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읽기
토마스 만은 자신의 삶과 존재방식,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 체계에 대해 끊임 없이 고민하고 사고하던 작가이다. <마의 산>은 이러한 자아성찰과 서구의 정신사를 담고 있는 토마스 만의 대표작으로 길고 복잡한 문체와 자전적 요소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마의 산>은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가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 방문했다가 7년 동안 환자생활을 하면서 겪게되는 이야기로 모순된 두 세계의 대립 속에 갈등하는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주인공의 자아와 의식의 전개과정을 서술하는 것을 넘어 삶에 대한 가능성과 한계를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치열한 고뇌가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의 전통에 속한다. 만은 환자들 사이의 논쟁을 통해서 당대의 철학적, 정치적 화두를 제시한다. 휴머니즘 대 현실로 다가오는 전체주의를 탐구하려 한다.
카스트로프는 또한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된 공간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이해하려 한다. 그가 사랑한 클라우디아 쇼사트가 그에게 남긴, 당황스러울 정도로 친근한 유물은 바로 결핵으로 뿌옇게 되어버린 그녀의 폐를 찍은 X-레이 사진인 것이다.
평지로 돌아오려던 계획을 점점 뒤로 미루면서 몇 주에 불과했던 체류는 몇 달이 되고, 몇 년이 된다. 마의 산의 요양원에서는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다.
독자는 한스 카스트르프와 함께 그가 마의 산 요양원에서 보낸 7년 동안의 강렬한 순간들--, 비극적이고, 에로틱하고, 세속적이고, 어색한 —을 경험한다.
(앞에서 소개한 줄거리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토마스 만>
토마스 만(1875년 6월 6일 ~ 1955년 8월 12일)은 독일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사상적인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에 있어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비롯, 괴테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토마스 만의 형은 급진적인 작가 하인리히 만이다. 그리고 6명의 자식 중 3명인 Erika Mann, 클라우스 만, Golo Mann들도 또한 독일의 중요한 작가로 성장했다.
토마스 만은 평의원이며 곡물 상인이었던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과 율리아 다 실바 브룬스 부부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로 독일의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율리아는 7살 때 독일로 망명한 부분적 독일계 브라질리안이다. 토마스 만의 아버지가 1891년에 돌아가시면서 회사는 청산되었다. 1893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보험 회사의 견습 사원이 되었다. 이때 첫 작품 <호의>가 잡지에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토마스 만은 뤼베크 체육관 기술 분야에 참가하면서, 뮌헨 대학과 기술대학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당시 그는 역사, 경제학, 미술역사, 문학등을 공부하게 되면서 언론계로 커리어를 준비하게 된다. 그는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에서 살았던 1년을 제외하면 1891년부터 1933년까지 형이자 소설가인 하인리히와 함께 뮌헨에 거주하게 된다. 토마스 만은 보험회사에서 1894년에서 1895년까지 일을 하게 된다. 그가 Simplicissimus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토마스 만의 첫 번째 소설은 1898년에 출판된 "꼬마 프리데만 씨" 이다.
1901년 부유한 상인의 집안이 4대에 걸쳐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장편 <부덴브로크스 가의 사람들>을 발표하여 문단에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가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는 여러 정황이 있으나 종국에는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사랑에 빠졌다. 1905년, 그는 그녀와 결혼을 하며, 6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프리드리히와 대동맹>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 <독일 공화국에 대하여> 등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고, 점차 구낭만주의적인 반지성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휴머니즘을 품기 시작하였다. 1924년 12년간의 노력의 결정인 장편소설 <마의 산>을 발표하였는데, 이 소설은 손꼽히는 발전 소설로서 독일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29년 토마스 만은 Nidden(Nida, 리투아니아)에 있는 어촌에 오두막을 가진다. 그 곳에는 독일 예술 공동체가 있었으며, 1930년에서 1932년 여름에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Joseph and his Brothers)"을 집필한다. 현재 이 오두막은 소규모 전시를 하면서 토마스 만에 대한 문화적인 중심이 됐다.
1933년 나치스 정권 성립으로 조국을 떠나, 남프랑스·스위스 등을 거쳐, 1938년 미국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업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높은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민주주의 옹호를 위해 싸웠다.
1942년 그의 가족들은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Pacific Palisades로 이사를 한다. 그 곳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게 된다. 1944년 6월 23일, 토마스 만은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된다. 1952년에 스위스, 취리히 근처에 있는 Kilchberg에서 살게 된다.
1955년 취리히에 있는 한 병원에서 아테롬선 동맥 경화증으로 죽고, Kilchberg에 묻힌다. 많은 협회들이 그의 이름을 기린다.
토마스 만의 작품은 처음으로 H. T. Lowe-Porter가 번역했다. 그녀는 토마스 만의 작품을 영어권 사회에 크게 전파시켰다.
정치적 관점에서 본 토마스 만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토마스 만은 카이저의 (독일의 빌헬름 2세) 보수주의를 지지하고 진보주의를 공격한다.
1930년 토마스 만은 베를린에서 "An Appeal to Reason" 라는 연설을 한다. 그는 강하게 나치중심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운동권들에 의한 반대를 격력한다. 이것은 그가 집필한 수많은 평론과 문학에서 나치를 공격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에 대해서 늘어나는 동정을 표현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을 했을 당시, 토마스 만과 아내는 스위스에서 주말을 보냈다. 나치 정책에 대한 그의 매우 강력한 비난 때문에, 아들 클라우스는 돌아가지 말자고 권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책은 하인리히나 클라우스의 책들과는 달리, 히틀러 정권에 의해서 태워지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가 1929년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1936년 나치 정권이 공식적으로 토마스 만의 독일 시민권을 빼앗아간다. 몇 달 후, 그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러나 1933년 8월 26일이라고 기록된 개인적인 편지(그러나 2007년 8월 30일에 공개됐다)에서, 이미, 토마스 만은 나치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하고 있었고, 이것은 후에 "파우스투스 박사(Doktor Faustus)"와 일치한다. 이 소설에서, 토마스 만은 2차 대전에서 모든 잔인함에 대한 독일 국민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감을 가진 몇몇 지역들을 언급한다.
전쟁 동안, 토마스 만은 반-나치 라디오 연설 시리즈(Deutsche Hörer! ("German listeners!"))를 만든다. 이것은 미국에서 녹음돼서 영국에 전해지고, BBC가 방송을 하게 되면서 독일 청취자들도 듣기를 원했다.