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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 7,12-15>
그 무렵 베텔의 사제
12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1,3-1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 복음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지닌 말씀의 칼날을 날카롭게 유지하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왜일까요?
혼자 다니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충실할 수 있을 텐데, 둘이 다니면 계속 상대를 신경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근본이 먼저 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사랑 실천에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본당 신부와 보좌 신부, 본당 신부와 수녀님들, 혹은 수녀님들 간에 화목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그분들이 어떤 복음을 신자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요?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이들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어 화목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 내용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주님이 계심을 믿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이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빵과 돈과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먹고 자고 입을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충분히 있어야 신경을 쓰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질수록 더 신경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주님의 섭리에 맡기면 됩니다.
저도 돈이 필요할 때면, 사람들을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돈을 줄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욕심이 생기면 사람의 영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을 챙길 도구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지나치게 막 대하다고 가정해봅시다.
시어머니는 자신처럼 부잣집에 자기 아들처럼 대단한 사람에게 며느리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서입니다.
이렇게 돈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공동체에 있다면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오는 사람도 그러한 시선으로 보기에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이가 이런 시어머니와 같이 되면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중국 고대 전국시대 문혜왕(文惠王)을 위하여 당시 최고의 백정인 포정(庖丁)이란 사람이 소를 잡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대는 곳이나 발로 밟는 곳이나 무릎으로 누르는 곳은 푸덕푸덕 살과 뼈가 떨어졌습니다.
칼이 지나갈 때마다 설겅설겅 소리가 나는데 모두가 음률에 들어맞았습니다.
그의 동작은 상림(桑林: 탕 임금이 만든 춤)의 춤과 같았으며, 그 절도는 경수(經首: 요임금이 만든 음악)의 절주(節奏: 가락이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에 들어맞았습니다.
문혜왕이 보고 말하였습니다.
“아아, 훌륭하도다.
재주가 이런 지경에 이를 수가 있을까?”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적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소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완전한 소가 보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춰 버리고 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천연(天然: 사람이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의 조리를 따라서 큰 틈을 쪼개고 큰 구멍을 따라 칼을 찌릅니다.
소의 본래 구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부닥뜨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에야 부딪치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일 년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그 사이 잡은 소는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내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휑하니 칼날을 움직이는데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나도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내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뼈와 살이 엉긴 곳을 만날 때마다 저도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조심조심 경계하면서 눈은 그곳을 주목하고 동작을 늦추며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후드득 떨어져 흙이 땅 위에 쏟아지듯 쌓입니다.
그러면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에 잠깁니다.
그러고는 칼을 닦아 잘 지킵니다.”
문혜왕이 말하였습니다.
“훌륭하도다.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서 삶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 이야기는 『장자』의 '양생주(養生主)' 편에 나오는데 포정이 소를 잡는다는 뜻으로 ‘포정해우’(庖丁解牛)라 합니다.
장자가 말하는 ‘도’(道)’란 우리가 말하는 ‘진리’와 같습니다.
진리를 터득한 포정은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정신으로 봅니다.
진리를 터득한 사람은 소를 돈으로 보지 않고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분해한다는 뜻입니다.
무아의 경지에서만 소의 본질을 보고 그것을 분해하는 데에서 춤추듯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도 병자가 잘 낫지 않고 악령을 쫓아내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 진리의 칼이 무뎌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내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의 관계가 좋은지 살펴야 합니다.
좋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서로 사랑한다면, 그 다음은 ‘가난’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것을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시선이 소에게 빼앗겨 힘줄을 건드리고 뼈를 건드려 칼날이 무뎌집니다.
우리도 포정이 소를 육신의 눈이 아닌 정신으로 대하되 이치에 따라 조금도 억지가 없이 춤추듯 칼을 놀리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 스스로 욕구를 버리고 대상에 대한 의식이 없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행동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욕구에 사로잡히면 자연의 이치를 보는 눈을 잃어 성령의 칼날도 무뎌지고 그러면 복음을 전할 힘을 잃습니다.
백정이 무딘 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씀의 칼날이 무뎌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사랑의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 자신부터 세속의 욕망을 없애 공동체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무언가 세속적인 것을 바라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수도자로서 오랜 초기 양성 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 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일을 하는 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들 앞에서 한결같은 겸손의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원장인데!’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 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 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 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갖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코 복음 6장 8~9절)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당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 신앙의 본질과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인 것들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 생각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행하는 제반 사목에 대한 지속적인 회개의 결핍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목자로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반성이 요구됩니다.
거듭되는 사목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사목적 회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회 입회 전, 중고등부 교리교사를 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부족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일종의 천국 체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별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자연스레 교리교사로서의 사명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에도 비슷한 체험이 계속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틈만 나면 티격태격했지만, 그 와중에 아이들로부터 혈육 이상의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맛본 이후 사목자로서의 대대적인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니 그걸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힘들지만 아이들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돈이며, 좋은 차며, 메이커 옷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어디 외출 나가도 머릿속은 늘 아이들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행복, 아이들의 구원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자연스레 나 자신을 위한 투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청빈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부차적인 것들, 외적인 것들,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그리도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사목적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사목 대상자들, 양떼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나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해서 틈만 나면 나를 찾고 내 소매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 사랑 체험을 한 이후 어찌 그들에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살레시오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눈 팔지 마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안고 살지만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이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일깨우고 그분의 바람을 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담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를 파견하셨습니까?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대로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주심”과 당신의 가르침, 즉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서입니다.
그 사명은 열두 제자에게 국한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마귀를 끊어버리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기초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을 입었고 파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주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꿋꿋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짝을 지어 파견한 것은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말해주는 관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복음의 선포는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함께 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이 함께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말고 협력자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시편에서는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55,23)
함께 일하되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웃과도 함께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 하는 척 할 수는 있겠지만 진심으로 함께 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눈 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옛 말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고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 데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주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6,33)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면 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신부님으로부터 잔소리 듣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거기다 돈도 내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려고 하니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기도하러 왔는데 왜 그리 말이 많고 설치는 사람이 많은지 밖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힘을 비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채워주십니다.
더 큰 마음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이사 41,10)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을 전하는 가장 큰 몫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의로움을 선택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접하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충직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 열매는 주님이 주십니다.
주님의 뜻을 행했으면 결과에 연연해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흘린 수고와 땀은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일의 결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온종일 땀 흘리며 고랑을 파듯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길을 파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해 어떤 좋은 결과를 이루었을지라도 가까운 이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낙담과 실망에 빠져서 일할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안에서도 당신의 일을 한결같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가 무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의로움을 통해 주님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서 주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쁨을 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만드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지켜줄 힘과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성경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선언합니다. (잠언 16,3)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랑의 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출세와 물질에 치중하고 있는가 점검하고 사랑의 삶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가, 데리고 사는가 자문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적 축복을 전하며 또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시편 37,5)
한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도둑질 하는 것과 거짓말 하는 것 중에 어는 것이 더 나쁜 거예요?”
엄마는 아이에게 “그야. 도둑질 하는 것이 더 나쁘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엄마, 아니예요, 거짓말이 훨씬 더 나빠요.
왜냐하면 도둑질한 것은 돌려줄 수 있지만 거짓말은 돌려줄 수 없잖아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과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때 본의 아니게 거짓말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 한 약속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한 약속을 꼭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가까운 사람에게 파견되는 우리>
오늘은 파견 얘기이고 독서는 아모스 예언자가 파견되는 얘기입니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 예언서 7,15)
복음은 사도들이 파견되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마르코 6,7)
그래서 파견되는 얘기를 묵상하다가 남의 파견 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파견도 얘기해야 하지 않나 생각되어 나의 파견을 묵상케 되었습니다.
관구장을 마치고도 저희 관구의 선교 책임을 오랫동안 맡았던 저는 파견된 적은 없고 형제들만 파견한 것 같았기 때문인데, 그런데 저는 ‘정말 파견되지 않고 파견만 한 존재였는가?’ ‘하느님만 파견하시는 분이고 인간은 누구나 파견되는 존재가 아닌가?’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시작된 묵상은 저에 대한 성찰로 바뀌었고 성찰은 반성으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감히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고는 자신이 파견되었고 파견될 존재라는 저의 정체성을 너무도 어처구니없지만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반성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도 생활에 관한 문헌 <봉헌 생활>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서 수도 생활의 모범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신 분이라고 얘기되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출생 자체가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으로 파견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거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지요.
그것도 우리의 의사를 물으시고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 뜻대로 창조하셨고 이에 우리는 군소리 없이 태어난 존재이고요.
그렇다면 파견된 나는 과연 파견의 삶을 살고 있는가?
답하기 참 어렵지만, 예나 지금이나 파견을 거부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파견에 얼마나 깨어 있었는지 그 의식의 차원에서는 오늘 독서에서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라고 한 아모스 예언자처럼 많이 깨어 있지 못했고 특히 일상의 차원에서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교 강의 때 참 많이 얘기한 바와 같이 우리는 매일 미사의 끝에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파견을 받는데, 해외 선교사라면 해외로 파견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는 그 첫째가는 파견지가 바로 같이 사는 가족이요, 형제들이지요.
같이 사는 사람에게 나는 남편이기도 아내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파견되는 선교사요 예언자이기도 하다는 말이고, 그들은 내가 복음을 들고 또는 살아있는 복음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우리는 이웃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파견되었고 찾아가야 하는데, 수없이 만나면서도 하느님께서 나를 그들에게 파견하셨다는 의식이 없이 만났고 그래서 많은 경우 저는 복음 없이 주님은 떼어놓고 만났습니다.
게다가 요즘의 저는 현저하게 인간적인 만남조차도 소극적입니다.
일의 추진력이 전보다 못함은 물론 일을 벌이는 것도 주저합니다.
이것을 저는 전보다 힘이 떨어져서 그런 줄로만 생각했는데, 오늘 저 자신을 더 성찰하고 반성해보니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성찰인데, 지금의 저는 여기서 무엇을 하기보다 여기를 떠날 생각을 더 하고 그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인 것 같은데, 그때부터 저는 이 세상에서 뭘 하는 것보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을 더 생각하고 그 돌아갈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왔으니 아버지께 돌아가긴 가야지요.
그래도 돌아갈 그때까지는 파견된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어쩌지요?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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