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서정과 서사 1 / 이종수 (시인)
대학신문 문학상 수상자를 알리는 공고란에 시(詩)가 시(時)로 소개된 것을 종종 본다. 오자이지만 비유적으로 말하면 時거나 詩라도 상관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증거 같다. 시시한 시를 쓴다고 시인 자책하는 시가 많으니 시가 무엇을 나타낼 것인지, 무엇을 줄 것인지 애매한 시대가 되었다.
시의 위기라고도 하고 새로운 시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도 한다.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겪으면서 민중정서 위주의 시들이 쓰여지고 난 뒤 1990년대를 기점으로 신서정이라는 새로운 경향의 시들까지 통들어보면 그 안에는 서정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가, 라는 논쟁이 있었다. 서정시가 원래 악기에 맞추어 부르던 노래였던 만큼 음이나 리듬에 있어 감미로운 경향이 있었고 유창하게 반복적인 구문을 지니는 경향이 있다는 사전적 해설을 놓고 보더라도 서정의 폭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개인의 즐거움이나 슬픔 혹은 명상적인 내적 통찰, 영탄조의 표현을 바탕으로 폭넓고 복잡하게 변화되어 온 것이다.
김수우 시인은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온도인가’(딩아돌하, 2007년 봄)라는 글에서 시의 정신을 코끼리의 코에 비유한 바 있다. ‘시의 정신은 삶과 꿈,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무수한 틈새기와 시간으로 빽빽하고 우글쭈글하다. 시인은 분열된 세계, 타자와의 틈, 현실과 상상의 모든 간극에 작용하는, 미시적인 데서부터 거시적인 데까지, 아메바적인 생명감에서부터 첨단의 사이버현실까지 접촉하면서 존재의 이랑을 일구어내야 하는 한 마리 지축을 울리는 코끼리인 것이다.’ 하고.
민주화시대를 거치고 자본주의의 첨단을 향해 달리고 있는, 복제된 이미지들과 분열증적인 물질사회(김수우)에서 소외되어버린 우리들에게 문학의 역할과 관련하여 ‘서정’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 특히 시를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해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왜 감각적인 동물인지, 감각을 통해 대상과 동질감을 느끼고 생명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실천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주목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서정은 힘을 발견하고 회복하는 것이며, 힘의 리듬과 울림을 사유하는 것이며, 강렬한 잠재력이어야 한다.’(김수우)는 말처럼.
어느 한가한 날 아니 결코 한가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숲을 걸어야 한다 어느 바람 부는 날, 때죽나무 하얀 꽃그늘에 앉아 내 안에 가두었던 사람들도 훨훨 날려 보내고 그렇게 그리움의 허물도 벗고 숲의 적막을 나는 흰점나비 한 마리 따라가며 두려움도 없이 길을 잃어야 한다 그리하여 능선의 늙은 주목나무를 만나 한 가닥 회한도 없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어린 고라니 새끼와 눈도 마주치며 다시금 사랑을 할 수 있으리 이렇듯 화려한 저자거리에서도 늘 숲을 걸을 수 있으리
- 박두규, <늘 숲을 걷고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숲이란 무엇인가, 숲을 이루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보고 있는가, 단지 나무에 잎이 돋고 봄이 오는 이치를 아는 것 이상으로 ‘사랑’을 느끼고 실천할 수 있는 교감을 얻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숲의 적막을 나는 흰점나비 한 마리 따라가며/두려움도 없이 길을 잃어야 한다’는 것은 물질문명이 내재된 내비게이션 인간성을 과감히 파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며 우리의 사랑이 상대방에게서도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것이다. 사랑은 신념의 행위이며 누구든 신념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도 없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을 다시 꺼내는 까닭인 것이다. ‘자기 힘의 생산적 활용’이 바로 사랑이니 여기서 신념이란 진정한 ‘서정’의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를 그냥 숲을 이루는 단위로만 보지 않고 어느새 숲이 되어 ‘자기 힘의 생산적 활용’이 자연 스스로에게, 인간들에게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면 인간의 감각은 그만큼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서정은 어느 순간 깨달을 수 있는 힘이기도 하지만 상호교감하면서 나와 타자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이다. 가슴 속의 버튼 하나를 눌러야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있는 눈을 뜨고 반응하는 일이 독자들에게도 느껴지게 해야 한다.
문득, 시베리아를 떠나 호주까지 날아가야 한다는 고니나 흑두루미 같은 새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도심의 거리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하루 종일 걷고 있는 거리의 군중들을 보며 문득, 저 사람들도 언제쯤이나 시베리아를 떠나 호주로 갈 것인가가 궁금하다 늘 다투고 질시하던 눈빛도 없이 질서 있고 평화롭게 날아오르는 저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내 안의 새 한 마리가 궁금해졌다 나를 두고 이미 혼자서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어쩌면 반대편에서 늘 나를 불편하게 하던 지금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저 녀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가로수에서 떨어지던 이파리들의 미세한 떨림조차 내 안의 모든 실핏줄로 번져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이 일고 목젖을 적시던 평화로운 커피가 역류하더니 생활하수처럼 썩은 수십 년 묵은 평화를 쏟아냈다 다 토했다 싶을 즈음 내 안의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새 한 마리가 젖은 날개를 털었다
- 박두규, <문득>
불의 발견이 어둠을 밝힌 데만 있지 않고 인간 삶의 영역을 넓히는데 있었지만 전쟁 같은 ‘다툼과 질시’를 가져왔다는 것은 알 것이다. 거위털을 뽑아다 따뜻함을 만들었고, 그들의 유전자를 연구하여 문명의 한 축을 만들었다. 검은 눈물(석유)을 뽑아내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하고 있기도 하다. ‘미세한 떨림조차/내 안의 모든 실핏줄로 번져오는 것을 느낄 수’있는 진정한 ‘파문’을 두려워한 나머지 첨단으로 무장한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이다.
‘서정’이란 좌우를 나누는 어느 한쪽의 것이 아니다.
1년에 한 번인가 원고청탁을 받고 허둥대며 시를 쓰는 나는 시인인가?
서푼어치도 안되는 원고료를 받고야 시를 쓰는 나는 시인인가?
사는 정치를 못하는 재주 그 재주를 가지고 시를 쓰는 나는 시인인가?
시인이 아니라 하면서 시가 나오지 않는 날은 소주병만 비우는 사는 시인인가?
시를 썼으면/그걸 그냥 땅에 묻어 두거나 하늘에 묻어 둘 일이거늘/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불쌍하도다./ 나여/하는 시인 정현종씨를 생각하는 나는 시인인가?
- 이선관, <나는 시인인가>
어느 쪽이든 이렇게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시가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A: 이봐! 자네 무엇이 되고 싶다 했지? 무엇을 하고 싶다고 했던가? B: 하고 싶다고 했지! A: 되고 싶다나 하고 싶다나 마찬가지잖아? 그래 판사? 검사? 변호사? 교도관? B: 아니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교도관도……! A: 그럼 성직자? B: 성직자가 되고 싶었던 순수한 시절은 있었지. A: 그럼 정치가? B: 이 나라 국민치고 정치의 그 막강한 권력에 매력을 안 느껴 본 사람은 없을걸? 허지만……! A: 그럼 재벌? B: 우리나라 재벌은 재벌이라 부르기엔 부끄럽잖아? 장사치라고 부르는 게 낫지! A: 그럼 예술가? B: 그 중에 시인도 포함되겠지. 나도 시라는 형식을 빌어 글을 쓰곤 있지만 예술가라고 자부해 본 적은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양심을 도매금으로 넘겨 주는 창부는 되기 싫어! A: 그럼 언론인? B: 기름이 번져 비대해진 그 누구인가 몹시 앓다가 고혈압으로 넘어짐으로 말미암아 포주로 전락해버린 그 무관의 제왕 말인가? A: 그럼 아이 아버진? B: 누구보다 아이는 좋아하지! 성장하는 생명의 신비감! 만약 이 세상에서 그 생명의 신비감이 소멸되면 이 세상은 끝장이야! 암 끝장이고말고! A: 그럼 평범한 존재라도? B: 그 참 좋은 말을 했군! 그러나 말일세, 평범한 존재가 되려고 무척 노력했었지.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부모가 형제가 스승이 선배가 후배가 친구가 이웃이 현실이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 주었나, 어디 한 번 묻고 싶네! 어리석은 질문이네만……! A: 그럼 무엇을 하고 싶나? B: 말하지! 선언을 하고 싶네! A: 선언을? B: 그래, 인간선언! 나는 너를 향해 너는 나를 향해 인간선언을 할 때가 왔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인간 이상의 신이 아닌, 인간 이하의 동물도 아닌, 인간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한 인간선언을 하세! 아아, 인간선언을……! A: ……?
- 이선관, <인간선언>
‘서정’을 ‘인간선언’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1985년에 쓴 시다. 그 무렵 민주화시위가 한창이던 때에 터져 나온 ‘인간선언’이란 한마디로 생명을 다시 발견하고 추스르자는 것이었다. 인간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시란 ‘자기 힘의 생산적 활용’을 하지 못하는 백해무익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사랑은 우리 둘의 사랑은 꽃이 나비를 부르면 나비가 꽃을 찾아가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오 꽃에 취해 바람에 취해 넋이 나간 그런 사랑이 아니라오
우리 둘의 사랑은 은하수 건너 무지개끝을 달리는 그런 사랑도 아니라오 누구 누구 아무개 싯귀처럼 단풍나무 숲으로 난 작은 길로 백마 타고 청포자락 날리며 가는 그런 사랑도 아니고요
사랑은 크낙한 사랑은 먼 데서 오는 것이라오 까마득하게 달보다도 만리장성보다 먼 데서 오는 그런 사랑이라도 그 사랑 때로는 강물 따라 기차의 속도로 오기도 하지만 굼벵이 걸음마보다 더디 오기도 하고 그 사랑 때로는 십오야 밝은 달 만월이 되어 오기도 하지만 그믐이라 허기진 달 공달이 되어 오기도 한다오 사랑은 크낙한 우리들의 사랑은 깎아지른 벼랑 바위산을 넘기도 하고 파도로 사나운 밤바다를 건너기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으며 오는 것이라오
이를테면 이렇게 온다오 우리들의 사랑은 가도가도 해가 뜨지 않는 전라도라 반역의 땅 천리 길 먼 데서 온다오 백년보다 먼 갑오년 반란으로 일어나 원한의 절정 죽창에 양반들과 부호의 목을 달고 온다오 빼앗긴 땅 제 것으로 찾아갖고 온다오 빼앗긴 자유 제 것으로 찾아갖고 온다오 사랑은 우리 시대의 사랑은
- 김남주, <우리 시대의 사랑>
80년대 민중시의 최고봉을 이루던 김남주 시인이 90년대 새로운 민중서정을 발견하면서 써낸 시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오합지졸마냥 여기는 대중적인 사랑, 시정잡배라 부르는 퇴폐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삶의 현장에서 불 보듯 뻔한 이치를 발견해내는 사랑으로 오는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나는 농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자손대대로 가난한 것은 농부이니까
농부가 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역사 이래로 가난한 것은 시인이니까
가난함에서 시인과 농부는 형제이느니 농부이면서 그가 부자라면 농부가 아닐 것이다 그는 아마 거머리일 것이다 농부의 허벅지에 붙어 디룩디룩 살이 찐 가난함에서 시인과 농부는 동지이느니 시인이면서 그가 부자라면 그는 시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아마 거지발싸개일 것이다 자본가의 접시에 한눈을 파는
- 김남주, <시인과 농부와>
시인이 가야 할 길과 농부가 가야 할 길에 무엇이 걸림돌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시가 되지 않는 것으로 괴롭기만 하다면 그것은 변비일 뿐이다. 시인과 농부가 왜 가난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지 물질문명의 꼭대기에 오르려고 ‘자발적인 가난’을 내버리는 것은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결코 지나간 시대의 시라고만 볼 수 없는 일이다. 문명의 질주에 맞서 ‘인간선언’은 ‘자연보호법’과도 같은 인위적인 선언으로서만 그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간절한 동기와 함께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물어야 하는 이 시대의 ‘서정’ 에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당인리 발전소의 세 굴뚝은 맏이와 중간과 막내…… 검은 연기나 희부연 연기를 뻐끔뻐끔 내뿜을 땐 동화 속의 커다란 파이프. 그 위로 한 점 구름이 노를 젓는다. 헌칠한 몸매 미끈한 키 색동을 두른 꼬마 그 허리쯤에 황혼의 지평선이 띠를 두른다.
- 문덕수, <풍경>
이도 저도 아닌 서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정이 그저 시인이 그어놓은 풍경만에 있지 않고 샘솟고, 부딪치고, 소리치는 인간 본연의 울림 속에서 거듭 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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