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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운<한양대 수학과 명예교수>
<1>들어가는 말
불교는 철학·과학 포함한 합리적 종교, 실험·관찰보다 사유적인 수학과 비슷
필자소개
·1927년 日 도쿄 生
·日 와세다대 졸업
·美 어번대 석사
·67년 加 앨버터대학 이학박사
·日 고베대·도쿄대 객원교수
·現 한양대 명예교수, 수학문화연구소장,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저서 <한국 수학사> 등 다수
이 글의 시작에 앞서 철학, 과학(수학), 종교, 특히 불교의 의미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다. B·러셀은 “철학이란 신학과 과학의 중간 영역의 학문”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神學)이란 유태·기독교에서의 신학이며 그것은 처음부터 신의존재, 절대성을 전제로 하여 이미 수립된 교리를 합리화하는 설교론(說敎論)적 입장이다.
철학은 모든 존재를 설명하는 근본적인 체계를 세우는 일이며 그 체계의 출발점을 찾는 일이 핵심적 작업이다. 그 좋은 보기가 있다. 희랍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타래스는 물을, 피타고라스는 수를 근원적인 것으로 삼았다. 또 근대과학의 창시자이자 철학자 데카르트는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모, 학교, 사회로 부터 배운 것들이 허상인가? 아니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 누군가의 악마적인 힘에 의해 전개된 것인가?’하는 의심을 했었다. 절대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확고한 사실로부터 생각해야 되는데 과연 그 절대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의심해도 “자신이 여기서 의심(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철학적인 명제는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객관화된 것이다.
종교는 죽음의 불안에서 시작된다. 철학적인 “생각한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 있다”는 것과 언젠가는 “죽는다”는 자각에서 출발하고 그 의미를 묻고 궁극적으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 곧 “마음이 편해지고 살아 있는 보람을 갖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문제에 관해 과학과 종교는 그 출발점이 다르다. 단순한 생물적인 “생사”의 문제만이라면 과학의 대상이다. 과학은 생명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개인의 주관도 전혀 개입할 수 없다. 오직 화학적, 물리학적, 생물학적으로만 설명된다.
생명은 영원한 미래에서 나에게 전해지며 또한 나로부터 구원의 미래에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먼 과거와 미래에 있는 생명 흐름의 결합점에 있는 존재이다.
종교는 이 전 생명의 흐름 속에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가 생명의 접합점을 의식하는 일이다. 따라서 철학과 과학이 생명체의 외부에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그 속으로 들어가 그 의미를 묻는 작업이다.
그러나 불교는 B·러셀이 말하는 신학적 태도보다는 ‘과학과 철학’을 내포하는 합리적 태도로 일관한다. 어떤 대상도 절대화하지는 않으며 합리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기에 불교는 처음부터 과학 탐구와 같은 태도로 사회, 자연의 법칙성에도 큰 관심을 갖는다. 수학이 여타의 과학과 다른 점은 실험, 관찰이 없으며 사유세계에 머문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합리적 태도는 과학 가운데서도 수학에 가깝다. 기독교의 역사가 과학과의 대결 속에서 전개되어 왔던 것과는 달리 불교와 과학(수학)은 전혀 충돌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세상은 시간적으로는 시작도 끝도 없다. 칸트(I.Kant)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간의 시작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명제는 어느 쪽이나 이율배반이 되며 따라서 이들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답이 없음을 선언하고, 과학과 철학의 영역이 다름을 명시한다.
석가모니 부처님 역시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언을 하지 않았다. 이점에서도 불교는 과학적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신의 천지창조로부터 시작한다.
<2>무한이란 무엇인가
數의 모임 부분과 전체 1:1 대응가능
화엄경의 ‘일즉다 다즉일’ 논리와 비슷
종교는 생명의 의미를 태고이래의 생명의 불씨로부터 영겁의 미래에 이어지는 전생명의 흐름에 투영해서 생각한다. 생명의 시작과 끝에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이 있다. 우선 생명흐름의 시작과 끝은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라는 생명관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날 로마 법황은 전세계의 최고급 과학자들을 모아 천지창조에 관해 솔직한 토론을 하도록 했다. 과학자들은 많은 논의 끝에 드디어 하나의 결론을 얻었으며,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대 폭발(Big Bang)에서 시작되었다는 논의의 결과를 법황에게 알렸다. 그러자 법황은 즉각 “좋다, 그 빅뱅(Big Bang)을 가능케 한 것은 하나님이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처음의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을 것이며 그것에서 파생되는 생명의 이어짐은 결국에는 직선적이다. 유태·기독교에서는 처음 시작을 천지창조, 그리고 마지막의 끝점을 최후의 심판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불교적 사유에서는 처음에 빅뱅이 있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면 그 하나님을 존재케 한 것은 무엇인가? 다시 그 시작에 대한 물음이 계속 소급해서 이어간다. 이 자명한 논리 앞에 어떤 지성도 맞설 수 없게 된다. 이 순환 논리를 끊기 위해 단숨에 신비주의의 틀에서 절대자를 내세우거나 아니면 시작도 끝도 없는 원환의 생명관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선다.
이 논리적 구조가 현대 수학의 무한소, 무한대를 비롯한 수많은 개념과의 일치점을 갖게 한다.
불교 철학은 이 세상에서 숨쉬는 것과 그것이 살고 있는 환경을 포함하는 모든 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여러 얽힘, 즉 연기와 그 결과인 업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 논리에서는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출발점을 설정할 수 없게 된다. 시간의 시작이 없다면 끝도 없다. 그리하여 세계의 시작에 대한 물음은 무의미해진 것이다. ‘시작은 무시(無始)로부터 발생했다’는 언뜻 비논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명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시작이 없고 끝이 없는 공간은 원이다. 원 둘레 위의 한 점을 끊어 시작과 끝을 설정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느 점을 끊을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답이 없다.
<3>희랍과 불교의 논리
‘자등명 법등명’ 논리사고 형성의 모태
희랍논리학 2천년 지나 무한론 도달
석가모니는 평생토록 모신 제자 아난(阿難)에게 마지막으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가르침을 남겼다.
<스스로를 등(燈)으로 여기며 지탱하여 남을 의지하지 말고, 진리(법)를 등으로 삼아라>는 뜻으로, 어둠(無明, 카오스)의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의 이성과 불교적 진리(法)만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믿어야 할 것은 오직 너의 지성일 뿐이다.”
이 말씀에서 희랍의 주지주의 철학자와도 같은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지(知)는 모든 사람이 갖는 것>이라는 주지주의적인 신념이기에 나의 ‘지(知)’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지(知)’를 바탕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사이에 협동적 연구가 중요시된다. ‘지(知)’와 노력(정진)의 목적은 나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 인류를 생각하는 일이다. 불자끼리 서로 격려하여 탐구하는 주제는 항상 <지(知)와 그것으로 얻은 진리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에서 시작되고 활발한 토의가 이루어진다. 이 양상은 초월자(神)에게 절대적으로 귀의(歸依)하는 유태, 기독교의 교단 생활과는 판이하다. 이것은 오히려 플라톤 아카데미를 연상케 한다.
플라톤 아카데미의 현판에는 <기하학(논리, 지성을 닦는 법)을 모르는 자는 이 문에 들어오지 말지어다>라고 쓰여 있었으며 이곳에서는 인식론, 철학, 과학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고대 불교 교단도 많은 공통점을 지니며 불교학은 여러 학문 분야를 내포한다.
플라톤의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의 형식 논리를 완성한다. 이것은 유클레이테스의 <원론>에 집대성이 되어 서양 수학의 기초가 되었다.
석가모니가 자등명(自燈明)을 가장 가까이 모신 제자에게 마지막 교훈으로 전했음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 지적 분위기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형식논리를 형성케 하는 사상적 모태가 된다. 실제로 불교에서는 인명(因明)으로 불려지는 논리학이 있었다. 그것은 주로 종교적인 논의에 이용되는 것이므로 정말 논리가 되지는 못했으나 분명한 형식 논리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종(宗) : 聲(소리)은 무상하다.
인(因) : 所作性(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유(喩) : 法(법)으로서 所作性은 모두 무상하기 때문이다. 가령 항아리와도 같이.
종(宗)은 삼단 논법의 결론이며, 인(因)은 소전제이고, 유는 대전제와 그 보기이다.
명(明)이란 학문이라는 뜻이며 인(因)은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이 형식은 인명(因明)이라 부른다.
우리의 관심에서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것을 연구하여 그 저서가 일본에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리트 기하학으로 집대성되었으나 불교의 인명은 그후 수학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희랍과 불교 사상이 공통적으로 주지주의적 경향을 가졌으면서도 희랍인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유한적’인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편 불교적 관심은 바른 지성으로 ‘생로병사’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것에 있었으며, 이것은 인간의 실존 문제이며 불교적인 지의 대상이다. 그리하여 사유는 마음 깊은 곳을 파헤친다. 과학은 자연적인 대상만을 문제삼은 것에 비해 불교의 중심 과제는 전 인류적 차원의 구제이다.
그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모양도 끝도 없는 세계이다. 인명이 이런 것을 대상으로 삼을 때 희랍적 정밀 논리가 일삼는 대소, 순서의 구별을 빠져나가고 만다.
불교의 인명이 유클리트 기하학과 같은 학문에 직접 관련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인간 문제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희랍 논리학의 계열이 겨우 2000년후에야 당도한 무한론에 단숨에 뛰어들 수 있었다.
<4>‘空’과‘0’
- 空사상 수학에 투시 ‘0’ 개념 등장 -
- ‘없지만 있다’는 철학적 사유 제시 -
기독교의 <성서> 이슬람교의 <코란>, 유교의 <논어>… 등은 그 교리의 창시자의 언행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이들 책을 읽으면 그 종교 사상, 교리 등에 관한 핵심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는 크게는 소승, 대승의 구별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法門)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불교 철학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 들을 분리하여 낱낱이 주목하면 때로는 서로 모순이 되는 어구도 있으나 이 많은 경전과 법문은 큰 바다에 흐르는 강물과 같이 불교의 큰 바다에서 융합 되고 있다.
이 바다 어디서나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 연기(緣起), 공(空) 등의 사상이 바다위에 반사되는 햇빛처럼 번득이고 있다. 모두는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깊이 얽혀 있다. 모든 현상은 연기에 의해 일어나기에 본성은 공(空)이며 연기의 결과는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로 표현되고 있다. 불교와 수학은 목적부터 다르므로 불교 철학을 수식으로 표현한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논리적 구조로 보면 다음과 같다.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와 공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생각하면 다(多)를 2, 즉(卽)을 “=”로서 표현해 2=1이란 곧 다즉일(多卽一)의 방정식 이 생긴다. 이식의 양변에서 똑같이 1을 빼면 2-1=1-1, 즉 1=0이다.
1을 존재하는 것의 단위로 하고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를 인정하면 존재는 곧 공(空)이다.
수학에서도 1+1=2가 아닌 1+1=1의 논리를 받아들일 때가 있다. 두 개의 불 씨를 합할 때, 두 개의 강물이 합쳐질 때, 전기의 흐름이 합쳐질 때는 1+1=1 이다. 수학에서는 이처럼 물, 전기, 불같은 연속양, 즉 분리할 수 없는 대상은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속담의 ‘칼로 물 베기’의 세계이다.
공(空)은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연기(緣起)의 결과이 므로 실체가 없는 공이 실상이다. 또 역으로 빈 그릇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백지에는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공(空)한 까닭에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성립할 수 있다. 이것을 용수(龍樹)는 중관론(中觀論)에서 ‘일체법 (一切法)은 무자성공(無自性空)’, 즉 자성(自性)없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성립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공의 사상이 수학에 투시되어 영(零)의 개념이 되었다. 인도에서 맨 처음 영이 발견된 까닭은 이 공의 사상 때문이었음이 수학 사의 창설이다.
현대인은 초등학교 1학년에서부터 1+0=1, 2+0=2……라는 식으로 0을 배운다. 분명히 0은 수세계의 한 멤버이다. 그러나 처음 인간이 수를 발견한 것은 물건의 집합 요소의 개수를 나타내기 위해서 였다. 사과 한 개, 두 개의 돌멩이, 세 마리의 양떼가 있다 …. 이것을 1, 2, 3…으로 표시했다.
겉보기에는 두 개의 돌멩이와 두 마리의 양떼 사이에는 “돌”, “양”만 보 일 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하나씩 대응이 성립한다.
이 사실을 인식한 인간은 “2”라는 수를 추상해 냈다. 이와같이 계속해서 인간은 1, 2, 3…을 알아냈다. B·러셀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류문명 은 새로운 단계로 비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0을 주상 (鑄商)하는 데는 더 많은 지적 단계를 밟아야 한다. 2는 두 개의 물건의 집합 에 대한 숫자이다. 마찬가지로 0은 아무것도 없는 물건의 집합에 대한 수다.
이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존재한다” 또는 “없는 것이 있다”라는 언뜻 모순에 가까운 논리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셈(수)의 문제 가 아니라 공을 실제로 인식하는 철학과 관련된다. 그것은 곧 불교적 ‘일체 법(一切法)은 무자성공(無自性空)’과 통하는 신념일 것이다.
<5>數와 철학
空사상 선입견 배제 대상접근 가능
수체계 ‘0’ 개념 도입 획기적 발전
불교의 ‘모든 것은 공(空)’-일체법(一切法)은 무자성공(無自性空)이라는 사상은 그릇된 교육 또는 사회적 통념등에서 오는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대상의 본질에 똑바로 접근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처음에 공(空)이 있었다’이며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이 유태·기독교의 사상이다. 이들 생각이 시간관에 투영되면 불교의 ‘무시무종(無始無終)’과 유태·기독교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으로 대조를 이룬다.
인간이 수를 집합의 개수와 대응시킴으로써 1, 2, 3, …과 같은 수를 매우 자연스러운 발생 과정으로 형성했으므로 ‘자연수’라 한다. 그러나 ‘처음 공이 있었다’의 불교적 사유를 따른다면 자연수란 0, 1, 2, 3, … 으로 해야 옳다.
실제로 수학의 기초를 닦았던 수학자들중 페아노는 그것에 따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가 훨씬 철학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이미 처음 수학을 대할 때부터 ‘0’을 배웠으나 상당한 수학 수준을 가졌던 고대 문명사회에서도 0의 기호가 없었다. 수(數)는 하나, 둘, 셋, …이라고 셈하는 것이라고 믿어 온 선입견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대상을 현실적으로 취급하여 기호화 할 때에는 철학적인 성찰이 앞서야 했다. 가령 중국의 경우를 본다면 ‘0’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一, 十, 百, 千, 萬, 億, 兆, 京, …이라는 식으로 단위가 하나씩 올라갈 때 언제나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야 했다.
一이 10개이면 十,
十이 10개이면 百,
百이 10개이면 千,
千이 10개이면 萬……
이런 식으로 단위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단위와 글자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일단 0을 도입하면 수 체계에서는 0, 1, 2, …, 9가지 10개의 수만으로 어떠한 수라도 표시할 수 있다. 주판이 그 원리를 따르고 있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 즉 0의 상태이다. 0 이기에 어떤 수도 넣을 수 있다. 한글로 506을 나타낼 때는 ‘오백육’이므로 5006으로 잘못 쓰는 사람도 있다. 506을 백의 자리가 5개, 십의자리가 0개, 일의 자리가 6개 있다는 뜻이다. 공(空)은 곧 0으로 표시되어 506이 인도식(이 수체계는 인도에서도 발명되고 아라비안인도 발명했으므로 정확하게는 인도·아라비아식이다)숫자로 불린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천문학적인 수를 어떻게 일일이 문자로써 표시해야 하며 또 실제로 계산에는 엄청난 불편이 따른다 가령 ‘3352×207 2’의 계산은 초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지만 ‘삼천삼백오십이’ 곱하기 ‘이 천칠십이’로는 좀처럼 셈할 수가 없다.
이 수체계는 기록용이지 계산용은 아니다. 요컨대 0의 발견 없이는 수학의 발전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었다. 0의 개념은 무명의 인도인에 의해서 발견되었으나 그것은 앞에서 말했 듯이 특히 불교의 공(空)의 사상이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정보시 대라는데 그것은 전자계산기가 주역이다. 전자계산기의 수학은 {0과 1} 두 개의 수만을 이용하는 2진법의 수체계이다.
10진법 2진법
1. 1
2. 10=2×1+0
3. 11=2×1+1
4. 100=22×1+2×0+0
? ?
이것은 {1, 0}↔{유, 무}↔{on, off}로 대응한다.
E·토리첼리가 진공의 존재를 물리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기 전까지는 ‘진공(眞空)은 존재할 수 없다’라는 것이 유럽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상의 전통적인 명제였다.
‘말씀이 계셨다’에서 시작되는 세계관에서는 “아무것도 없다”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상풍토에서는 공을 수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공이 모든 만물의 실상’이라는 철학을 갖는 정신풍토에서는 자연스럽게 0을 수로 취급할 수 있는 일이다.
<6>석가모니의 수감각
부처님 티끌·먼지등도 수로 표시
‘지수’이용 數의 무한사상 나타내
부처님의 생애를 설명한 설화에는 그의 수감각을 엿볼 수 있는 글이 많이 남겨져 있다. 젊은 싯달타 왕자는 단다비니 왕국의 공주 고바에게 구혼했다.
이때 경쟁 상대가 5명이 있어서 선발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시험 과목은 쓰기, 씨름, 궁술, 달리기, 수영 그리고 수학이었다. 당연히 모든 과목에서 일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지혜를 시험하는데 대수학자 알세니와의 수학문답이었다.
이때의 문제중의 하나가 “百고티(Koti)(=109=10억)보다 큰 수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것이다.
그는(109)×(109)
(109×109)×(109×109)……
라는 식으로 10421즉, 1 뒤에 0이 421개 붙는 수를 생각했다.
다음 문제는 “입자 7개가 극미인 진(塵)이 되고 이 진을 7개 모아 (72), 그것을 또 7개 모아 날아가는 정도의 애(埃)(73), 그것을 7개 모아 토끼의 발자국 한 개 정도의 크기(74)……”
이런 식으로 4×103×4×2×12×710……
물론 싯달타 왕자는 최고의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 받았다.
수를 안다는 것은 ‘일, 이, 삼, 사…’ 수와 ‘100은 10의 10개’라는 식의 수들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음을 뜻한다. 어린이들은 물건을 보고 한 개, 두 개 셈하다가도 어느 정도 이상의 수에 대해서는 ‘많다’고 표현하고 그 이상은 ‘무지무지하게 많이’라는 식으로 되풀이 한다.
지금도 아프리카, 남미 오지의 원주민 사이에서는 ‘하나, 둘, 많다’는 수밖에 모르는 부족이 있다. 삼 이상의 수에 대한 이름(수사)도 이들 수의 관계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고대 문명국에서는 얼마 정도의 수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수의 범위는 현실적인 쓰임새의 범위와 관계가 있으며 고대 문명의 정상을 누린 희랍에서는 ‘만’정도 까지의 수를 알고 있었다. ‘만’정도의 수도 상당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인류 사상 최고의 천재 희랍의 아르키메데스는 전세계 모래알의 수를 셈하는 것을 시도하고 엄청난 수사와 수를 밝혔다.
아르키메데스는 1만의 1만배, 10,000×10,000=100,000,000=108
즉, 1부터 1억 미만까지의 수를 최초의 ‘오크타드의 수’(number of the first ‘octad’)라고 불렀다. 제 2의 ‘오크타드의 수’는 1억부터 108×108=1016 미만까지의 수가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10,800,000,000
이라는 수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1에서 이 10,800,000,000까지의 수를 최초의 ‘페리오드의 수’(number of the first ‘period’)라고 불렀다. 또 10,800,000,000을 바탕으로 제2의 ‘페리오드의 수’(=108·10,800,000,000), 제3의 ‘페리오드의 수’(=1,016·10,800,000,000), …와 같이 얼마든지 큰 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이와 같이 수의 크기를 차례로 나타내어 감으로써 전세계에 흩어진 모래알의 수는 최초의 페리오드 중의 제7의 오크타드의 1000단위와 같은 수, 즉 1051보다 적음을 아르키메데스는 밝혀낸 것이다.
석가모니의 수 계산 방법도 본질적으로는 지수를 이용한 아르키메데스와 같다. 여기에는 수의 무한이라는 사상이 깃들여 있는 점이 중요하다. 단순히 수의 명칭, 즉 수사를 새로이 만드는 데 지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명칭이 있는 수는 구성이 가능하며, 따라서 그 존재가 보장받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기호문자는 수열의 무한성이라는 것을 뚜렷이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두 천재는 ‘무한’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사용을 피했다. 그러나 이 사고는 무한과 유한이 분명히 구별되고 그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 무한에 도달될 것임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7>大數와 小數
- 항하사·아승기겁 등 무한대 수 -
- 1탄지= 65찰나= 65분의 1초 -
“선남자들아 과거 무량(無量), 무변(無邊), 불가사의(不可思議), 아승기겁(阿僧祗劫)… 그 때에 부처님이 계시되…”(<법화경> 서품)
유마힐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어진 이여, 그대는 이미 시방세계를 헤아릴 수 없는 수십억 불국토에서 노닌 적이 있는데, 어떤 불국토에 가장 뛰어나고 오묘하고 공덕이 갖춰진 대사자좌가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했다.
“동쪽으로 36항하사(恒河沙) 등의 불국토들을 지나면 부처님의 세계가 있는데, 그 이름을 수미상(須彌相)이라고 합니다. 그 불국토의 여래는 수미등왕(須彌燈王)이라고 부르는데, 현재도 그곳에 안온히 머물고 계십니다. 그 부처님의 키는 84억 요자나이고, 사자좌의 높이는 68억 요자나입니다. <유마경중 불가사의한 이야기>
중국계의 산학책에는 다음과 같은 큰 수, 작은 수가 소개되어 있다.
즉 ‘대수’는 억(億)·조(兆)·경(京)·해(垓)·자(姉)·양(壤)·구(溝)·윤(潤)·정(正)·재(載) 등 10개의 단위 다음에 새로 극(極)·항하사(恒河沙)·아승기(阿僧祇)·나유타(那由他)·불가사의(不可思議)·무량수(無量數) 등 이것들은 모두 만만(万万)진법(108진법:1 뒤에 0이 8개씩 늘어나는 것)에 의해서 자리바꿈을 한다. 항하사, 아승기, 불가사의, 무량수 등은 모두 불경에서 착용한 것이다. 1무량수는 1 뒤에 68개의 0이 붙는다.
항하사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또한 이것과 대응하는 작은 수가 있다. ‘소수’는 분(分)·리(釐)·호(毫)·사(絲)·미(微)·섬(纖)·사(沙)(여기까지는 10진법)·진(塵)·애(애)·묘막(渺漠)·모호(模糊)·준순(浚巡)·수유(須臾)·순식(瞬息)·탄지(彈指)·찰나(刹那)·육덕(六德)·허(虛)·공(空)·청정(淸淨)(이상 만만 10-8진법)이다.
불교적인 비유는 무한소·무한대에 이어진다. 항하사(갠지스 강의 모래알의 개수) 만큼의 많은 나무에 또 그만큼 많은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마다 그만큼 많은 입자가 있다는 식의 사유 형식이다. 그러나 아무리 큰 수일지라도 그것은 유한이다. 그들은 엄청나게 큰 수로서 무한에 접근해 가는 것이다.
이 발상법을 역방향으로 전개하면 무한소로서의 영의 접근이다. 특히 시간의 단위를 무한소로 분할해 보면 과거와 현재 사이를 경계지을 수 있는 시간의 폭은 없다. 아무리 짧은 폭일지라도 분명한 시간의 길이가 있다.
인도의 시간 단위중 불교에 자주 등장하는 찰나(刹那)라는 말이 있다. 불교에서는 최소의 시간 단위이며, 인도의 씨름 장사의 한 탄지(彈指) (엄지손가락과 중지를 순간적으로 퉁겼을 때 소리나는 시간) 사이에는 65찰나가 있다는 것이다. 약 65분의 1초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찰나에 대한 반대의 말은 ‘겁(劫)’이다. 인도 고대의 힌두교의 계산에 의히면 1겁은 43억2천만년이다. 그것은 전우주(梵天)의 하루의 반이며, 범천(梵天)의 새벽에 세계가 창조되고 그 해가 질 무렵에 파괴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의 계산은 아무리 자세히 해도 별로 큰 의미는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 이 엄청난 최소·최대의 시간 앞에 압도당할 뿐이다. 불교에서는 이 찰나와 겁의 말을 비유로써 설명한다. 그 가운데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개자성겁(芥子城劫)과 반석겁(盤石劫)이다.
불교는 이런 비유로 무한소·무한대를 인간의 사유 체계에 편입시키고 현대 수학의 논리 체계와 접점을 갖는다. 개자성겁은 ‘한 변의 길이가 10여 킬로미터의 입방체인 철로 만든 성에 겨자씨가 가득 들어 있다. 백년마다 그 안에서 한 알의 겨자씨를 빼낼 때, 그 많은 겨자씨 전부를 다 버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1겁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또 반석겁은 ‘각 변의 길이가 10여 킬로미터인 입방체의 큰 바위가 있는데 백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치맛단에 스쳐 큰 바위 덩어리가 모두 닳아 없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8>大數와 緣起
무량한 인연 모여 ‘나’ 탄생
멱수셈으로 緣起세계 풀이
지난 주 본란에서 불교 경전에 엄청나게 큰 수, 아승기겁(阿僧祗劫), 항하사(恒河沙), 무량대수(無量大數) 등이 자주 등장하고 있음을 소개했다. 불교는 분명히 수학은 아닌데 왜 이처럼 엄청난 수를 다루게 되었을까?
그것은 불교의 기본적 사고방식이 ‘연기(緣起)’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나’의 존재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여러 얽히고 설킨 인연(緣起)이 있다. 이 사실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단순하게 생물학적인 입장에 국한해서 생각해 보아도 엄청난 수가 필요함을 금방 알 것이다.
실제로 나를 태어나게 한 조상의 수를 어림으로 계산해 보자. 우선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났다. 나의 부모에게는 각각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며 또 그 분들의 아버지, 어머니, 조부모가 계신다. 이렇게 40대(代)만 거슬러 올라가도
240=1,099,511,627,776
1조995억1천162만7천776명이나 된다.
잠깐 <표>를 보자. 1대를 평균 30년으로 생각한다면 불과 1200년 전(前)의 일이다.
40대전 1,099,511,627,736(약 1200년 전)
30대전 1,073,741,824(약 900년 전)
20대전 1,048,576(약 600년 전)
?
5대전 16
4대전 8
3대전 4
2대전 2 나
이와 같이 한 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급속히 그 수가 증가하는데 이것을 ‘멱수의 마력’이라 한다. 가장 계산하기 쉬운 수 체계는 일, 십, 백, 천,… 이라는 식으로 한 단위가 10개씩 모아질 때마다 한 단계씩 올라가는 10진법이다. 10진법은 곱셈에서는 0만 붙이면 되므로 계산하기가 쉽다.
10을 중심으로 계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10+10=20(덧셈)
(2) 10×10=100(곱셈)
(3) 1010=10000000000(멱수셈)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0을 두고 계산하는데도 덧셈, 곱셈, 지수셈 등의 계산법이 있으며 계산법에 따라서 결과에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연기의 입장에서 하는 계산법은 위의 3가지 계산법 중에서 마지막 멱수법이다.
가령 하나의 현상이 10개의 요인에 얽혀 나타나고, 또한 저마다의 요인에 대 해서 각각 10개의 요인이 있다면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그 연기의 요소를 두 단계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10×10×10×10×10×10×10×10×10×10=1010
1010=10,000,000,000
즉 100억의 요인이 있다.
<법화경>의 ‘종지용출품’에서는 6만 항하사라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이나 많은 수라는 비유가 나온다. 이런 엄청난 수도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 게 한 몇대 전의 인연과 나를 중심에 두고 앞으로 전개될 인연의 수를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한 삶을 탄생시키는데 얽힌 연기의 수가 어찌 10개 뿐인가! 나의 탄생은 바로 이렇게 엄청난 인연의 수에 의한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엄청난 무한을 알게 될 때, 세계를 어떻게 설명해 야 할 것인가, 또 세계의 모양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과 나의 관계가 무엇 인가를 따지게 된다.
불교철학은 한 대상을 제대로 파헤치기 위해서 이런 엄청난 수를 등장시킨 것이다.
<9>법화경의 수
-삼천진점겁 광년 척도로 계산 못해 -
-무시무종의 과거·현재·미래 인연 -
인류 사상 최대의 과학자로 일컬어지는 뉴턴은 역학법칙과 미적분학을 발견해 이론 물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것은 행성의 불규칙적인 운동, 혜성의 주기, 일월식, 바닷물의 간만 현상… 등 거의 모든 천체 운동을 체계적으로 명확히 설명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도였고 그의 업적은 하나님의 창조 내용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며 특히 말년에는 천지창조의 시기를 밝히는데 정성을 쏟았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그의 계산에 의하면 처음에는 창조의 시기를 6천년전, 그후 계산의 잘못을 인정하고 약 8천년전 정도로 수정했다. 그의 과학 업적에 비해 놀라울 만큼 유치한 생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현재 과학으로 발견된 가장 먼 성운은 지구로부터 수조광년 떨어진 것으로 그 지름이 1억 광년에 이른다. 뉴턴이 생각한 하나님은 터무니없이 왜소했었던 것이다.
<법화경>(서품제1)에는 석존의 가르침이 현재에 멈추지 않고 과거→현재→미래에 걸치는 교화 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불교적인 과거→현재→미래의 시간관이 여실히 나타난다. 가령 ‘화성보처유(化城寶處喩)’의 ‘화성유품제칠(化城唯品第七)’에는 석존의 교화가 먼 과거로부터 시작되어 왔음을 밝힌다. 그것은 삼천진점겁(三千塵点劫)이라는 먼 옛날에 석존이 태어나 그 최고 대각 경지에 이르렀고 그 교화가 오늘에까지도 이어져 있음을 말한다.
삼천대천세계의 국토를 갈아
이 모든 지종(地種)으로 먹을 만들어
일천 국토 지나서야 한 점 떨구어
이리 되풀이해 이 먹 다하고,
점 떨구고 안떨군 이 모든 국토들을
다시 뭉개 한 티끌로 일겁 친대도
이 티끌 수효보다 그 겁이 더 길리라.
저 부처의 멸도하심 이리 길건만
여래의 무애지는 저 부처의 멸도와
성문·보살 알기를 오늘 보듯 하노라 <법화경·이원섭 주해>
삼천진점겁이란 전세계의 물질을 갈아 원자로 만들어 그 한 점을 동방의 천개의 국토를 지났을 때 내리고, 또 그 다음의 천 개의 국토를 지났을 때 또 한 개를 내리고… 이런 식으로 모든 원자를 내린 뒤, 모두가 없어질 때 일겁(一劫)으로 하고, 그것을 3천번 되풀이했을 때 경과한 시간이다. 어림으로 지구상의 나라를 2백개로 잡아 지구를 5번 돌았을 때 미진을 하나 내린다고 생각하자. 광속도는 1초에 지구를 7번 반을 돌아간다 해도 1미진이 떨어지는 시간이 30초, 여기에 전 지구상의 물질을 원자의 상태로 갈았을 때의 개수를 곱하는 것이 1겁이다. 그리고 그것에 3천을 곱한 수…, 이런 식으로 계산한 결과는 광년의 척도(尺度)로 계산한다 해도 헤아릴 수 없는 먼 과거의 시간이다. 또한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에서는 미래세계에 대한 석존의 교화가 설명된다.
1. 그때, 천 세계의 미진(微塵)과 같은 수의 보살마하살-땅으로부터 솟아나온 이들이다-이 부처님 면전에서 일심으로 합장하여 존안(尊顔) 우러러 뵙고 부처님께 아뢰오되,
2. “세존이시여 저희가 부처님의 멸도하신후, 세존의 분신(分身)들이 계시는 국토-멸도하신 그곳에서 마땅히 이 경 두루 설하오리니, 어째서이뇨. 저희 또한 스스로 이 참되고 청정하고 큰 법을 얻어, 수지·독송·해설·서사해, 이를 공양하고자 바람이로소이다” 지용(地涌)의 보살들은 석존의 가르침을 전하는 불사(佛使)이다. 이들은 수가 천의 세계를 갈아 극미의 미진과도 같은 많은 수다.
이처럼 엄청난 큰 수를 등장시킴으로써 ‘현재’의 모든 현상이 그만큼 많은 인연의 결과이며 또한 이 순간의 일이 미래에 엄청난 인연으로 얽혀 전개되어 감을 시사하고 있다. 불교는 이 엄청난 수의 바다에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철학을 실감해 온 것이다. 뉴턴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10>우주론
- 과학 空의 상태서 대폭발후 우주탄생 -
- 불교 삼천대천세계 10억 수미계 존재 -
필자는 수년전 캠브리지 대학에서 세계적인 동양 과학사와 생화학, 두 분야에 걸친 세계적인 권위자 J.니담 교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 생명의 우주적 환경’을 주제로 한 매우 인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종교 또는 신학은 최신의 거시, 극미 세계에 관한 새로운 과학 업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적인 대종교는 대부분이 이천년하고도 수백년 전에 창시되었으므로 당시의 교리를 경전의 내용 그대로 고집하는 것은 만화적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이천 수백년 전의 공간관이 지금의 과학 지식과 일치되는 부분이 있었다면 오랫동안 황당 무계한 것으로 여겨져 왔을 것이다. 현대의 최신 과학 지식과 불교의 공간관, 시간관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최신의 우주론은 ‘우주는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을까?’하는 고대 이래의 인류적인 중요 문제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즉 ‘우주는 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불교의 “무시무종(無始無終, 시간도 끝도 없다)”과 일맥상통한다. 최신 과학은 이 사실을 빅뱅(Big Bang)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설에 의하면 우주의 시작은 소립자보다 작은 극미의 우주이며 시간, 공간, 물질, 에너지… 등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였다. 이것에 양자론적인 물리현상(던낼효과)이 발생하므로써 우주가 탄생되었다. 우주가 탄생된 1/100의 1초 후의 온도는 1000억도, 그리고 1초 후에는 100억도로 냉각되고 10억년 후 은하계가 형성된다. 154억년 후에 행성이 태어나고,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200억년 후의 일이다. <법화경>의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서는 빅뱅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많이 묘사되어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실때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 모두가 진동하여 갈라지고 그 속에서 무량천만억의 보살이 솟아난다. 팔천항하사(八千恒河沙, 갠지스강 전체 모래알의 팔천배 개수)의 보살이 ‘석존이 입멸한 후 이 사바세계에서 열심히 정진하여 <법화경>의 가르침을 지키며 읽고, 베끼고, 공양할 수 있도록 허용되기를 간청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그 청은 필요없다’고 하신다. 이때 대지가 진동하여 갈라진 대지에서 육만항하사(六万恒河沙) 만큼의 종자(從者)가 뒤따라 나타난다. 이들이 미래 세계에 <법화경>의 가르침을 전할 것이다. 이와 같이 차례로 나타나는 엄청난 보살의 등장은 빅뱅의 결과와 같다. 불교의 거대한 시간관, 공간관은 오늘날의 천문학적인 광년의 세계에 ?
育의構玆?남음이 있다.
불교적 공간 세계는 삼천대천으로 표현되고 있다. ?중에서는 수미산(須彌山)이 있다. 불교적인 거리 단위인 요자나(由旬, Yojana)가 그 크기를 나타낸다. 세계의 중심에는 팔만유순(八万由旬, 약 9억미터) 높이의 수미산이 있다. 이 산을 팔산(八山), 팔해(八海)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곳을 태양과 달이 돌고 일수미세계(一須彌世界)를 이루고 있다. 일수미세계가 1000개 모여 소천세계(小千世界), 소천세계가 1000개 모여 중천세계(中千世界), 중천세계가 1000개 모여 삼천대천세계가 된다. 다시 말해서 삼천대천세계에는 약 10억의 수미계(須彌界)가 있는 것이다. 현재의 우주론에서 이 전 우주에는 수천개의 태양이 산재하고 있다고 추측되어 있는데 삼천대천세계에는 10억의 태양이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삼천대천세계는 현재도 팽창을 계속하고 있는 우주의 크기를 넘은 거대한 세계이다.
이들 수가 모두 ((10n)n)n…이라는 식으로 멱승으로 표시하고 있다. 거시 세계의 크기를 나타내는 숫자다. 현대의 종교가 마크로(macro, 거대), 미크로(micro, 극미)의 과학 업적과 접목되어야 한다는 J.니담의 주장을이미 2500년 전의 불교가 성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11>무한
- 불교는 무한세계를 한묶음으로 인식 -
- 자유로운 사유 무한넘어 완결에 접근 -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자신의 주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생활이 단순한 시절에는 기껏해야 이것, 저것, … 정도가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오지의 원시사회에서는 지금도 하나, 둘, 많다 정도의 수만을 갖고 살고 있다. 3이상의 수에 대해서는 그저 많다고 할 뿐이다. 이 사실은 어린이의 수 세계를 관찰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는 하나, 둘, 그리고 많다, 무지무지하게 많다… 정도로 수를 표시한다.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발전한 인간은 1, 2, 3, … 백, 천, 만, …으로 수를 확장해 나갔다. 상당한 수준의 문명 사회가 되어도 만, 억 정도면 충분했다. 이때 어느 천재가 스스로 물었다. 도대체 수는 얼마나 커질 것인가? 분명히 얼마든지 수는 커 갈 수 있다. ‘얼마든지’라는 뜻은 무엇인가? 조금 똑똑한 사람이 대답한다. 그것은 ‘무한’이다. 무한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전문적인 수학자, 철학자가 아니면 대부분은 그저 ‘무한이면 되지 그 이상 쓸 데 없이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해서 그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마치 어린이가
1, 2, 3, 많다. 무지무지하게 많다… 라고 하는 것,
또는 원시 사회에서 1, 2, 많다, 많다, … 라고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는 일이다.
1, 2, … 무한이라는 것과 1, 2, 3, … 만, 억 …, 무한이라는 것 사이에 후자에게는 좀더 많은 수가 등장할 뿐이고 결국에는 무한으로 낙찰되는데 이들 3자 사이에는 근본적으로는 별다름이 없는 것이다. 다만 많다, 또는 무지 많다는 말을 무한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1, 2, 3, … 무한으로 커져 간다는 것과
1, 2, 3, …을 한 덩어리로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교적인 수 체계는 아승기(阿僧祇), 나유타(那由他), 불가사의(不可思議) 무량수(無量數)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무량수는 크기는 하지만 1부터 시작되는 수의 연장선에 있는 유한의 수이며 무한으로 뻗어 가는 한 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을 한 묶음으로 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1, 2, 3 …, n으로 그친다면 아무리 n이 큰 수일지라도 유한이다.
1, 2, 3, …은 무한으로 확대되어 간다는 동적인, 말하자면 무한이 될 가능성 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1, 2, 3, …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고 할 때는 완성된 무한이다. 조금 혼동하기 쉬움으로 좀더 자세하게 이들 두 무한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
(1) 1, 2, 3, …… → 무한으로 커 가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2) {1, 2, 3, ……}을 끝까지 포함하는 한 덩어리를 생각하는 것을 완성(완결) 무한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보거나 듣지 못한 사실도 머리 속에서는 생각할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 그 존재를 확립할 수 있다. 이때 순수 사유의 철학적 세계가 전개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유한의 시간 위에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유한의 인간이 어떻게 계속 무한으로까지 수를 셈할 수 있는가? 또는 완성된 무한은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철학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인간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부처가 되는 인간은 단순한 생물적인 존재가 아니나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의 대상에는 무한도 포함시킬 수 있다. 자유로이 사유 세계를 넘나들고 유한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있는 경지가 ‘무애(無碍)’이다.
불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유한 세계의 극점에까지 생각하고 다시 그곳에서 무한 세계를 넘어간다. 이성을 지렛대 삼아 상식적인 세계를 벗어나서 비약을 한다.
가령 <법화경>에는 지용(地涌)의 보살 수는 5만 항하사(恒河沙)로 돌출했다. 또한 각 하나의 보살에는 5만 항하사의 시종이 이어져 있다. 이 논리를 계속 전개해 가면 한 사람의 시종에 또 5만 항하사 만큼의 그 아래 종자(從者)가 있고, 또 그 아래…라는 식으로 분출되는 수의 가능성은 무한으로 뻗어 가고 있다.
여기서 이들 거대한 무한 세계 모두를 한 묶음으로 인식, 파악하는 이성(부처의 지혜)의 존재를 알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서 불교적인 지혜는 가능한 무한 세계를 넘어 완결된 무한에 접근하는 것이다. 불교적 사유에서는 늘 이 문제를 다루며 그 가능성을 따진다.
<12>불교와 무한(1)
- 유한과 무한은 같아 …‘一卽多 多卽一’-
- 순간은 영원도 내포…복제인간도 한 예 -
석가모니는 B·C. 566년에서 486년까지 생존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중생에게 헤아릴 수 없는 먼 전생의 인연을 깨닫게 하고 오늘날의 나의 깨달음이 먼 미래에까지 세계가 불국토(불교적인 좋은 세상)가 되도록 하는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법화경>의 전생불, 미래불의 사상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이다. 그러나 전생과 후생의 인연의 얽힘 속에 무한을 산다. 불교의 대오(大悟), 유교의 안심입명(安心立命,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깨닫고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은 한결같이 유한의 인간이 무한의 생명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됨을 말한다.
아무리 미세한 곤충도 무한의 생명 연쇄 속에 하나의 고리로써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무한을 의식하지 못한 채 순간 순간을 살아갈 뿐이다. ‘산다’는 것은 의식하는 일이다. 인간은 무한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의식하므로써 무한을 산다.
<화엄경>에서는 대담하게 ‘인간은 태아의 입자이다’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태양(생명의 원천)빛의 입자와 같이 생명의 씨를 안고, 저마다 그들의 마음속에 불성(佛性)을 지닌다.
불성이란 무한을 의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의 생명을 무한 세계에 대응시킬 수 있는 지혜이다. 그러기에 악인은 없으며 중생(민중) 모두가 정진을 거듭하므로써 부처가 될 수 있다. 자성을 갖춘 인간은 직관적으로 무한을 엿볼 수 있다.
영국의 18세기 신비주의 시인인 브레이크(W. Blake)도 그 사실을 깨닫고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의 꽃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의 무한은
일각에서부터 영겁(永劫)의 시간을 파악한다.
아무리 작은 한 알의 모래알도 세계의 구성 요소의 하나이다. 부분은 전체를 이루는 한 요인이다. 한 송이의 꽃을 피게 하는 인연의 고리를 다듬어 무거운 생명 의지를 느낀다. 공간적으로 손바닥이 무한 세계에 대응하고 일순간에 영겁의 시간이 대응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화엄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나타내고 있다.
‘일회(一會)에 세계가 충만하다’
‘일(一)에 무량(無量)의 세계가 있다’
‘일모공(一毛孔)에 대세계가 있다’
‘일중생(一衆生)에 광대한 여래(如來)의 지혜가 있다’
‘한순간에 영원이 내포된다’
‘일(一)에 세계해(世界海)가 들어 있다’
극미의 세계와 대우주, 한 순간과 영겁의 시간이 대응한다.
불교에는 이와 같이 얼핏 상식의 세계에서는 엉뚱하다고 생각되는 말들이 많 다. 유한과 무한의 같음은 분명히 상식에 벗어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분명 히 현대 수학의 무한 논리와 일치하고 있다.
현대 수학은 ‘무한의 과학’이라고도 한다. 현대 수학의 부분과 전체의 같 음을 말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이 사실을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로 표시한다.
불교가 마음의 무한성을 깨닫고 일찍부터 이 주제를 갖고 여러모로 씨름해 왔다면 현대 수학은 19세기말 무한의 특성이 전체와 부분이 같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 과학은 실제로 한 가지씩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해 내고 있다. 클로닝(cloining, 복제 인간)도 그 한 예이다. 인간의 피부 세포 하나만 있으 면, 나뭇가지를 심어 새 나무를 성장시키는 것처럼 똑같은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켜보면 복제 인간의 가능성도 이미 ‘무한과 유한’의 일체성에서 감지 되어 왔던 것이다.
<13>불교와 무한(2)
불교는 무수억 인연 직관으로 파악
최근 필자는 BBC방송이 제작한 ‘식물 세계’를 보면서 수십 시간을 1초로 단축하여 식물의 성장 상태를 보여주는 화면에 큰 감명을 받았다. 넝쿨은 마치 살아 있는 문어발처럼 순간마다 뻗어 나가고 잎사귀가 돋아나자 금방 꽃이 피고 진다. 식물의 일생이 그야말로 일장춘몽으로 시작되고 끝나고 다음 세대에 이어져 있다. 제행무상(諸行無相)의 의미를 이 필림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광속도로 1억 광년에 걸치는 지름을 갖는 거대한 성운도 한 장의 우주 지도에 그려질 때는 한낱 점에 불과하다. 현대 과학의 발달은 제행무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불교 철학에서는 일찍이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여러 부처님을 공양함에 있어서 한끼(一食) 사이에 모두 무량(無量), 무수억(無數億)의 여러 부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한다면 정각(正覺)을 얻지 못한다. <무량 수경>
여러 부처님에 대한 공양, 곧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한 수조 광년의 시간·공간의 무게를 자각하는 일이다. 그것은 잠깐의 시간(일식 사이)에 엄청난 인연에서 얽힘을 깨닫고 시간으로는 순간, 공간으로서는 점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작업이다.
이 순간 나를 에워싸고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한 인연의 얽힘은 무수억의 생명 의지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무엇으로도 이 무서운 인연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며 그 무게에 압도당할 것만 같다. 하지만 불자는 용기를 가지고 이 진리를 응시하며 순간마다 스스로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겠다.
지난 주 본란에서 근대 수학의 무한에 대한 이해는 “무한이란 부분과 같을 수 있는 것”이며 불교적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과 상통함을 설명했었다. 개념의 겉보기는 수학과 불교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수학의 무한은 유한 개념의 연장선상에 무한을 정의한다. ‘무한’이란 한마디로 막연하게 여겨 왔던 개념을 자세히 분류하고 이들 사이에 대소 관계가 있고 비교를 가능케 한 것이었다.
‘무한은 유한의 연장선상에서 정의한다’ 이 뜻은 무한의 유한화라고도 할 수 있다. 유한적인 대상은 많다 적다 등 크기의 비교가 가능하다. 가령 A라는 집합은 10명의 학생의 모임이고, B라는 집합은 9개의 책상의 모임이다. 지금 A(10명의 학생)와 B(9개의 학생) 사이에 어느 쪽이 많은 가를 보기 위해서는 학생 한 사람마다 의자에 앉게 하면 된다. 이것은 1대 1의 대응이라 한다.
이때 한 학생이 의자에 앉을 수 없을 때는 학생 수가 의자의 수보다 1개 더 많다고 한다. 1대 1의 대응이 완전히 성립하면 두 집합의 개수는 같으며 그것이 성립하지 않으면 과부족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요소를 지닌 집합들 사이의 비교도 이와같이 ‘1대 1의 대응’ 방법으로 크기를 비교할 수 있다. 유한적인 비교 방법을 그대로 무한적인 대상에 적응시킴으로써 무한들 사이에 대소, 같음의 관계를 정의한 것이다.
1, 2, 3, … n, … 자연수의 집합은
2, 4, 6, … 2n, … 짝수의 집합과
1대 1의 대응이 성립하여 같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0과 1 사이에 있는 수, 가령 0.0123 …,과 같은 것의 수 집합, 일반적으로 0. a1, a2, a3, … an …의 수의 모임은 정수 전체의 집합보다 큰 것임이 증명되었다.
이와같이 무한이라고 한마디로 처리해 온 대상들 사이에도 유한 세계의 수처럼 대소 여러 종류의 수가 있다.
그러나 불교적인 무한은 이들 여러 종류의 무한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원리를 파악했다. 그것은 인간이 ‘지금, 이 곳’에 존재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고속도촬영법에 묘사된 수십 년간의 나무의 성장과정이 몇 초간에 묘사될 때 그 나무의 참모습은 오직 ‘지금, 이 곳’일 수밖에 없음이 실감된다. 인간의 그 존재 양식인 무량, 무수억의 부처님의 생명 의지를 집약하고 있는 것이다
<14>불교와 무한(3)
- 전체와 부분 같은질서 유지하는 동등한 세계 -
- 연화장 세계 안에 무한의 연화장 세계 존재 -
하나의 무한집합 속에 자신과 같은 정도의 무한집합이 정연하게 전체와 부분 서로의 질서를 깨뜨림 없이 존재한다. 간단한 1, 2, 3, …으로 구성되는 수 중에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2, 4, 6, … 2n 또는 1, 3, 5, … 2n-1과 같은 짝수, 홀수 전체의 집합이 있다. 이들은 부분으로써 전체와 같은 정도로 많은 무한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그 보다 훨씬 작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전체와 같아질 수 있다. 이 엄청난 무한의 이법(理法)이 공간적, 시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세존의 입 안의 이(齒)사이로부터 수없이 많은 빛이 방사되고 시방(十方)의 세계를 비치고 있다고 묘사했다. 그 빛을 받은 보살은 연화장(蓮華藏) 세계를 볼 수 있고, 그 연화장 세계에는 무한의 세계가 있고 그 하나하나의 세계에는 각각 부처가 있다. 또 하나의 연화장 세계를 중심으로 무한의 연화장 세계가 각자의 부처를 중심으로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수학에서는 가시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선분 AB의 일부분에 불과한 선분 CD속에 포함되어 있는 점의 개수는 전체 AB속에 포함되어 있는 점의 개수와 같다고 한다. 수학은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위<그림>의 직선 선분 AB에서 선분 CD를 들어 올려 그림과 같은 삼각형을 만든다. 점 P에서 CD상의 한 점(P1)을 지나 AB와 만나는 점을 P2로 한다. CD위의 점과 AB위의 점이 완전히 일대 일로 대응하는 것이다.
자연수 전체(1, 2, 3, … k …)와 짝수 전체(2, 4, 6, … 2k …)가 같은 정도로 많은 요소를 갖는다는 것은
1↔2
2↔4
3↔6
? ?
k↔2k
라는 식으로 완전히 일대 일 대응하기 때문이다.
AB의 한 부분을 지나지 않는 CD위의 한 점은 완전히 1:1 대응이 됨을 알았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과부족이 없는 같음이 증명되었다.
위 사실은 선분의 길이가 아무리 길어도, 또 아무리 짧아도 같은 정도로 무한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와 그 일부분은 같은 질서를 유지하면서 동등한 세계로 존재한다’는 주장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며 엄밀한 수학적 논리에도 검증된 것이다. 그뿐인가! 이보다 큰 집합이 존재하고, 이어서 얼마든지 큰 무한집합이 한없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 입증되어 있으며, 엄연한 수학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
“모든 불토(佛土)를 부처의 일모공(一毛孔) 속에 넣어도 남음이 있다. 부처의 자비란 허공과 같이 광대하다”<화엄경>
무한세계의 무한한 확장을 말한 것이다. 무한세계에 사유의 첫발을 디딜 때, 얼핏 모순 덩어리로 보이는 그 질서에 아연실색한다. 무한세계는 부분이 전체와 같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세계이며, 또 ‘여하한 무한도 최대의 무한이 될 수 없다’는 인간의 현실 감각을 벗어난 세계이다.
<15>불교와 무한(4)
- “수학의 대상 유한” 기독교적 사유 -
- 불교선‘전체=부분’ 무한론 인정 -
사람은 유한의 대상에 대해서 비교가 가능하고 순서를 정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처음 수학의 대상은 유한 세계에 머물고 있다.
유한만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이때까지 ‘무한(無限)’의 개념은 한마디로 질서가 없는 것, 설사 정연한 이법(理法)이 지배하고 있다 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은 오직 유한에만 생각하고 그 속에서 질서에 순종하면 된다고 믿어 온 것이다. 그러나 무한의 모습이 수시로 유한의 틈에서 엿보인다. 무한도 유한처럼 합리적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을까? 그것은 오랜 옛날부터 지성인간의 최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무한’이 합리적인 사유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그 개념(무한이란 무엇인가?)의 파악이 가능하고, 둘째 무한과 무한 사이의 관계가 정해져야 한다. 무한이 수학(인식)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크기’에 있어서 그들 사이에서 같은 무한, 작은 무한, 큰 무한 등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유한 세계의 같음으로부터 생각하자. 두 개의 집합이 같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1대 1의 대응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과 10개와 접시 10개 사이에는 분명히 1대 1의 대응이 생긴다. 야구 시합에서 A팀과 B팀 사이에 같은 아흡 명의 선수가 출전할 때만 그 게임이 성립하는 것이다.
칸토르(G. Cantor)는 1883년 인류 사상 처음으로 무한이 수학의 대상이 된다고 선언했다. 1, 2, 3, …이라는 가장 단순한 자연수계에도 무한개의 수가 있다. 그 속에는 2, 4, 6,… 이라는 짝수만으로 성립되는 수계(數系)가 있는데, 그것 역시 무한개의 요소가 있다. 그뿐인가. 3, 6, 9, … 등의 3의 배수계, 4의 배수계 … 무한개의 무한집합이 존재한다.
지금 우리가 생각한 자연수계 1, 2, 3, … 과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짝수계 또는 3의 배수계 사이에도 1대 1의 대응이 생긴다는 것이다.
n↔2n이란 n과 2n이 대응된다는 것이다. 결국 n과 100n의 대응이 되며 그 논리는 n에 n억(億)을 대응시킬 수도 있다.
n↔2n(n은 2n에 대응한다)
n↔3n(n은 3n에 대응한다)
?
이와 같이 생각하면, 자연수 전체는 짝수 전체와 1대 1의 대응이 되고, 3의 배수 전체와 대응되고 있다. 짝수 전체의 집합, 3배수 전체의 집합은 분명히 자연수 전체집합의 부분집합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곧 ‘부분과 전체’의 같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을 절대로 유한 세계에는 없는 일이다.
유한만을 수학의 대상으로 삼아 온 사람에게는 ‘전체와 부분이 같다’란 곧 지동설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 천동설을 듣게 하는 것과 같이 놀라운 일이다. 칸토르는 이 사실을 발견하자, ‘나는 분명 보았다(증명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었다’고 절규한다. 백림대학의 저명한 수학자 크로네커(L. Kuroneoker, 1823~1891)는 이 놀라운 사실을 보고 ‘신은 정수만 창조하셨다’하여 수학의 대상은 곧 유한이어야 된다고 소리쳤다.
이 난에서 전에도 유태, 기독교의 세계관이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는 만화적임을 설명한 적이 있다. 현대 수학이 개막되는 문턱에서도 무한의 문제는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그후 수학자는 ‘무한이란 부분과 같을 수 있는 것(부분과 전체가 1대 1 대응한다)’이라고 정의한다. 무한의 수학적 정의이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에서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내세워 왔다. 이 사실은 곧 불교의 사유 대상은 처음부터 무한에서 시작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너무 길어서 옮겨 놓았다 다음에 읽어야 하겠네요.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한번 읽어서 이해가 힘듭니다 옮겨 놓았다가 두고 두고 읽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