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 썻던 (벌써 3년전;) 글을 꺼내봅니다. 당시 나름 공을들여 썻었는데 묻혔었죠 ㅠㅠ.
제 글 좀 봐주세요 징징.. 이런 의미가 아니라 국내 토크방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다른 주제의 얘기도 나올수 있으면
하는 바람에서 글들을 수정해봤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978년. 왜 갑자기 옛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일까.
이미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이 때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40대 후반에서 50,60대의 노년층들 뿐이며 현재의 젊은 세대와는 본질적으로 괴리된, 아니 알 이유가 별다르게 존재하지 않는 시기이다.
하지만 이시기에 벌어진 일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왜 1978년인가? 나름 풍부한 자료를 담은 위키 백과에 1978년을 검색한다 한들 그 해 이슈가 되었던 일이라곤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286대 교황 취임 정도만이 꼽힐뿐이며 이외에는 그야말로 평온하며 아무일 없이 넘어간 한해 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78년은 한국 축구의 역사에 있어 일대 한 획을 그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 태극마크를 달고 축구를 했던 수많은 국가대표, 청소년대표 선수들 그리고 그들의 플레이를 보며 자라난 이후의 선수들이
모두 향후 30년의 세월동안 한국축구의 변혁의 중심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기억을 보존 재발굴 함이 오늘날 또다른 전환점을 모색하는 오늘날의 한국축구의 과제에 귀감이 되지 않을까 하여
몇자 적어보고자 한다. 이야기는 1960년대부터 시작해야 할듯 싶다.
-- 1966 붉은 악마의 공포.
1978년 이전, 한국 축구의 상황은 한치 앞을 예견할 수 없는 (대체로 부정적인) 불확실성 하에 놓여 있었다.
축약한다면 북한 축구와의 실력 차이에 지레 겁을 먹고 어떻게든 북한과의 대결을 피하려 전전긍긍하던 상황이었던 것.
66년 런던 월드컵 8강 신화 이후, 70년대 북한의 축구는 이미 세계적 수준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동유럽의 유수의 강호클럽들이
시즌을 앞두고 북한 대표를 초청해 연습 경기를 갖는 것은 예사였고, 때문에 훈련 시스템이나 북한 선수들의 기술적 능력은
남한 선수들이 알고 있는 차원의 단계를 몇단계 뛰어넘는 것이었다는게 정설이다.
그랬기에 당시 김형옥 중앙정보부장의 지시하에 북한 축구를 뛰어넘을 남한 축구 팀을 만들자는 모토하에 창설된 양지 축구팀이
정작 북한과의 경기는 단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못한채 2년여만에 해체된 역사도 갖고 있다. 당시 상황 하에 북한 축구를
상대할 엄두도 낼 수 없다는걸 중정이 공인(?)한 셈이었던 것이다.
이런 북한 축구에 대한 대책없는 남한의 두려움은 북한이 없으면 승승장구하다가도 북한을 맞딱뜨릴까봐 전전긍긍하는 패턴을
보였으며 급기야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벌어진 한바탕의 촌극은 한국축구사의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다행인 점은 이 사건이 일시적인 한국 축구의 쇠락기를 몰고 왔지만 동시에 변혁의 시작점으로 작용하여 십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모범을 보여줬다는 점일 것이다.
-- 1974년 서독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73년, 아시아 축구계는 이듬해인 서독 월드컵 본선 티켓을 놓고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의외로(?) 남한 대표팀은 승승장구를 벌였으며, 북한은 AFC 조별예선 B2조 이란, 쿠웨이트, 시리아 죽음의 조에 걸려
조기 탈락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한국 축구의 기세가 오를대로 올랐던게 당시 상황. 거기다 조별 예선에서 지난 70년 칠레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었던 이스라엘을 격파하며 조별예선을 통과했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서독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상대는 호주. 호주는 지난 70년에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까지 올랐던 팀이었으며 70년
당시에는 이스라엘에게 덜미를 잡혀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된 역사를 갖고 있었다. 한국의 입장에서 호주는 역시 70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 당시 1무 1패를 안겨주며 본선행 의지를 조기에 좌절시킨 악연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VS호주 총 3차전까지 가는 박빙의 승부를 벌였던 최종예선. 위 3회의 A매치 특히 동대문 운동장에서 벌어진
2차전은 오늘날 한국 축구 명승부 10선을 꼽으라면 으레 들어가곤 했는데 요새는 어떠한지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차전 호주 홈에서 0:0 무승부. 2차전 동대문에서 전반 26분까지 2:0으로 앞서고 있다 전반 28분, 후반 3분에 연속 실점하며 2:2로
허무한 무승부, 기가 꺽인 한국 대표팀은 중립지인 홍콩에서 1:0으로 패배하며 74년 서독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호주에 내줬다.
이후 한국의 월드컵 본선 도전사는 12년 뒤 86 멕시코 월드컵때에 이르러서야 결실을 맺게된다.
만약 74년 이 때 본선 진출로 선진 축구 경험을 좀 더 일찍 접했더라면 한국 축구가 더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지는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때의 아쉬움은 이윽고 몰아닥친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의 파국 속에 스러져갔다..
-- 북한을 피하라아쉬움이 가득했던 73년을 뒤로하고 74년 제 7회 테헤란 아시안 게임이 개막했다.1차 조별 예선 태국, 쿠웨이트와 A조가 된 한국은 1차전에서 태국을 고재욱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며 출발했다.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속한 B조 (북한은 중국 이라크 인도와 같은 조에 배속되어 있었다.) 1차전 결과상 남과 북이 맞붙을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당연히 비상이 걸렸다.74년 8월 15일 문세광 저격 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살해당한지 불과 1달여도 채 안된 상황에서 남북축구 대결이 감행된다면 문세광 사건에 대한 대리전 나아가 복수전의 성격을 갖기에 충분했고 여론은 이에 부채질하여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릴게 뻔했다. 하지만 북한 축구가 남한의 그것보다 몇 수 위임은 이미 증명된 상황. 여기서 북한에 남한 축구가 패배한다면 그 패배감은 꽤 난처한 것이었다.그리고 2차전 쿠웨이트 전을 앞두고 선수촌 내에 소문이 돌았다. 서울의 높은 분이 2차전 쿠웨이트와의 조별 예선에 질 것을지시했다는 것. (이는 축구협회에서 발간한 한국축구100년사에 기재되며 사실상 승부조작이었음을 인정했다.)그 결과 쿠웨이트와의 2차전에서 한국은 0:4 대패를 당했으며 원하던 대로 남북 대결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별 예선 통과 후 벌어진 2차 조별 준결리그전에서 이라크 이란 말레이시아와 같은 조가 된 한국은 1무 2패라는 처참한성적으로 귀국해야했다. 앞서 5회 참가 1회 우승과 3회 준우승했던 발자취에 오점을 남겼으며 무엇보다도,축구가 정치 논리와 체제 경쟁의 노리개로 더럽혀지면서 74년 한국 축구의 위상과 패배감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요컨대 한국축구는 위기상황이었다.
--- 화랑 대표팀의 탄생
테헤란 아시안 게임의 실패는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을 수놓았던 국가대표 진과의 결별과 쇄신을 의미했다.
우선 감독 최영근씨가 부임 11개월만에 해임되면서 쇄신의 일발을 울린 한국 국가대표는
당시 불과 대학교 1,2학년생에 불과했던 이영무 (당시 경희대) 조영증 (중앙대) 김희태 (연세대) 박창선(경희대) 신현호(한양대, 이상 73학번)
조광래(연세대) 박성화(고려대) 허정무(연세대) 최종덕(고려대, 이상 74학번) 등의 불과 20, 21세에 불과한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발탁했다.
모두 청소년대표에 없어선 안될 존재들을 국가대표로 채간 것이었기에 청대는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그 때문에
75년 제 17회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한국 청소년대표팀 불참이란 사상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쨋든 이 청대에서 올라온 73, 74 학번 세대를 가리켜 화랑 1세대로 칭했으며 기존의 GK 이세연, DF 김호곤을 제외한 전원,
MF 김기복, FW 이회택 박이천 정규풍 등 국가대표 붙박이로 발탁되왔던 선수들이 태릉 선수촌에서 짐 싸서 나가야만 했다.
당시 베스트 일레븐의 절반 이상이 물갈이된 혁신이었던 것. 당연히 이에 따른 잡음과 축구팬들의 항의도 거셌으며
(특히 이회택의 국대 제외는 이회택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축협의 음모라는 가십은 끊이질 않았고, 따라서 국대 복귀론도 자주 터져나왔다.)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팀에서 일부 선수단의 태릉 선수촌 이탈과 훈련 소홀등의 가십거리와 연예인들과의 염문설 등,
여러모로 당시 선데이 서울등에 좋은 먹잇감이 되곤 했다.
하지만 화랑 국가대표 1세대들은 PARK's 컵(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에서 호성적을 거두며 논란을 잠재우기 시작했고 호성적 뒤에는
붙박이 주전이 무의미한 무한 경쟁 속에서 젊은 선수들의 옥석 가리기가 성공적으로 수행됐기 때문이었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곳도 있는법.
이 시기 이영무 최종덕 김호곤 박성화 조광래 허정무 등이 젊은 스타로 떠올랐으나, 박병철 김강남 박종원 이차만 등 쟁쟁한 선수들이 이 시기 경쟁에서 밀리며
실업 축구팀을 전전하다 은퇴, 비운의 선수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 그리고.. 78년
위 과정을 살펴보면서 1978년은 74년의 치욕 이후 근 5년동안의 과정상의 변혁과 개혁을 벌인 한국 축구가 아시아 무대에서
다시 재평가 받는 시험대에 오르는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4년을 주기로 개최되는 아시안게임은 78년에도 개최되었으며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74년의 치욕을 씻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방콕에 도착했다.
당시 선수단 명단은
GK 김황호, 조병득
풀백(FB) 김호곤, 홍성호, 황재만, 박성화, 최종덕, 조영증, 김희태
하프백(HB) 박상인, 이영무, 김강남, 김성남, 조광래, 이강조
FW 차범근, 허정무, 오석재, 신현호, 박종원, 김진국
이들의 이름을 굳이 기록해두는건 뒤에 말하겠지만, 위의 선수단과 뒤에 소개한 78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 출전한 한국 청대 선수단이
향후 83년 슈퍼리그 원년 멤버이자 동시에 86년 멕시코 월드컵, 32년만의 본선 진출을 일궈냈으며
동시에 90년대 2000년대 오늘날까지 한국 축구의 중흥기에 코치로 혹은 감독으로
이 땅에 축구가 뿌리내리고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열성을 다한 이들의 목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는건 그들의 노고에 대한 작은 예우가 아닐까 싶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구성된 78년 아시안게임 선수단은 최 연장자인 김호곤이 당시 29세에 불과할 정도로 젊은 선수단이었으나
성적은 그들의 선배들이 한번도 이루지 못했었던 조별 예선과 2차 준결 리그 전승 행진을 벌이며 결승까지 거칠 것 없이 올라온 대단한 것이었다.
6경기 15득 2실. 하나같이 완벽하게 상대를 압도한 완승이었으며 당시 김호곤의 회상을 빌리자면, '누가 와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라고 할만큼 분위기도 좋았다.
그리고 거칠것 없던 대표팀 앞에 운명처럼 북한 대표팀도 결승 진출에 성공하면서 사상 첫 남북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다.
4년전 처럼 꼬리 내리고 도망갈 수조차 없는 최후의 일전이었던 것이다.
첨언으로 당시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중국은 준결리그 2차 예선 1차전에서 한국에게 1:0 패배를 당했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공한증의 길고긴 악연이었다.
-- 78년 12월 20일
방콕 국립 경기장에서 사상 첫 남북 A매치 대결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사실 76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 4강전 경기에서 사상 첫 남북 대결이 벌어졌으나
그때는 다행히(?) 중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0:2로 패배했으며 박정희 정부는 이 결과에 대한 관제 보도를 했었다.)
선수단 사이의 신경전보다 고국에서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투혼이 더 불을 뿜는 분위기였다.
어쨋든 양쪽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승부였기에 조심스레 경기를 펼쳤으며 거친 파울도 나오지 않는 소강 상태에서 경기를 마쳤다.
물론 지금 이글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야 별 감흥 없는 경기일지 모르겠으나 당시 시대 정황상 골이 안 터지는게 더 가슴 졸이는
기묘한 긴장감이 필드와 고국의 시청자들을 에워싸고 있었다고 한다. 박성화 선수가 경기 중 쥐가 난걸 못으로 찔러 피를 내고 다시
뛰는 장면과 아나운서가 연호하는 북괴 소리와 비명은 원로 축구 팬들 사이에서 아직도 꽤나 회자되고 있다.
그렇게 전후반이 끝나고 연장까지 끝났다. 당시 규정상 남북 공동 우승. 사상 첫 남북대결은 승패가 갈리지 않은 모두가 승자가
되는 명랑 만화같은 결과를 낳으며 끝이 났다. 그리고 시상식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김호곤 씨의 인터뷰로 대신하겠다.
시상식에서 남측 주장 김호곤과 북측 주장 김종민이 금메달 단상에 함께 올라갔다.
이때의 기억을 김호곤 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 김종민이가 먼저 시상대에 올라갔는데, 이 친구가 기세를 부릴려고 그랬는지 단상의 3분의 2를 턱하니 차지해 버리는거야.
다투면 안된다는 마음에서 처음에는 조금 비켜 서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시상대 뒤 편에 도열해있던 북측 선수 중 한명이
단상을 확 밀었고. 갑자기 뒤에서 밀린 나는 시상대에서 떨어져 버렸지.'
상기된 표정으로 다시 시상대에 올라선 김호곤은 김종민에게 점잖게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끼리 이러면 안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함께 좋은 포즈를 취해주자.'
그러면서 김호곤은 의연한 모습으로 먼저 김종민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순간 움찔했던 김종민도 순순히 어깨동무에 응했다.
남과 북의 주장이 함께 어깨동무를 한 채 웃는 역사적인 한장의 사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김호곤의 순발력있는 대응이 우리 민족의 체면을 살린 것이다. 북측 주장이었던 김종민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도 김 전무 (지금은 울산 감독) 자택의 응접실에는 이 사진이 걸려 있다.
--- 나봉기 선수는 아오지행 감이다.
사실 78년 12월 20일의 우승이 있기 몇달전 위 남북대결의 전초전 격이라 할 수 있는 남북 청대대결이 펼쳐진 바 있었다.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제 20회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 준결승전에서의 일이다.
당시 남한 청소년대표팀은 76년 전회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를 불참하면서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선발해 길러낸 청대 자원들을
첫 국제무대에 올려놓으며 성과평가를 받으려는 시점이었고, 당연히도 스타 플레이어가 부재한 청소년대표에 대한 기대감은
상대적으로 저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반영하듯 당시 남북대결이자 준결승전이었는데도 라디오 중계에 그쳤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거기다 당시 북한 청대의 활약이 워낙 좋았다. 대회 조별예선 당시 북한은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스리랑카, 인도와 같은 조에 배속되어 맞붙었으나.
북한은 이들을 상대로 사우디하고만 1:1로 비기고 나머지 경기를 모두 이겨버리며 B조 1위로 8강행을 확정지었던 것.
북한과 사우디에 밀린 일본은 3위로 조별 예선 탈락하고 말았을 정도로 북한 청대의 기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한국 청대도 첫 국제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녹록치않은 기량을 과시하며 무패 행진을 벌였다. 당시 한국이 속해있던 D조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국, 한국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북한의 승승장구의 기세와 마찬가지로 역시 이란하고만 1:1로 비기고
잔여팀을 모두 이기며 본선 1위로 8강에 진출했었다.
그리고 8강전 북한은 인도네시아를 남한은 바레인을 각각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드디어 준결승에서 맞붙게 되었다.
당시 한국 청대 베스트 11에 대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GK 박영수
FB 김창효 설정현, 장외룡, 김영철
HB 박항서,이태호, 박윤기 (김기만 선발 -> 왕선재 교체)
FW 김석원, 정해원, 이상용
이렇게 시작된 남북전. 어느 한쪽도 질 수 없는 경기였기에 경기는 좀처럼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다. 경기는 상당히 거칠지만
전반적으로 한국의 우위하에 진행됐다는게 정해원이나 이태호 씨의 인터뷰이나 어쨋든 경기는 0:0으로 마무리되고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1번 주장 박항서 ( 당시 한양대 )
2번 김창효 ( 당시 부산상고 )
3번 왕선재 ( 당시 동아고 )
4번 정해원 ( 당시 안양공고 )
5번 장외룡 ( 당시 연세대 )
6번 이태호 ( 당시 대전상고 )
당시 PK 키커의 명단이었고 북한의 명단은 오직 6번 나봉기 선수외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양팀모두 배정된 5명이 모두 PK를 성공시켜 5:5로 동률의 상황에서 이태호 선수가 마지막으로 가볍게 밀어넣으며 6:5의 상황
북한의 추가 PK 키커는 풀백 나봉기 선수였다. 나봉기 선수의 왼쪽으로 향한 슈팅을 박영수 골킵이 막아내면서 경기는 한국청대의 승리로 돌아갔다.
당시 나봉기라는 생소하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이름과 PK 실축은 강한 인상을 남기며 '나봉기는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 는
허무맹랑한 루머가 퍼지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일은 없었고 2년 후인 80년 9월 쿠웨이트에서 벌어진 아시안 컵에서 다시 북한대표
로 모습을 드러내며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기도 했었다.
그렇게 준우승에서 최대의 난적인 북한을 물리친 한국청대는 결승전에서 이라크와 1:1 무승부로 공동 우승하며 63년 이후 15년만의
우승을 달성했다.
국내에서는 73,74 학번의 화랑 대표팀 1기를 능가할 골든 제너레이션이 탄생했다고 설레발을 떨었으며 실제로 78년 청소년 대표
대부분이 국대에 발탁, 86 월드컵과 88 올림픽 나아가 90 월드컵 본선무대까지 모두 참가하였으며 슈퍼리그의 원년 멤버로 90년대
초반까지 프로무대에서 활약하며 한국 축구의 중흥을 이끌었다.
-- 78년을 맺으며
그렇게 78년은 아시안게임 우승과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 우승하며 마무리되었다. 피하기위해 승부조작(?)까지 불사했던 북한을 이기거나
혹은 대등한 위치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5년이었다. 이후 남북대결에서 북한에 패한 역사도 없었던걸로 기억하며 북한축구는 A매치 2년 출장
금지 등 침체기를 겪을 동안, 한국축구는 오히려 눈부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중요한건, 우승이라는 단기적 목표 도출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이 혁신의 연속성과 지속성에 기반하여 발생한 성과물들을 8,90년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마음껏 향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혁신이란 그 생명력이 다했을 때에 순식간에 구식으로 전락하며 새로운 혁신의 도화선으로 희생되는 것이 혁신의 운명적
특성이다.
그렇다면 2008년이 저물어가는 현재, 한국축구는 혁신이 이루어져야할 시점에 온 것일까?
대답은 부분적인 긍정이다. 이미 혁신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꾸준히 그리고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혁신을 위한 구체적 방법론에
들어가면 입을 다물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답보적 상황은 기존 체제의 안정성을 뒤흔들기만 할 뿐 그다지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기 이전에 오늘날의 우리에게 함의를 던져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74년 테헤란의 치욕과 혁신, 78년과 이후의 성공 일대기는 우리에게 어떤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현재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투영시킬 수 있다면 78년의 기억은 단순한 사문화된 데이터가 아닌
한국축구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재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의 글에서는 혁신의 목표를 뚜렷히 하고 그 방법론에 대한 고찰을 주로 하여 서술해보고자 한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올 2008년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대한민국의 이름을 달고 나서며 한국축구가 본격적 발걸음을 딛은지 꼭 1갑자가 지난 해이며
1978년은 정확히 그 중간점에 서있는 지점이었다. 78년의 반추를 통해 78년과 결별한 2008년 또다른 황금세대의 탄생을 기대했었고
베이징 올대가 그 역할을 해주길 바랐던 것이 사실이나, 아직 뚜렷한 특이점을 찾지 못했고 좀 더 기다려봐야 될 성 싶다.
사실 이제 북한을 이기자, 유럽을 이기자와 같은 국가대표 중심의 목적의식, 위로부터의 개혁방안 등은
이미 시대에 뒤처진 진부한 것이라 생각하며
진정한 프로 리그, 프로 선수, 프로 심판의 등장과 아래로부터의 혁신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2008년이 지나가기 전에 이와 같은 취지의 글을 쓰려고 마음먹기만 하다 겨우 맺는다.
-- 2012년 현재 수정하며.
1974년 승부조작의 참화를 딛고 78년의 도약을 일구어냈던 한국축구. 2011년 K리그 승부조작의 위기를 딛고 새출발하려
몸부림치는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과거의 잔상과 겹칩니다. 가히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하겠습니다. 명확한 목표의식과
다양한 전략적 모색을 통해 78년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2012년의 후배들도 이 위기를 딛고 멋진 반전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북한이 1960년대 중반까지는 남한보다 경제적 수준이 앞섰습니다. 거기다 195,60년대 남한축구계의 스타였던 최정민 씨가 북쪽 출신 실향민이셨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기본적인 신체조건에서 북측 출신들이 우위를 점했던게 아니었던가 추측해봅니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상전벽해 되었습니다만.
좋은글입니다 올림픽에서 제대로 성적내줬으면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