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명선 시집 『오후를 견디는 법』 현대시 시인선 .119
금붕어의 건망증
오명선
질문이 건너가기도 전에
눈빛이 마음에 닿기도 전에
나의 문장은 너에게 읽히지 못하고 사라졌다
너의 공식에 의하면
내 기억력은 딱 3초
기억이 녹스는 시간을
너는 일방적으로 요약하고 결론짓는다
소유권은 너에게 있지만
내 기억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
내뿜는 물방울이
내가 쓴 길고 긴 문장이라는 것을 넌 알지 못했다
몸을 숨기던 수초도
헤엄쳐 온 길들도
징검다리는 되지 못했다
네가 생각하는 3초는 짧지만
이 어항 속의 3초는 천년,
나는 아직, 건망증의 힘으로 살아있다
파본破本
오명선
빨간 스프레이가 담벼락을 X자로 그었어요
핏빛은 늘 불길해요 이곳은 결국 간이역이었죠
선로가 사라진 이곳, 어둠이 등에 뿌리를 내려요
잡동사니 퀴퀴한 냄새가 편안해요 엄마와 학교를 피해
숨던 침침한 책상 밑처럼,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듯, 창문에 돌을 던져요 파열
음이 내 손목을 긋고 사라져요 나를 버린 가족을 향해 침을
뱉어요
골목을 걷어차던 발목이 다시 시큰거려요
나는 불온한 책, 세상은 끝까지 나를 읽어주지 않았죠
나를 한 장씩 찢어내던 산동네
내 것이 아닌 낯선 길들을 묻어버릴래요
포클레인이 길을 낸 산동네는 어둠의 울음만 키우지요
달빛에 말린 울음이 버석거려요
내 치부를 들춰본 저 밤을 받아먹으며 성장을 멈출래요
쪽수를 넘기려고 애쓰지 마세요
난장판인 나를 바꾸고 싶지 않아요
애초에 낙장落張으로 태어난 걸요
아직 할퀴어야 할 것이 많이 남았어요
못 2
오명선
나는
잠자는 듯 살아 있다
쇠를 잃은 것은 오래,
탕탕, 내 머릴 쳐야 목이 트인다
붙박인
나의 복종은 단단하다
목까지 잠긴 벽을 뽑을 수 없다
당신은 약관에 맞지 않습니다
오명선
들고 있던 커피 잔이 놀라 바닥으로 떨어진다
책상모서리와 계단이 내 무릎을 찧고 도망치는 순간, 어
둠이 덮쳤다
그들의 입맛에 맞춰진 약관에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해 오는 것인지
눈이 침침해지는 것인지
오른쪽 눈의 실명
20년 무탈한 내 기록들의 항의에도 나의 내일은 부적합
판정
당신은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습니다
다섯 개 보험회사가 단번에 나를 뱉어버렸다
남은 왼쪽 눈마저 캄캄한 벼랑으로 굴렀다
먹통이 된 휴대폰처럼
고장 난 내가 약관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하나를 잃는다는 것, 짝을 채울 수 없는 통증이
오른쪽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제시한 나의 미래는 적신호
어디에도 나는 삭제되고 없었다
거인의 망치
오명선
망치는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창조의 도구다.
니체ㅡ「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광화문 새문안길
키 22m 몸무게 50t의 사내
허공을 향해 망치를 내리친다
헐거운 도시의 무릎에 못이 박히는 소리
가로수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망치질 소리에 쩍 금이 간 허공으로
까치 한 마리가 밑줄을 긋는다
1분에 한 번 내리치는
끈질긴 저 망치질에 빌딩 숲이 들썩이고
우르르 쏟아낸 사람들을 다시 삼키는 회전문
도시는 회전 중이다
귀에 못이 박히는 저 망치질 소리
회색 도시에 나타난 거대한 사내가 봄을 부른다
지루한 거리가 꽃을 내걸고
보도블록을 깨뜨리고
새 현수막을 거느라 꽝꽝 못질을 하고 있다
자물쇠
오명선
숲의 빗장이 풀리고
나무들이 빛을 찍어 바른다
열쇠는
저 연둣빛 바람, 그리고 빗소리
한때 꿈쩍 않는 문 앞에 서있었다
시큰거리는 팔목으로
매달린 자물쇠를 수만 번 흔들었다
빛이 사라진 길은 어두웠다
나는 점점 지워지고
마음으로 드는 길, 끝내 찾지 못했다
가끔 나를 열고
너를 꺼내 본다
그때, 우리는
죽은 새의 울음을 베고 잤는지도 모른다
집귀신
오명선
그 여자
달팽이처럼 집을 지고 산다
문을 나서면 귀가 먹먹, 눈앞이 캄캄하다
눈을 부릅뜬 차량들 일제히 달려든다
늘 그녀를 위협하는 바깥
거듭되는 실패도 모두 바깥에서 벌어졌다
가장 안전한 곳은 바깥의 반대
그녀는 집에 갇혀 편안하다
두 개의 안테나를 세우고
바깥 세상에 초점을 맞춘다
푹신한 소파에서 TV를 보고 신문을 읽는다
바깥을 단속하고 그녀는 두 다리를 뻗는다
종일 집과 엉키어
전화벨 초인종소리에 깜짝깜짝 촉수를 세운다
어린 시절, 군에 가서 죽은 오빠가 또 참견한다
집에서 나가면 안돼
바깥은 모두 지뢰밭이야
어린 가슴에 뿌리 박혀 자란 지병이 도진다
그녀의 발을 꽁꽁 묶은 강박관념
집은 그녀의 전부가 되어
컴퓨터가 은행 일을 보고 쇼핑을 하고 세상을 읽고 집이 신발을 끌어안고 잠을 잔다
그녀는 달팽이가 되기 위해 오늘도 발을 자른다
나무들의 기억파일
오명선
나무가 제 몸에
제 깊이만큼 시간을 새길 수 있는 것은
속살을 단단히 감싸 쥔 수피樹皮때문이다
느슨한 가지를 탱탱하게 잡아당기는 햇살
순간, 뼈마디를 늘려주는 것들은 발밑에 있다
잎들의 향기를 받아낸 허공은
수만 번의 기록 위에 다시 계절을 쓴다
모두가 제 몸의 기억,
바람의 중심에 서서
제 깊이만큼 그늘을 짠다
사후에야 볼 수 있는 저 비밀파일,
한 번도 누구의 중심이 된 적 없어
나이테를 그리다 만
미완의 압축파일,
바람이 채워야 할 빈 서랍 같은 나날을
나는 서둘러 열어보고 싶은 것이다
빗나가는 예의
오명선
화장은 여자의 기본 예의라고 하는데
한쪽 눈을 감아야 하는 아이라인,
나로선 엄두도 못 낼 일
20년째 내 예의는
어린 아들 허벅지에 덮친 국그릇이고 자지러지는 울음을 받아낸 밥상이고
시시때때로 욱신거리는 2도火傷이다
속 모르는 사람들
늘 비껴가는 인사에
싸가지가 없어, 싹수없어, 나를 오독했고
예의바른 두 눈의 너와
한쪽 눈밖에 없는 나의 거리가
언제나 어긋나는 사랑처럼 멀기만 하다
차단된 내 오른쪽 길,
거울 앞에 앉아 아이라이너 펜슬을 든다
번번이 빗나가는 예의가 캄캄하다
얼음의 시간
오명선
과녁을 그리던 수심이 묶여 있다
수면을 꽉 깨문 구름의 어금니들
밑줄 그어놓은 물의 잔뼈들이 이렇게 견고하다니,
지금은 얼음의 시간
잔물결이 맨발로 견뎌야 할 저 강은
등 돌린 밤이다
톱날로 베어지는 물도 있어
계절은 제 그림자 속에 가둬둔 울음을 관통해야 한다는 것
저것은 침묵의 두께
내 무릎관절이 수천 번을 더 오르내려야 할
미완의 경전이다
앙다문 물의 입술
굳어버린 물의 표정은 싸늘하다
■ 오명선 시인
부산 출생 부산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시로여는세상> 등단
2012년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창작기금 수혜
2012년 시집 <오후를 견디는 법>
첫댓글 시집이 도중에 분실된 건 처음있는 일이다.
오명선시인이 다시 챙겨주지 않았으면 읽을 수 없었던 시편들 ....
곱게 물든 단풍잎을 간직하듯 시인을 들여다 본다.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