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옹치리-눈-내옹치리
함 성 호
눈이 내리고 눈은 내리고 , 내가 사랑하던 처녀의 속눈썹에 내리는 눈같이 눈은 내리고,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묻고 깜빡이던 딱한 눈동자, 어쩌라고, 어쩌라고 눈은 내리고, 마른 덤불에, 빈 들판에 눈은 내리고, 노랑턱멧새, 딱새, 오목눈이, 직박구리도, 한데서 고스란히 맞는 눈은 내리고 쌓이고, 쿨럭이는 나무는 차라리 눈의 일족 같고, 눈에 보이지 않는 먼 섬은 눈물 같고, 좌판에 누운 심퉁이, 도루묵이, 양미리는 부러 귀 기울이고, 싸락눈 같은 좁쌀을 덮고 작은 단지 속에서 익어가는 가재미 한 마리도 그러는 것 같고, 어쩌라고, 어쩌라고 눈은 내리듯이, 오징어, 명태, 청어가 오지 않는 빈 바다에도 눈은 내리고, 하염없이 내리고, 북해산 명란이 밥상 위에서 조용히 묵상하는 저녁 눈은 내리고,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발이 묶인 배들을 잡는 긴 밧줄 위에도 새벽 눈은 내리고 위태롭게 쌓이고, 벌써 손질을 끝낸 그물에도, 씨줄과 날줄 위로 또 눈은 내리고, 어쩌라고, 어쩌라고 아무도 오지 않는 빈 우물에도 눈은 내리고, 댓돌에 벗어둔 흰 고무신 안에도 소복이 눈은 쌓이고, 마른 대숲에서 들리는 소리, 신갈나무 잎에 앉는 소리, 감태나무 잎을 울리는 소리, 어쩌라고, 어쩌라고, 부-부-누추한 목선들이 불어대는 나팔 소리에도 눈은 내려, 눈은 내리고
- 시집〈타지 않는 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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