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 들길을 걸어
오월 둘째 화요일이다. 이른 아침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근교 들녘으로 나가기 위해 창원역 앞을 경유하는 버스를 탔다. 본디 주간 계획에는 아침나절 마을 도서관에서 보낼 일정을 설계해 놓았더랬다. 집에서부터 마을 도서관까지 이동 거리를 고려해 걸리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섰다. 도서관에서 문이 열리기 이전 두어 시간 들녘을 거닐고 열람실을 찾을 생각이라 서둘렀다.
집 앞 정류소에서 월영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원역 앞에서 내렸다. 창원역을 기점으로 삼아 신전 강가로 나가는 1번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새벽이다시피 이른 시간부터 움직이는 이들은 신성한 노동으로 생계를 잇는 분들이라 동행하는 나로서는 경건하게 대할 분이다. 근래 가술 사학재단 학교에는 무슨 시설 공사가 있는지 철거 전문 인력 둘이 타고 다님도 알게 되었다.
도계동 만남의 광장을 거치면서 대산 산업단지 출근 회사원과 하우스 농사일을 나갈 부녀들이 더 보태졌다. 워낙 이른 시각이라 고등학생은 아직 등교가 일러 보이지 않는 때였다. 동읍 행정복지센터와 대산 산업단지를 지나면서 대부분 승객이 내렸고 제1 수산교 이후까지 타고 간 이는 내 말고 한 사내만 남았다. 그는 갈전마을에서 내렸고 신전 종점까지는 내가 마지막 승객이었다.
종점 신전마을에서 내려 창원 시민들의 식수원을 공급하는 대산 정수장으로 나갔다. 강 건너편은 밀양 수산과 초동 곡강으로, 일동 둔치는 수십 개 취수정에서 뽑아 올린 강변 여과수를 정수하는 곳이다. 정수장 진입로 부근에서 농로를 따라 걸으니 노지에 심은 봄 감자는 잎줄기가 시퍼렇게 자라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감자는 겨울 비닐하우스에서는 촉성으로 키우고 봄에도 심었다.
감자밭과 이웃한 비닐하우스에는 토마토와 풋고추를 가꾼 농장도 나왔다. 감자는 심을 때와 깰 때만 집중된 일손이 필요한 단순 농사라도, 토마토는 풋고추는 어린 모종부터 긴 수확 기간 내내 일손은 물론 고급 영농 기술이 뒤따르는 농사였다. 예전보다 줄기는 해도 수박 농사도 마찬가지였다. 지난겨울과 봄에 예년보다 비가 잦아 일조량이 부족해서 농부의 시름이 깊기도 했다.
바둑판처럼 구획이 정리된 농로에서 직각을 꺾어 아스팔트로 포장된 차도로 나가자 들녘 한 구역은 인부들이 바글바글 엎드려 앉아 바쁜 일손을 움직였다. 그곳 역시 겨울 비닐하우스에서 당근을 재배한 농장이었다. 갓길 대형 트럭 적재함으로는 새벽부터 캐서 담은 당근이 실리고 있었다. 부녀들은 당근을 뽑아 잎을 잘라서 상자에 담고 남자들은 상자를 묶어 차에 싣는 일을 했다.
들녘 특용 작물 농사는 계약 재배로 이루어졌다. 자기 농지에서 짓는 농사든, 남의 농지를 임차해 짓는 농사든 농부는 생산 단계까지고, 그 이후 수확과 판매 유통 단계는 외지에서 들어오는 수집상이 인부를 데려와 수확해서 경매장이나 도매상으로 넘겼다. 넓은 들녘에는 여러 작물이 파종에서부터 생산과 수확까지 시기가 각기 달랐고 인력 공급과 배분도 체계가 잘 짜여 있었다.
신전에서 찻길 따라 평리로 나와서 다시 들길을 따라 걸으니 연근 농사를 짓는 구역에는 물을 채운 논바닥에 연잎이 펼쳐 자랐다. 그곳도 아직 캐지 않은 대규모 당근 재배 비닐하우스와 수박 비닐하우스가 나왔다. 초봄에 산수유가 노란 꽃을 피웠던 죽동천 둑길을 걸어 가술 마을 도서관에 닿으니 문이 열려 열람실로 올라 서가 앞에서 지난번 못다 읽은 책을 찾아 열람석에 앉았다.
20여 년 전 민음사에 펴낸 서울대 중문과 이병한 교수가 쓴 역대 중국 한시 번역본 하권이다. 상권 ‘치자꽃 향기 코끝을 스치고’에 이은 ‘이태백이 없으니 누구에게 술을 판다?’였다. 30여 년 전 서울대 관악 캠퍼스 인문대 교수 합동 연구실 ‘자하헌’에서 당시 석학들이 산창 한담으로 풀어낸 한시 명편이었다. 중문학 국문학은 물론 영문학과나 사회과학 교수들도 관심을 가졌다. 24.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