡守)로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은반지 하나를 사 낀 일이 있었다. 이를 본 호는 <은고지(銀庫地) 원으로서 은물건을 우리집에 두다니……>하며 아내와 물건을 사온 종을 매질하고는 은가락지를 빼앗아 버렸다. 호의 아들 유남(裕男)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용력(勇力)으로 이름을 떨쳤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 3등공신(政社三等功臣)으로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아버지 유남과 함께 인조반정에 유공하여 정사 2등공신으로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던 두표(斗杓)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어영부사(御營副使)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비했고, 효종(孝宗) 때 좌찬성(左讚成)․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그밖의 인물로는 목사(牧使) 명귀(命龜)의 아들 경하(景夏)가 영조(英祖) 때 이조 및 병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副事)로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문장(文章)과 검소한 생활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인손(仁孫)은 우의정을 역임하였고, 계손(繼孫)은 시(詩)․서(書)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져 학문(學問)과 충절(忠節)을 지켜 온 원주 원씨의 전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남한(南韓)에 총 24,538가구, 102,7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원씨(全州元氏) 전주원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9가구 1,08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고흥위씨(高興魏氏) 고흥위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4가구 1.1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이다.
長興魏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위씨(魏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주(周)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晋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당(唐)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인 위경(魏鏡)이 신라(新羅) 태종(太宗)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경(鏡)의 동래설(東來設)은 또 다른 설(設)이 있는데, 신라(新羅) 왕(王)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請)했을 때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고도 한다. 경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候)․아찬(阿湌)․상서시중(尙書侍中)을 역임하고 회주(懷州 : 장흥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장흥위씨(長興魏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위씨(魏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주(周)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晋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당(唐)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인 위경(魏鏡)이 신라(新羅) 태종(太宗)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경(鏡)의 동래설(東來設)은 또 다른 설(設)이 있는데, 신라(新羅) 왕(王)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請)했을 때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고도 한다. 경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候)․아찬(阿湌)․상서시중(尙書侍中)을 역임하고 회주(懷州 : 장흥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장흥(長興)은 전라남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는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인데 신라 때 오아(烏兒)로 개칭되어 보성군에 속해 있다가 고려 때 영암(靈岩)에 소속되고, 인종(仁宗)때 장흥부(長興府)로 승격되었다.1265년(인종 6)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장흥부가 되었다. 그 이후 많은 변천을 거쳐 1895년에 장흥군이 되었다. 1914년 부․군․면 폐합에 따라 웅치(熊峙)․회천(會泉) 2개면이 보성군에 이관되었으며, 1936년 부동면(府東面)을 장흥면으로 개칭하고, 남상(南上)․남하(南下) 양면을 용산면(容山面)으로, 고읍면(古邑面)을 관산면(冠山面)으로 개칭하였다. 1942년 장흥면이 장흥읍으로 승격하고, 1980년 관산면이 관산읍으로, 대덕면이 대덕읍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신라말(新羅末)에 대각관 시중(大覺官侍中)을 역임한 위창주(魏菖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위씨(魏氏)의 본관(本貫)은 13본이 전하나, 이는 모두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현재는 장흥(長興) 단본으로 전한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창주(菖珠)의 5세손 계정(繼廷)이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원개(元凱)가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10세손 온(溫)이 문하시중과 평장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에 와서도 위씨(魏氏)의 가문은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는데, 덕의(德義)는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가 의 주(義州)로 몽진(蒙塵 :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겨감)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석 달을 걸어 의주(義州)까지 찾아가 왕(王)을 모시는 충성을 보여, 명(明)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鍾)으로부터 “동국(東國)의 산은 오직 천관(天冠 : 장흥에 있는 산)이요, 사람은 덕의(德義)가 있을 뿐이다.”는 극찬을 받았다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전공을 세우고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된 대용(大用)과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조전장(助戰將)으로 율포(栗浦)․목포(木浦)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이른 대기(大器), 그리고 영조(英祖) 때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한 창조(昌祖) 등이 있다. 이외에도 호남(湖南) 실학(實學)의 거목 백규(佰圭)는 시(詩)․서(書) ․화(畫)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불린 조부(祖父) 세보(世寶)로부터 글을 배워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물론 천문(天文)․역학(易學)․지리(地理) 등을 모두 섭렵하여 당대의 석학(碩學)으로 이름났다.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경세철학(經世哲學)을 체계화했으며 90여권의 책을 저술하여 백과전서격 학문을 집대성하고,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보다 91년이나 앞서 조선전도(朝鮮全圖)를 그려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흥 위씨(長興魏氏)는 남한(南韓)에 총 5,420가구, 22,7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산위씨 관산위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32가구 1.53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강화위씨(江華韋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위씨(韋氏)는 중국(中國) 경조(京兆)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팽조(烹調)의 손자(孫子)가 위(韋)땅에 봉해졌음로 후손들이 고을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우리 나라 위씨(韋氏)는 중원(中原) 출신인 위수여(韋壽餘)가 960년(고려 광종 11) 동래(東來)하여 사선관(司膳官)을 거쳐 목종(穆宗)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현종(顯宗) 초에 치사(致仕)를 상소했으나 허락(許諾)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 받은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으로 강화백(江華伯)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은 강화(江華)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시조의 후손 근영(瑾英)이 고려 인종(仁宗)때 소감(少監)을 역임했으며, 원(元)은 몽고(蒙古)의 내침으로 강화(江華)에 천도하는 왕(王)을 호종하여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의령 현감(宜寧縣監)과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事)를 역임한 조(組)가 간신(奸臣)들의 모략으로 평안도 영유(平安道永柔)에 유배(流配) 되었다가 그 곳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자 그를 낙향시조(落鄕始祖)로 삼고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세조 조(組)의 9세손 관(觀)이 1689년(숙종 1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찰방(察訪)과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낸 후 홍성군수(洪城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상소문(辭退上疏文)을 올리자 왕명(王命)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이건창(李建昌)과 함께 고군도(古郡島)에 유배되었다. 그후 풀려 나와 영유(永柔)에서 일생을 마치자 후손들은 위촌(韋村) 뒷산 주마현(走馬峴)에 솟대를 세우고 그의 영광(榮光)된 유업(遺業)을 영원히 기렸다. 그외 인물로는 효행(孝行)이 뛰어난 정려(旌閭)가 내려졌던 응표(應豹)와「백석창화집(白石唱和集)」을 남겨 문명(文名)을 떨쳤던 관식(觀植)이 유명했으며, 병식(秉植)과 달식(達植)은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신명(身命)을 바쳐 강화 위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화 위씨(江華韋氏)는 남한(南韓)에 총 351가구, 1,4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원유씨(江原兪氏) 강원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501가구 4,8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康津兪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강진 유씨(康津兪氏)의 시조(始祖) 유 적(兪 迪)은 강진(康津)에 토착(土着)한 사족(士族)으로 고려(高麗)말에 감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조상의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인 강진(康津)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적(迪)의 아들 신(信)은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지냈고, 증손(曾孫) 의정(義貞)이 찰방(察訪)을, 7세손 성망(聖望)이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진 유씨(康津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3,540가구, 15,8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화유씨(江華兪氏) 강화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2가구 1,17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경주유씨(慶州兪氏) 경주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905가구 9,50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고흥유씨(高興兪氏) 고흥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836가구 9,13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기계유씨(杞溪兪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신라(新羅) 때 아찬(阿凔)을 역임한 유삼재(兪三宰)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의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가 망하자 고려조(高麗朝)에 불복하므로 태조(太祖)가 기계 호장(杞溪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기계(杞溪)를 본관(本貫)으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후 기계 유시는 의신(義臣)의 종파인 동정공파(同正公派)를 비롯하여 월성군(月城君) 승추(承樞)의 계통인 월성군파(月城君派)와 동정(同正) 진적(晋迪)의 계통인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등 크게 열 다섯 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체로 조선 초기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기계 유씨는,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 여해(汝諧)의 후손인 전서(典書) 현(顯)의 아들 효통(孝通)이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대사성(大司成)과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에 능하고 의약에 정통하여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盧重禮)와 함께 약용식물(藥用植物)을 정리한「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과 의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 문명(文名)을 떨쳤다. 한편,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의 유명한 응부(應孚)는 기계 유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특히 키가 남보다 크며 용모가 엄장(嚴壯)하고, 활쏘기를 잘하여 아우 응신(應信)과 함께 무명(武名)을 떨쳤던 응부(應孚)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평안도 병마절제사(平安道兵馬節制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으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禍)를 입었다. 친국(親鞠)을 받을 때 세조(世祖)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려 하였느냐”하니 응부가 말하기를 “잔치 날을 당하여 한 칼로 족하(足下)를 폐하고 본 임금을 복위하려 하였더니, 불행히도 간인의 고발한 바 되었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족하는 빨리 나를 죽이라”하였다. 세조가 더욱 노하여 쇠를 달구어 배 아래 두 다리 사이에 넣으니, 지글지글 끓으며 가죽과 살이 다 익었다. 응부는 얼굴빛이 변치 않고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땅에 던지며 “다시 달구어 오라”하며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는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렸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 때로는 양식이 떨어졌다. 그의 죽음을 듣고 아내가 원통해 한 것은 그의 원통한 죽음이 아니라 살았을 때 한번 잘 먹고 잘 자보지 못했던 가난을 가엾이 여겨 울었다고 하며, 관에서 역적이라 하여 가산을 몰수하는데 갖고 나간 것이 짚자리 한 장 뿐이었다고「동각잡기(東閣雜記)」와 「추강집(秋江集)」에 적고 있다. 사재감 주부 여해(汝諧)의 7세 손 참판(參判) 해(解)의 아들인 기창(起昌)은 연산군 때 만포진 첨제절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직간(直諫)을 하다가 다른 동료 세 사람과 함께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 이들은 날마다 산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죽음의 사자(使者)가 바다를 건너오는가를 기다리고 살았다. 어느 날 기창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확인하고 집안 사람과 영결(永訣)한 후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그 도사가 가져온 전갈은 교사령(絞死令)이 아니라 중종반정의 소식과 그를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그의 아들 여림(汝霖)은 한림(翰林)으로 기용한다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전갈을 보고 집안 사람에게 “나는 마땅히 예전 임금을 위하여 울어야겠다.”하며 자리를 깔고 북쪽을 향하여 큰 소리로 통곡하고는 한양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라고 하고, 자신은 고향인 비인(庇仁)으로 돌아가서 한평생을 마칠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으며 죽을 때 신주(神主)에 옛 벼슬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만 쓰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연산군 때 그 많은 국신(國臣) 가운데 연산군에게 학대받고 연산군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사람은 홍언충(洪彦忠)과 유기창(兪起昌) 두 사람 뿐이었다. 기창의 아들 여림(汝霖)과 여주(汝舟)는 신진 사류인 조광조(趙光祖)의 기묘현량(己卯賢良)으로, 형인 여림은 예조 판서를 지냈으나 아우 여주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한산(韓山)에 임벽당(林碧堂)을 짓고 독서와 서예(書藝)로 일생을 마쳤으며 글씨에 뛰어나 명필(名筆)로 일컬어졌다. 여림의 아들 강(絳)은 중종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 등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淸)나라를 다녀왔으며, 병조 참판과 한성부 판윤, 공조․호조 판서를 지냈다. 특히 그는 지방관으로 있을 때 인재를 모아 글을 가르쳐서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관서의 유생(儒生)들이 중앙에 진출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문하(門下)에서 훌륭한 제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謀叛事件)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삼등공신(平難三等功臣)으로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던 홍(泓)은, 여림의 손자이며 생원(生員) 관(綰)의 아들로 종계변무(宗系辨誣)에도 공을 세워 광국일등공신(光國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석학(碩學) 조 식(曺 植)에게 극찬을 받았다. 대수(大修 : 진사 함의 아들)는 선조 때 주서(注書)와 전적(典籍)을 거쳐 형․호․예조의 좌랑(佐郞)을 지내고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등 10년 간 외직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대칭(大稱 : 강의 손자)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대일(大逸)의 아들 백증(伯曾)은 성품이 강직하여 권신에 아부하지 않기로 유명하여 말직에만 머물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때 공을 세워 정사삼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고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탄핵하여 <충박신(忠朴臣)> 또는 <유충박(兪忠朴)>으로 불리웠다. 그가 경상감사로 나가 윤선도(尹善道)의 실정(失政)을 녹박했고, 대사간으로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를 물러나게 했으며, 이조 참판으로서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묵상(墨相)>이라 혹평하고 하옥(下獄)을 청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부총관(副摠管)으로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하여 화의(和議)를 주장한 윤 방(尹 昉)과 김 유(金 瑬) 등의 처형을 상소하여 파직되는 등 강직한 척화파(斥和派)로서 누차 직언(直言)을 하다가 화를 당했으나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탑(御榻)을 붙들고 떼를 쓰며 늘어지므로 인조도 백증(伯曾)의 고집 때문에 무척 골치를 앓았다고 하며 <유고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한다. 효종조의 명신이며 학자로 유명한 계(棨 : 참봉 양증의 아들)는 윤리(倫理)와 예법(禮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항거했던 인물로, 사학(史學)에 밝았으며 숙종(肅宗) 때 간행된 그의 저서(著書)인「가례원류(家禮源流)」를 중심으로 노소론(老少論)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 그외 숙종 때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글씨에 능했던 하익(夏益 : 수증의 손자)과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내고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서인(西人)의 가장 과격한 문신(文臣)으로 남인 타도에 앞장섰던 명일(命一 : 선공감역 비의 아들), 형방승지(刑房承旨)로서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사사(賜死)를 반대한 소론 일당을 숙청했던 명웅(命雄), 영조 때 예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던 명홍(命弘) 등이 뛰어났으며, 목사(牧使) 명건(命健)의 아들 최기(最基)는 병조 참의를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시문(詩文)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언술(彦述)과 더불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밖의 인물로는 1787년(정조 11)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던 언호(彦鎬 : 우윤직기의 아들)가 좌의정을 거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렸고, 한전은 순조 때 백년(百年)이래의 대 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아 서예(書藝)에 능했던 한지(漢芝),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신환(莘煥),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판서에 오른 치선(致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한말(韓末)에 한성부민회장(漢城府民會長)을 지낸 길준(吉濬)은 새 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을 기초한 진오(鎭午)와 더불어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기계 유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23,437가구, 97,3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안유씨(務安兪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무안 유씨(務安兪氏)의 시조(始祖) 유순직(兪舜稷)은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역임하고 공을 세워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장사(長沙)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그후 증손(曾孫) 천우(千遇)가 고종(高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원종조(元宗朝)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지낼 때 김인준(金仁俊) 등과 함께 최 의(崔 誼)를 주살(誅殺)하는데 공을 세웠다. 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오르고 충렬왕(忠烈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사후(死後)에 무안부원군(務安府院君)에 추봉(追封)됨으로서 후손들이 이적(移籍)하여 본관(本貫)을 무안(務安)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천우(千遇)의 아들 영원(永元)은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올라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좌복야(左僕射)․전공시랑(典工侍郞)등을 지냈으며, 손자 윤수(允粹)도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서는 천의 증손(曾孫)인 희익(希益)이 역학(易學)․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으며, 희익의 증손 세호(世豪)는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안 유씨(務安兪氏)는 남한(南韓)에 총2,879가구, 12,6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동유씨(仁同兪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인동 유씨(仁同兪氏)의 시조(始祖) 유승단(兪升旦)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사부(師傅)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고 최우(崔瑀)와 함께 강화(江華)에서 송도(松都)로 환도(還都)하는데 공이 있어 인동백(仁同伯)에 봉해졌다.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고려(高麗)에서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역임한 유승석(兪承碩)을 중조(中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인동(仁同)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인동(忍冬)은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신라 초에는 사동화현(斯同火縣)․수동현(壽同縣)이라 하다가 삼국통일 후에 인동현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경산부(京山府)․약목현(若木縣) 등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선조 때 인동부(仁同府)로 승격되고 1895년 인동군이 되었으며, 1914년 군이 폐지되고 그 일부 지역은 인동면이 되었다. 승석(承碩)의 아들 수기(守基)가 별장(別將)을 지냈고, 손자 서(瑞)가 승봉랑(承奉郞)과 중문지후(中門祗侯)를, 증손 요(堯)가 봉선대부(奉善大夫)로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을 역임했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요(堯)의 아들 사철(師哲)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했고, 손자 헌(獻)이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그리고 헌(獻)의 4세손 진(鎭)이 세조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兵曹正郞)ㆍ직제학(直提學)을 지냈고,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과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을 거쳐 춘추관 수찬관(春秋官修撰官)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동 유씨(仁同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995가구, 4,02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유씨(晉州兪氏) 진주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477가구 7,78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창원유씨(昌原兪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창원 유씨(昌原兪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한 유 섭(兪 涉)으로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상고할 수 없다. 그후 후손들은 창원(昌原)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창원(昌原)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섭(涉)의 아들 경(冏)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증손 귀생(貴生)이 조선 초(朝鮮初)에 공부 전서(工部典書)를, 현손(玄孫) 상지(尙智)가 직제학(直提學)을, 그리고 상지의 아들 조(造)는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역임하여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명종(明宗) 때 효자(孝子)로 명성을 떨쳤던 언겸(彦謙)은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호조참판(戶曹參判)과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창(瑒)과 그의 아들 득일(得一)은 대사헌(大司憲)․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며, 경종(景宗) 때, 형․공조판서(形․工曹判書)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집일(集一)등이 당대에 뛰어났다. 이외에도 장령(掌令)을 거쳐 필선(弼善)을 지낸 신일(信一)과 영조(英祖) 때 사마양시(司馬兩詩)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오른 숭(崇)이 창원 유씨(昌原兪氏)의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원 유씨(昌原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2,361 가구, 9,971명이 살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평유씨(坡平兪氏)
파평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38가구 1,50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동향의 파주유씨(坡州兪氏)와의 관계도 미상이다.
풍산유씨(豊山兪氏) 풍산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37가구 2,29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하회유씨(河回兪氏)
하회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07가구 1.12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무송유씨(茂松庾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유씨(庾氏)는 본래 중국(中國)계통으로 한(漢)나라 말기와 진(晋)나라 초기에 유순유(庾筍悠)가 우리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건너와 정착하여 살면서부터 유씨(庾氏)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후 후손(後孫) 유금필(庾黔弼)이 정서 대장군(征西大將軍)․도통 대장군(都統大將軍)을 역임하면서 고려 개국(高麗開國)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 통합삼한익찬공신(三重大匡統合三韓翊贊公臣)으로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조상의 세거지(世居地)인 평산(平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금필(黔弼)의 5세손 녹숭(祿崇)이 고려 숙종(肅宗) 때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 빈객(太子賓客)․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무송(茂松)에 세거(世居)하게 되자 무송(茂松)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무송 유씨(茂松庾氏)의 대표적 인물(人物)로는 금필(黔弼)의 손자 방(方)이 고려 성종(成宗) 때 거란군(契丹軍)의 침입을 격퇴하여 전공을 세우고 현종(顯宗) 때 병부 상서(兵府尙書)겸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또한 예종(睿宗)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른 녹숭(祿崇)의 아들 필(弼)이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고 손자 응규(應奎)가 군기감(軍器監)을 거쳐 공부 낭중(工部郎中)에 올랐으며 청렴하기로 이름 높아 「여옥군자(如玉君子)」라 불렀다. 응규의 아들 자량(資諒)은 고종(高宗) 때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여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지낸 석(碩), 우승선(右承宣) 경현(敬玄) 등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서는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을 지낸 귀산(龜山)과 태종(太宗)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오산(鰲山),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득시(得時), 그리고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한 순도(順道) 등이 유명하였 다. 이외에도 시인(詩人)이자 바둑 국수(國手)였던 찬홍(纘洪)과 독립운동가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여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도모한 광복투사 장순(昌淳)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송 유씨(茂松庾氏)는 남한(南韓)에 총 2,222가구, 9,4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산유씨(平山庾氏) 평산유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411가구 4,24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의 조선조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강남유씨(江南劉氏) 강남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709가구 5,4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강릉 유씨(江陵劉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강릉 유씨(江陵劉氏)는 거창 유씨(居昌劉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도시조(都始組) 유 전(劉 荃)의 9세 손 유승비(劉承備)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그는 벼슬이 누진하여 좌복야(左僕射)로 치사했고, 그의 증손(增損) 창(敞)이 조선 개국 2등공신(朝鮮開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 말에 둔촌(遁村) 이 집(李 集 : 학자)이 목은(牧隱) 이 색(李 穡)에게 좋은 사위감을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목은은 자기 문하(門下)에 재주꾼이 많지만 권 근(權 近)과 유 창(劉 敞)을 당해 낼 재주는 없다 하자 이 집(李 集)은 유 창을 사위로 맞이했다고 한다. 특히, 창은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승녕부윤(承寧府尹)이 되어 소요산(逍遙散)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했으며, 대제학(大提學)․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역임한 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이르러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창의 증손 한량(漢良 : 이조 좌랑 계주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 무장 현감(茂長縣監)으로 창의(倡義)하여 진주성(晉州城) 방어에 참전, 왜적과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 자 죽창(竹槍)으로 대전했으나 성(城)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했으며, 창의 현손(玄孫) 세분(世玢)은 진원 현령(珍原縣令)으로 나가 청백(淸白)한 정사(政事)로 소문났었다. 참판(參判) 선보(善寶)의 아들 호인(好仁)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고 문장(文章)에 뛰어났으며, 학문(學文)에 열중하여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1574년(선조 7) 여름,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제단(祭壇)을 쌓고 살신기우(殺身祈雨) 할 결심으로 높이 쌓아 올린 장작더미 위에 정좌(正坐)하고 기원하면서 나무에 불을 지르니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 왕(王)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천방(天放)이라는 호(號)를 하사했다. 특히 호인(好仁)은 일생을 낙천적으로 살았는데, 자기가 사는 동명(洞名)을 자하동(紫霞洞), 자기 거처를 정정당(定靜堂), 바깥 사랑채를 불우당(不憂堂), 집앞에 있는 못을 완료호학지심지(琓妙好學之心池)라 이름하고 풍류와 환락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밖에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나갔던 덕문(德文)과 전주(全州)에서 <유효자(劉孝子)>로 유명했던 경달(景達)이 뛰어났으며, 그의 아들 기원(基源)은 가뭄 때 기민(飢民) 구휼에 훌륭한 업적을 남겨, 효(孝)와 충(忠)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동원(凍原 : 경달의 아들), <효도삼대(孝道三代)>의 정맥(旌脈)을 이은 병관(秉瓘 : 동원의 아들)과 함께 강릉 유씨의 전통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릉 유씨(江陵劉氏)는 남한(南韓)에 총 38,844가구, 161,6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원유씨(江原劉氏) 강원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7가구 1,27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강화유씨(江華劉氏) 강화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28가구 1,32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개성유씨(開城劉氏) 개성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24가구 1,0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거창유씨(居昌劉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유씨(劉氏)는 중국에서 계출 된 성씨로 우리 나라 유씨(劉氏)의 연원(淵源)은 유 방(劉 邦)의 41세손으로 송나라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유 전(劉 筌)이 8학사(八學士)의 일원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경북 영일군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후 전(筌)의 맏아들인 유견규(劉堅規)가 거타(居陀 : 거창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거창(居昌)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견규의 동생 견구(堅矩)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견구(堅矩)의 아들 웅열(雄悅)이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아림군(娥林君)에 봉해졌고, 견규(堅規)의 손자 성(成)이 추밀원 부사(樞密員副使)와 대장군(大將軍)을, 증손 찬(贊)이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검교 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한작(漢灼)과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역임한 해(海), 그리고 어모장군(御侮將軍)에 이른 귀손(貴孫)이 유명하였으며, 특히 한우(旱雨)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낼 때 중국(中國) 황제(皇帝)의 부름에 따라 기우제관(祈雨祭官)으로 판견되어 3일간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니 한재(旱災)가 계속된 중국 대륙(中國大陸)에 비가 내렸다 한다. 이에 황제(皇帝)가 크게 기뻐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제수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거창 유씨(居昌劉氏)는 남한(南韓)에 총 7,667가구, 32,7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주유씨(公州劉氏) 공주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05가구 1,33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광주유씨 광주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9가구 1,21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배천유씨(白川劉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배천 유씨(白川劉氏)의 시조(始祖) 유국추(劉國樞)는 도시조(都始祖) 유 전(劉 筌)의 8세손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되고 배천군(白川君)에 추봉(追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국추(國樞)를 시조로 받들고 거창 유씨(居昌劉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배천(白川)으로 하게 되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국추의 아들 승(升)이 고려 명종(明宗 : 제19대 왕, 재위 기간 : 1170~1197) 때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한 후 은천군(銀川君)에 봉해졌으며, 손자(孫子) 현(賢)은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하여 명망을 떨쳤다. 한편 대제학 현(賢)의 맏아들 시준(時俊)은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한 후 부흥군(復興君)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보국(補國 : 통정대부)과 서(瑞 : 장군)의 형제가 뛰어났으며, 현(賢)의 막내아들로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던 여준(汝俊)과 임진왜란 때 무명(武名)을 떨쳤던 후손 극량(克良)이 유명했다. 선조(宣祖) 초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극량(克良)은 위장(衛將) 전라도 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를 거쳐 13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죽령(竹嶺)을 수비했으나 패전하고 수어사(守禦使) 신 할(申 硈)의 참모가 되어 임진강(臨津江) 방어 작전을 수행했다. 적의 파죽지세로 한강(漢江) 수비에 패하고 한양(漢陽)마저 적의 수중에 들어가 선조(宣祖)가 북으로 피난 가는 와중에 임진강에서 적과 8, 9일간 대치하는데 무슨 수작인지 적은 그들의 병막(兵幕)을 모두 태우고 후퇴하였다. 이에 수어사 신 할(申 硈)이 적이 쾌퇴한다 하여 진격을 하명하자 극량은 “적이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니 경솔하게 진격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대장의 명령에 항명한다고 하여 참형(斬刑)하려 했으나 좌우가 말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우군을 거느리고 임진강을 도강하여 진격하다가 적의 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신 할(申 硈)도 죽고 극량도 군사들을 지휘하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그후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고 개성(開城)의 숭절사(崇節詞)에 배향되어 배천 유씨의 의맥(義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이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배천 유씨(白川劉氏)는 남한(南韓)에 총 2,123가구, 8,9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동유씨(安東劉氏) 안동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7가구 1,00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진주유씨(晉州劉氏) 진주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937가구 9,44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충주유씨(忠州劉氏) 충주유씨 시조는 호장 유공저(劉公著)이다. 인물로 유긍달(劉兢達)이 태사(太師)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는데 고려 태조비 순성왕후(順成王后) 아버지로 한 파를 이룬다. 유총거(劉寵居)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 한 파를 이룬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97가구 1,5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파평유씨(坡平劉氏) 파평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48가구 2,83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풍산유씨(豊山劉氏) 풍산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45가구 2,40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관성육씨(觀城陸氏) 관성육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04가구 1,32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출처] 각성씨의 시조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