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효자비를 찾아
석야 신웅순
사람들은 고불 맹사성이 아산 신창 사람으로만 알고 있다. 서천군 한산 축동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예로부터 축동리를 맹동마을이라 불렀다.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서이다. 조부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순절했고 아버지 맹희도는 출사없이 고향인 한산으로 내려와 절의를 지켰다.
선생의 나이 10살 때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간 시묘살이를 했다. 부친 또한 효성이 지극해 한산 군수와 호장이 이 마을을 효자리라 칭하고 1392에 부친 맹희도와 1399년에는 맹사성의 효자비를 세웠다.
효자비 주변에는 선대의 맹리, 맹의, 맹유의 3단이 설치되어 있어 이곳이 맹사성 선대의 고향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지금은 신창의 맹씨행단으로 단을 옮겼다고 한다.
나는 고향이 서천이다. 시간을 내 향토 사학자 박수환 선생의 안내로 서천문화예술과 김향숙 박사와 함께 효자비를 찾았다. 신창의 맹씨 행단은 갔었어도 고향에 있는 맹동은 가보지 못해 늘 마음에 빚을 지고 있었다. 오래 전의 짐을 이제야 덜었다.
조선조 500년사의 명재상으로 황희ㆍ이원익 등과 함께 청백리에 오른 인물이 맹사성이다. 어린 시절 한산의 맹동에서 자랐고 선대의 고향이었으니 맹사성은 아산 신창 사람이기보다는 충남 서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우리들에겐 더 정겹고 친근하다.
맹사성은 겸양지덕의 대명사이다. 청렴결백에 효자였으며 충효 사상의 철저한 실천가이기도 했다. 선생의 효행은 아버지와 함께『삼강행실도』에도 소개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진정한 세심정혼의 재상다운 재상이다.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에 금린어가 안주이로다
이 몸이 한가해옴도 역군은 이시도다
- 「강호사시가」 첫수
신창의 맹씨 행단 앞을 흐르는 금곡천을 배경으로 해서 지은 시조이다. 탁료는 막걸리요 계변은 시냇가이다. 금린어는 쏘가리이다.
자연에 몸을 맡기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선생의 모습이 아름답고 경건하다. 충과 효, 청렴과 겸손으로 평생 살아온 선생이다. 당장 이 시대 우리의 스승으로 삼자. 아니 스승으로 삼아야한다. 이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하늘엔 흰구름이요, 땅에는 풀벌레 소리, 물소리이다. 수양과 성찰의 계절이다. 이 가을엔 흰구름, 풀벌레 소리, 물소리로 더럽혀진 탁한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내자. 가을에게도 미안하지도 않은가.
‘세심정혼(洗心淨魂)’. 올해도 놔둔다면 더 나이 들어선 후회할 것 같다. 이 가을 윤동주의「서시」도 함께 음송해보면 어떨까.
-여여재, 석야 신웅순의 서재. 2022.9.29.
첫댓글 아 !그렇군요 맹정승이 최영의 손서라는사실 조부 맹유가 두문동 72현이라는 사실 !
우리 7세할아버지(蔡王澤) 께서도 두문동의 72현중 한분이셨고 19세 번암 채제공께서도 10여년간을 영상을 지내셨슴니다
좋은 내용을 잘읽어 고맙슴니다 감사합니다
- 춘 암 -
아, 그러시군요. 번암 체재공은 석북 신광수와는 절친한 친 구간입니다.아,채재공 후손이시군요. 전 석북 신광수의 8손이고요.
족보가 그리되는 군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